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하는 종말이 아니라 잠식하는 멸망을 본다. 낙하하는 인공의 빗물. 빈 욕조에 맨몸을 싣자 비로소 징후가 시작되었다. 발 밑으로 떨어지는 시커먼 피로. 투명한 독. 상실의 파편들이 튀어올라 종아리께를 적신다. 무겁다. 노동의 무게는 이처럼 달고 꾸덕하다. 샤워하기 전 입에 넣은 초콜릿과 같은. 초콜릿은 색과 향이 강해서 독을 숨기기에도 피곤을 묻어버리기에도 알맞은 맛이다. 야밤에 초콜릿을 먹으면 혼나지 않아도 혼나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수채 구멍 사이로 사라지는 어제. 억지로 봉합할 수 없는 것은 흘러간 시간이라는 것을 무시로 확인한다. 입맛을 다신다. 미련이 자꾸만 이에 들러붙는다. 사랑니를 뺀 자리가 비어있다. 낯선 구덩이를 혀로 자꾸만 되짚어 본다. 마지못해 허하다. 이지러진 달에도 흐트러진 파도에도 너부러진 미역줄기 같은 것에도 성가시게 상관하면서 사랑니에는 일절 관여하지 못했다. 뽑아내고 없어져야 유지되는 관계들이 있다. 사라지고 나서야 자주 상기되는 것. 귀찮아서 이내 그리워지는 것. 일상과 항상이 부딪히면 별들이 태어난다. 해야 할 일들을 가만히 복기하는 밤이었다. 궤도를 이탈해 본 적 없는 무국적 위성의 주인을 찾아주기로 마음먹는다. 강원도에는 3월에 폭설이 왔다고 하는데 거기도 몹시 추웠으면 했다. 명왕성의 이름을 몰래 걸쳐 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