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설렘이라 쓰고 불안이라 읽었던 날들의 실종

by 올빗ORBIT

손에 베이는 계절이 여기에 있는데 자꾸 뒤돌아본다. ‘사랑’을 ‘사랑’이라고 발음하지 못하고 퇴행하는 그림자. 무수히 어렸고 설익은 나날이 스친다. 몰라서 아팠고 아파서 흔들렸다. 채 여물지 못해서 여름. 가 버린 가을. 우리에게 봄이 있었을까 싶었을 때 맞잡은 손에서는 나무뿌리 같은 것들이 돋아나 서로를 얽었다. 가려운 등이나 긁어주는 사이. 불안이 종식된 관계. 서글플 때 읊조리는 고백은 앙상한 나뭇가지를 뒤흔드는 바람과도 같다. 여전하지 못한 겨울에 찬 눈을 뒤집어쓴다.

당신은 어렵지 않은 말로 종종 나를 구한다. 충동과 격정과 우울로부터 떼어놓는 일이 당신의 직업인 것처럼. 궁금하지 않은 질문과 장황한 설명과 유구한 나태를 견디는 이유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조용해야 할 때 조용할 줄 아는 것. 간결한 우리의 관계에 아직 찍지 않은 마침표는 눈의 결정을 닮았다.

함께했던 그 어떤 계절보다 길었던 우리의 겨울. 혹독하고 아름다웠지 자조하는 바랜 입술에 입을 맞춘다. 눈폭풍이 흩날리던 대관령과 꼬질한 양 떼들. 눈 뭉치를 쥘 때 아려오던 뜨끈하고 가려운 손의 감각. 타락한 소음들을 하얗게 표백한 시라카와고의 고요. 깨질 것처럼 푸른 프라하의 냄새. 모두 다 포르말린을 잔뜩 부어 박제한 기억들이다. 그것들을 깨 먹으며 우리는 이 겨울을 난다. 칭칭 얽힌 두 손으로 핑계 같은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같은 방향으로 걷는다. 사랑이다. 적당히 식혀서 호호 불어먹는다. 빠듯한 설레임이 없어도 영원한 겨울이어도 괜찮은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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