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가장 좋아하던 작가는 이상이었다. 언어영역에나 등장하는 박제된 천재 말고 그러니까 내가 한 열일곱 쯤에 만난 찌질하고 놀랍도록 섬세하고 그러나 세계에 반항하지 않는 순하디 순한 그이 말이다. 얼굴이 하얀 아이 김해경과 소설 날개에서 애인의 경대 머리맡에 빛놀음이나 하던 화자. 지금의 나로 태어난 것이 오류처럼 느껴져 괴롭던 사춘기의 독자인 나. 이 셋이 개기월식처럼 겹쳐지던 때가 있었다. 거울에 맺힌 자화의 나라. 괴롭고 아름다운 나르시시즘의 대화가 이상에게는 있었다.
곰 같은 여우든 여우 같은 곰이든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다 알고 다 느끼고 다 이해해도 다 반대할 수 없어서 결국 무기력한 존재. 그래서 점차 바늘 끝처럼 뾰족하던 세계는 침식하고 결국 퇴화하고야 마는 순간을 거울로 바라본다. 여전히 기민하지만 입 밖으로 외부로 내보이지 않는 나를 마주한다. 상에 맺히지 않으면, 관측되지 않으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만 ‘오염’ 당하지 않는다. 나는 김해경처럼 순한 얼굴과 모호한 말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했다. 나의 의견과는 판이하게 다른 인터넷 기사나 악플에 댓글 한 번 제대로 달아본 적 없는 유령으로, 시킨 것 잘 해내는 모범생으로 곧잘 갖혀 지낸다. 내 안에 똬리 튼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나 밖으로 꺼내 보인 일이 없어서 적절하게 유지되는 ‘오염’ 없는 세계였다. 원죄다. 미안하고 부끄럽다. 합법의 강인함과 용기를 마주할 자신도, 위법에 함몰될 자주도 없다. 거울을 바라보는 것은 그러므로 일종의 반성이다.
필름 카메라를 배우러 멀리 대구까지 갔다. 현상도 직접 해주는 멋진 곳이었다. 대학생 때 수업으로 잠깐 필름 현상과 인화까지 해 본 기억이 있지만 가물가물했던 차였다. 사진 찍는 취미는 아마도 그림을 그리기에는 게으르고 무기력한 성정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빛이 그려주는 그림. 나 이전에 거울에 맺히는 상. 그러므로 오롯이 모두 내가 해낸 것이 아니라는 변명과 면죄부가 가능한 창작의 영역. 매력적인 분야라고 생각했다. 수동 필카를 손에 쥐고 제일 먼저 한 일은 거울에 대고 나의 셀카를 찍는 일이었다. 철컥. 셔터박스가 거울을 쳐 올리는 소리. 내가 보고 있는 순간이 기록되는 것이 아닌 카메라 뷰파인더에서 상이 사라지는 그 잠깐의 개입이 필름에 기록된다고 한다. 결국 필름에 남은 것은 내가 의도한 그 순간이 아니라 한 박자 카메라의 개입으로 ‘오염’된 그 순간이다. 자화상이라고 볼 수도 아니라고도 할 수 있는 객관적 초상이다.
다 찍은 필름을 감아 카메라에서 빼낸다. 현상을 해야 한다. 현상이란 필름에 입력된 빛의 정보 값을 약품으로 표면화하는 작업이다. 요즘에는 그렇게 현상한 필름을 인화하기보다 스캔해서 디지털화한다. 비로소 폰이나 컴퓨터에 옮길 수 있는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카메라로 내 얼굴의 반절은 가린 모습. 페르소나의 감옥 안에서 벌벌 떨고 있는 김해경의 이미지가 오버랩된다. 그때 나는 행복한 와중에 불안했었나. 혹은 불행한 와중에 때때로 행복했을까. 이상이 날개를 기도하는 순간보다 경대 위의 분내음을 맡으며 햇살을 구슬리던 그 장면이 나에게는 최고다. 똑바로 대면할 자신이 없으면 카메라 뒤로라도 숨어보는 나. 여전히 열일곱 그 이상의 성장이 없다.
*김해경은 작가 이상의 본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