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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빗ORBIT Apr 18. 2020

폐허의 고리

토성의 고리는 적도 둘레를 원형궤도에 따라 공전하는 얼음결정과, 짐작건대 유성체의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아마도 과거에는 토성의 달이었던 것이 행성에 너무 가까이 위치하여 그 기조력으로 파괴된 결과 남게 된 파편들인 것으로 짐작된다. 

-브로크하우스 백과사전


고민 없는 공간에서 일회용처럼 뒹굴고 싶다. 쉬는 날을 아흐레 굶주린 들개마냥 해치우고서. 일주일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오늘을 살라먹는 궁색한 얼굴. 점잖은 어른의 가면을 씌운다. 세상은 어른을 야단치지 않는다. 잘못했으면 잘못한 데로 둔다. 그래서 더 애를 쓰고 심혈을 기울이고 눈치를 본다. 닳았다. 그동안 마모된 것이 비단 관절뿐일까. 다시 죽었다 깨어난다 해도 지금은 근무의 시간을 이탈하기로 한다. 오늘은 아무도 관여해서는 안 되는 나의 쉬는 날이다. 하수도 배관을 따라 늙은 혈관처럼 악취가 돈다. 일터의 가장 낮은 곳, 오늘 생성한 싱싱한 오물들이 배출되는 자리. 그 오욕의 하류에 엎드려 가만히 뺨을 댄다. 나는 항상 이 보다 낮은 곳에 있어. 꿈을 상쇄하고 내일 부식시킨 대가로 나는 나를 적당히 잃었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패기만으로 덤볐던 어른의 상류는 맑았던가. 막다른 자리에 바다가 고인다. 실로 바다는 거대한 하치장으로 전락한 지 오래. 문득 깨닫는다. 가면을 벗어도 어른의 몰골이다. 너는 노동의 본성보다 휴식의 기근이 어른을 천박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어른'의 이름은 책임의 굴레로 개개인을 폐기하고 얻은 허울 좋은 훈장이라는 사실도. 의롭고 아름다운 일이다.

삶은 자잘한 동심원들의 집합이다. 꿈과 좌절, 환희와 실패, 희생과 이기. 그리고 일과 쉼. 그 하찮은 파동을 닮아서 토성의 고리는 둥글다. 완벽한 어른이라는 이상의 별 근처로 너무 낮게 돌다 파괴되어 버린 폐허의 누군가를 연상시킨다. 원래는 달, 혜성, 유성체의 이름이었을 그 자리에 면면한 개인의 이름은 없다. 토성의 고리. 그냥 그렇게 부른다. 깎이고 파괴된 흔적이 어른 주위를 맴돈다. 멈추지 않고 돌아야 하는 우주의 시스템에 적잖이 마모되었을 고리의 생이 그려진다. 좀 쉬면 안 되나. 완벽한 어른으로 환생하기 위해 오늘은 조금 사라져야겠다. 완벽하지 않다면 다시 태어날 요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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