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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그림자 Sep 07. 2022

지리산 종주

나를 비우는 시간



22년 여름의 지리산 종주.


20년만에 지리산을 걸었다. 20년전은 겨울이었고, 지금은 한여름이었다. 새벽즈음부터 걷던 지리산은  별이 쏟아졌고, 바람이 불면 시원했으며, 어디서든 신비로운 들꽃들과 함께 걸었다.

오길 잘했다.



출발


머릿속이 답답할때는 걷는게 최고다. 단순히 걷기가 아니라 극단으로 나를 몰아붙이는 걷기를 하고나면 맘이 상쾌해지고, 내 안에 새로운 공기와 다짐들이 차오르는것을 느낀다.

여러 블로그로 코스를 검색해보고, 짐을 꾸려 용산역으로 향했다. 밤 9시 25분 무궁화호 기차는 새벽 두시에 구례구역에 도착했다. 거기서 버스를 타고 성삼재까지.


세시 조금 넘은 시간에 성삼재에 도착했고, 밤새 한숨도 못잔 상태였지만 설레임 가득이다. 출발. 헤드렌턴을 켜고 깜깜한 길을 걷는다. 잠시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 보면 별이 쏟아진다. 20년전 겨울 벽소령에서 보았던 손에 잡힐듯했던 그 별이다. 


계속 오르막을 지나 노고단 입구에 도착, 아직도 컴컴하고 멀리 여명이 밝아온다.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천왕봉 방향으로 향한다. 갈길은 아직 멀다. 이제 시작이다.


새벽이지만 숲속은 아직 어둡다. 헤드랜턴에 의지해서 가벼운 발길로 걷는다. 점점 사위가 밝아지고 랜턴을 껐다. 임걸령 샘에서 잠시 목을 축이고, 오전 여섯시 반 삼도봉에서 간단히 요기한다. 

같은 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모르는 일행들과 함께 걷는다.  서울에서 오신 중년의 부부와, 네명의 아주머니들. 홀로 걷는 길이 조금 쓸쓸하기도 하지만 오롯이 걷기에만 집중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머리를 비울때는 홀로 걷기만한 게 없는 것같다. 걷는 내내 예쁜 야생화들이 곁에 있다. 도시에서는 쉽게 볼수 없는 꽃들이고 하나같이 어쩜 저렇게 오묘하고 아름다운지.


윤회를 믿지 않는다만 혹시나 다음 생애에는 꽃으로 태어나고 싶은 마음도 든다.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이렇게 부대끼며 살고 싶은 맘이 요즘같아서는 들지 않는다. 죽음이 어느새 곁에 많이 다가온걸 느낀다.


감상은 잠시. 다시 걷자. 구름이 약간 낀 날씨의 지리산은  7월말의 폭염에도 불구하고 시원했다. 바람이 불어오면 땀이 날아가 시원함을 느낀다. 쉴새없이 땀은 쏟아져 나온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물이 내 몸에서 나오는 것일까?


연하천 대피소 도착. 라면 한그릇 뚝딱. 길에서 만난 인연들이 연하천에서 또 다시 모였다. 라면을 먹고 옥수수를 하나 얻어먹고 출발. 오전 열시.


오늘의 최종 목적지는 세석 대피소. 중간에 벽소령도착. 20년 전에 하룻밤 머물었던 곳인데, 어느새 20년전.  20년전 대학교 1학년 동기 넷과 함께 겨울 지리산 종주를 했다. 그때 같이 왔던 동기누나가 갈비를 재서 벽소령까지 들고왔고 추운 산장에서 맛있게 구워 먹었던 기억이 있다. 대부분 처음 산행이었고 그것도 겨울 지리산 종주라니. 치기어린 도전이었지만 젊음이기에 가능했고 함께였기에 즐거웠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서로 도와가며 2박 3일을 함께 걸었다. 그 첫날밤을 묵은 곳이 이곳 벽소령이었다. 변한건 없는데 20년이 흘렀네.


벽소령 점심이 지나자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기차에서 조금이라도 눈을 붙였어야 했는데, 설렘과 잡념에 뜬눈으로 보낸 탓에 한숨도 못자고 새벽부터 걷기 시작한게 벌써 열시간쯤.


정신이 혼미하고 다리는 풀리고 발바닥은 물집이 잡혔다. 오르막 내리막을 반복하다보니 무릎도 성치 않다. 세석 도착 전 마지막 한시간은 어떻게 갔는지도 잘 모르겠다. 가까워 보이는 길은 끝없이 멀기만 했고, 주위를 돌아볼 겨를 없이 한걸음 한걸음 터벅터벅 나아갔다. 


