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면 생각 나는 그 사람.
비가 올 걸 예견한 것이든 그 사람이 생각날 것을 예견한 것이든 어떤 의미에서건 간밤에는 예지몽을 꾼 거야. 평소에는 둔하고 눈치도 없는 주제에 꿈에는 기민하게 반응하고야 마는 거지. 비 오기 전 날씨처럼 채도가 낮은 꿈을 꾼 날에는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아프거나 아무튼 아팠어. 침대 밑의 먼지들처럼 깊숙이 가라앉아 있다가 말캉하고 허약해진 마음의 벌어진 틈으로 침투한 바이러스성 잿빛 꿈. 아침의 흐릿한 의식 안에 그냥 묻어버리면 될 것을 기어코 끄집어내서 여지껏 전전긍긍하는 쓰잘데 없는 기억력이 문제야. 문제.
비가 올 때마다 그 사람이 생각날 리도 없고 비가 오지 않는다고 그 사람이 생각나지 않을 리도 없는데 어느 날엔가 내게 온 마지막 호의를 빌미로 교신을 시도했지. 그리고 실패했어.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텅 비어 있는 저 편의 공허한 울림 덕분에 마음은 편해졌지. 닿을 수 없는 완벽한 평행우주. 서로에게 그어져 있던 선은 흐려지고 우리는 모호한 좌표가 되었어. 좌로 우로 시간 속으로 부풀어가면서 좌표는 결국 지도에서 사라졌거든. 그 것이 우리의 최후였지. 서로의 실종이 사건이었다 사고였다 해프닝이었다 그저 그런 일상으로 침전되는 순간들. 꿈이 아니면 흔들어지지도 않는 부유의 찰나.
이 모든 것이 꿈탓이다, 비 탓이다, 노래탓이다. 모든 '탓'의 기원 결국 내'탓'으로 귀결되고 만다는 것을 이제는 알지. '후회'는 해도 '반복'은 하지 말자. 꿈은 꿈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