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절뚝거리며 하루의 낙차를 견딘다. 꼭짓점과 골짜기를 급하게 훑는다. 우울과 불안을 두둔해 주자. 생을 마모시켜 얻는 것이 허상이라면.
2.
두려워 해줘. 너의 우울과 불안을 두둔해 줄테니. 공포가 주는 권위에 눈독을 들인다. 어려워 했으면 좋겠어. 나를. 무리에 섞이지 않을래. 고독을 전공하고 내일을 군림하고 오로지 나를. 오롯이 나를.
3.
다 식은 침상에 꿈을 남겼다. 꿈의 부스러기가 침대 밑을 굴러다니다 발에 채인다. 낙몽의 자욱이 깊다. 떨어진 벚꽃잎이 갓 피어난 목련보다 애잔한 것은 더는
아무 미련이 없기 때문이다. 무수히 그리운 감정만 남아 나뒹군다. 오늘 밤에도 나는 너에게 닿지 못할 것이다.
4.
당신과의 이별이 타살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아는 것을 토대로 사랑을 해부해 본다. 결국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너와 헤어졌을 것이다.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너와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우리는…
5.
분분이 흩어진 꽃잎은 이제 의미가 없는 겁니까. 찬란했던 순간과 분홍의 연약함과 당신 앞에 나리던 꽃비의 유효기간은 끝났습니까. 이제 저는 당신에게 무의미합니까. 이해 할 수 없는 언어의 나열 뒤로 숨바꼭질 하는 당신에게 저는 화를 내야 합니까. 부탁을 해야합니까.
6.
꿈인걸 알면서도 당신에게 계속 사과한다. 최선을 다해 그리고 성실하게 미안하기로 한다. 완전미결한 문장이 되어 구천을 떠돌던 당신은 내 꿈에 미련이 많다. 한 달에 한 두번 당신을 격렬하게 앓고나면 그 달의 나머지 날은 그런데로 살만하다. 그러니 이 것은 증세, 병증, 흔적으로 불리워도 좋다. 어떤 밤은 깨어도 기억이 없는데 꿈, 그 곳에서 잠이들면 지금의 기억 몇 개는 함께 명멸하곤 하는 것이다. 총천연색의 당신을 고이접어 베개 밑에 포갠다. 꿈이라 해도 그저 잠을 청할 뿐 나에겐 별 도리가 없다.
7.
풀벌레 소리에 무화과를 절인다. 생과 사를 버무려 시간으로 간을 보았지하고 아득한 눈이 중얼거린다. 바다에 가깝기로 바다가 그립다. 여름의 회신은 끊기기 직전. 달은 힘을 잃고 일찌감치 고개를 숙였다. 계절은 퇴로가 없다. 힘의 궤도를 따라 당신을 떨구고 갈 걸. 차고 습한 바람이 인다. 자격을 벗어던진 별이 지던 밤에.
8.
기억의 면도날로 손목을 난자하는 하루가 계속되었다. 이러면 안되지 싶어 그 자국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난 시간 편집된 내가 있었다. 사랑을 시작한 날부터 하루라도 당신을 떠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기어코 달아나 이제 너를 잊은 날이 없다
9.
인간을 화장하고 난 자리에 남는 것은 담배 한 개비 피울 정도의 성냥갑 속 인과 대못 무게 만큼의 철이 다였다. 너와 나의 인연이 태워져서 남은 것은 무엇인가. 한 줌의 기억? 멀어진 온기와 삿된 희망 부스러기. 고루한 편지와 문장들. 관계의 사금파리는 고작 그 정도로 빛나고 시간을 할퀴었다. 상처 입은 만큼 사무친다. 그리워서가 아니라 허무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