세석 도착. 물을 끓여 커피를 한잔 마신다. 피로가 사라지고  나니 세석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열세시간 가까이 걸어 이곳에 왔다. 해질녁 세석은 시원한 바람과 함께 푸르렀다. 역시나 오길 잘했다. 


유난히 다정한 부부가 옆 벤치에 앉았다. 남자는 종일 울퉁불퉁한 길을 걸었을 여자의 발을 물티슈로 정성스레 닦아준 후 발바닥에 파스를 발라준다. 부부의 살가운 대화를 듣다보니 시샘과 미소가 동시에 나온다, 함께 나이를 먹고 함께 무언가를 할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일상을 넘어서는 공통관심사 한두개는 부부에게 꼭 필요하다. 아니면 점점 대화는 없어지고, 기껏 하는 대화라고 해 봐야 인사와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뿐 서로의 삶 속에서 멀어지게 된다. 멀어진다기 보다는 감정이 변하는 거겠지, 일상에 만족하거나, 아님 포기하거나. 아님 꾹꾹 누르고 살거나. 


해가 진다. 시원한 바람은 이제 몸에 살짝 냉기를 돌게 한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바람을 맞는다. 사위는 어두워져가고, 구름과 바람이 몰려온다. 

여름의 절정에 지리산 높은 곳의 저녁은 시원하다 못해 춥기까지 하다니, 좋은 피서가 된것 같다. 


저녁도 먹었고 극심한 피로가 몰려온다. 벌써 산장 내부는 여기저기 잠을 청하는 사람들이 많다. 설핏 잠이 들었었나, 탱크같은 코골이에 잠이 깼다. 이대로 더 잠들지 못한다면 내일 산행은 포기하고 하산을 해야 하는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휴지를 뭉쳐 귀를 막고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다시 잠을 청한다. 예민한 사람에게 산장의 하룻밤은 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종일 땀을 흘리고도 제대로 씻을수도 없고, 다같이 모여 자는 잠자리도 세상 불편하다. 어찌어찌 다시 눈을 뜨니 새벽 세시가 가까워진 시간. 잠을 더 잘 수없어 일어나 짐을 챙겼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홀로 길을 나선다. 천왕봉에 가보자!

홀로 걷는 길바람이 많이 불고, 헤드랜턴을 켰지만 길은 어둡고, 외롭기도, 조금 무섭기도 하다.  날이 밝아와도 안개덕에 한치앞도 보이지 않는다. 세석부터는 능선길이 많아 날이 좋으면 멋진 풍경들이 좌우로 펼쳐질텐데 아무것도 보지못했다.  장터목에서 천왕봉까지의 마지막 구간, 일출을 보려고 일찍 올라간 사람들과 반대편부터 넘어온 사람들을 계속 마주친다. 그렇게 한시간쯤 걸었을까. 천왕봉에 올랐다.



정상에 올랐다고 특별한 소감은 없다. 바람이 몹시도 불고, 춥기도 하여 잠시 후 내려왔다. 오르는 과정이 즐겁지 정상에 오르는 것은 별로 중요치 않다. 높은 산을 걷고 싶지 그 산의 꼭대기까지 오르고픈 욕망은 사실 별로 없다.

걷다보면 이래저래 생각들이 사라지고, 오롯이 걷기에 집중하는 순간들이 생긴다. 그 순간들이 너무 즐겁고 나에게 꼭 필요하다. 나를 비워내는 시간들. 그래서 핸드폰이 터지지 않는 곳들이 좋고, 히말라야도 사람이 제일 없는 계절에 찾곤 했다. 극한의 걷기로 나를 내몰면(?) 그게 나에게는 힐링이고 휴식이다. 변태가 분명하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곳에가서 며칠씩 거대한 산을 바라보며 걷다보면 내 안의 찌꺼기들이 스멀스멀 빠져나간다. 위로와 위안이 되는 시간들이다. 비우러 가는 시간들이지만 새로운 에너지들을 가득 담아온다.

비워야 다시 채울수 있다.


중산리 하산길, 길은 재미없지만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지나온 길들을 생각하고 서울에 가서 할 일들을 생각한다. 여젼히 신비로운 들꽃들과 함께 걷는다. 


당분간 몹시도 바쁠것이다. 이틀동안 걸으면서 얻은 에너지를 잘 아껴 써야겠다.

역시나 산에 오길 잘했다.  (2022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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