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나서며 기림이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하늘을 향해 늘어나도록 두 팔을 쭉 뻗고 기지개를 켰다. 뺨을 감싸는 따뜻한 봄바람과 눈이 부신 햇살이 이리도 포근한지 여태 몰랐던 것처럼 새롭게 느껴졌다. 땅에서 올라오는 푸근하고도 쌉쌀한 흙냄새가 상쾌하게 느껴진다. 깨질 것처럼 아프던 머리도 이제는 아무렇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린다. 엄마다. 기림이는 눈을 살짝 찌푸리고 한숨을 쉬고는 전화를 받았다.
“응, 엄마. 이제 학교에서 나왔어.”
“어떡하지? 엄마가 도저히 중간에 나갈 수가 없네. 혼자 병원 갈 수 있겠어?”
걱정 가득한 엄마의 목소리 뒤로 사무실 전화벨 소리가 열심히 울려댄다.
“엄마는 무슨. 내가 초딩인 줄 알아? 병원 정도는 혼자 갈 수 있어.”
“그래, 기림아. 혼자 다녀와야겠다. 일단 니 체크카드로 결제하면 엄마가 돈 보내줄게.”
“알았어. 근데, 엄마...”
말을 하려는데 전화가 뚝 끊긴다. 엄마도 어지간히 바쁜가 보다 생각하며 기림이는 다시 엄마에게 전화하려고 잠시 망설이며 들고 있던 휴대폰을 그냥 주머니에 다시 넣어버렸다. 학교에서 나오니 아팠던 머리가 너무나 깨끗하고 시원하다. 병원에 가서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학교로 다시 돌아가기는 너무 싫었다.
‘그냥 집에 가서 문자나 보내지 뭐.’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기분이 좋아진다. 머리가 맑아진다. 오전부터 이런 여유를 누리며 느긋하게 집을 향해 걷고 있으니 주변의 건물이나 사람들이 다 즐겁고 활기차게 보인다.
‘어, 저기 분식집 사장님은 벌써부터 나와서 준비를 하는구나.’
일주일에 세 번은 들르는 학교 앞 분식집을 지나가며 사각형으로 된 철판 냄비에 데워지고 있는 빨간 국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침이 넘어간다. 긴 머리를 돌돌 말아 틀어 올려 야무지게 묶은 분식집 사장님은 손님이 없는 이 시간에도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열심히 전화통화를 하며 냉장고에서 열심히 재료들을 꺼내고 있었다.
‘재료를 다듬는 중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한 기림이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음식을 사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집에 가면 냄비에 물부터 올려 라면 두 개에 밥까지 말아먹어야겠다 생각하니 다시 즐거운 발걸음이 더 빨라진다. 모퉁이를 돌아 아까부터 들리던 새소리의 시작을 찾는다. 저 초록 잎 가득한 나무 어디에 저렇게 예쁜 소리를 내는 새가 앉아 있는 걸까 생각하다 눈이 한 곳에 멈췄다.
“어, 저건!”
나무 가지 사이에 누군가 조심스레 올려 둔 까맣고 반짝이는 핸드폰 하나가 눈에 보였다. 기림이는 얼른 가서 그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좀 오래된 기종 같아 보이긴 했지만 깨끗하고 예쁘다. 전원 버튼을 길게 눌러보았다.
“어! 켜진다.”
간단한 신호음과 함께 핸드폰이 켜지면서 화면이 밝아진다. 원래 전원이 켜지면 통신사나 핸드폰 기종이 뜨는데 이 핸드폰은 미래통신이라는 처음 듣는 로고가 뜨는 것이 조금 이상하다 생각하며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배터리는 남아 있네.”
핸드폰은 잠겨 있지도 않았고, 어떤 연락처도, 문자도 사진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위쪽에 ‘사용가능한 SIM 없음’이라는 시스템 안내 문구가 떴다.
“누가 여기다 이런 걸 버렸지?”
기림이는 괜히 크게 혼잣말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아무도 기림이와 핸드폰에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기림이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혹 핸드폰 주인이 이 자리로 돌아오는 건 아닌지 고민했다, 하지만 주위에는 핸드폰을 아는 듯 보이는 사람도 없었고, 찾는 듯 보이는 사람도 없었다.
어차피 유심이 들어있지 않아 누군가가 사용하거나 전화 통화가 가능해 보이진 않았다. 기림이의 입에서 기분 좋은 탄성이 나온다. 이런 운 좋은 일이 생기다니 괜히 신이 난다. 자신의 핸드폰은 부모님의 계정과 연결되어 있어서 어떤 앱을 얼마나 사용하는지 부모님이 아시고 사용 시간에 제한이 있어서 맘껏 쓰지 못하는데 이 폰을 몰래 가지고 있으면서 와이파이를 연결해 방에서 부모님 몰래 게임을 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안 되면 마트에 있는 중고 휴대폰 판매 기계에 넣으면 친구들과 간식 한 번 사 먹을 돈은 되지 싶었다. 누가 잃어버린 폰이라기엔 많이 낡았고, 기기 안에 어떤 정보도 없으니 자신이 가져도 괜찮을 거라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집으로 빠른 걸음을 옮겼다.
집에 도착해서 냄비에 물을 끓이면서 식탁에 앉아 엄마에게 문자를 했다.
‘엄마, 나 이제 하나도 안 아파. 피곤해서 그랬나 봐. 병원에 안 가도 집에서 쉬면 완전히 나을 것 같아서 그냥 집에 왔어.’
진심으로 스스로도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학교에 등교한 순간부터 깨질 듯이 아프고, 보건실에 가 진통제를 타 먹었음에도 변함없이 왼쪽 머리 한 구석을 두드리는듯한 통증이 학교를 나오자마자 깨끗하고 사라지고 없었다.
‘스트레스 때문인가? 그다지 스트레스를 받을 일도 없었는데.’
기림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싱크대 아래쪽에서 라면을 꺼냈다. 물이 끓고 라면이 다 익을 때까지 식탁 위의 핸드폰 눈치를 열심히 봤지만 아무 대답이 없다. 이럴 때는 핸드폰 문자를 확인할 여유조차 없는 엄마에게 감사하다 생각하며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느긋하게 식탁에 앉아 라면 두 개에 밥까지 먹고 나니 가슴속까지 꽉 찬 느낌이다. 어느새 코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다.
‘엄마가 봤다면 당장 씻으라고 했겠지만, 나는 지금 그저 뒹굴거리고 싶단 말이지.’
기림이는 혼잣말을 하며 그릇을 정리해 싱크대에 가져다 놓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학교에 있을 때라면 이 시간쯤 졸음과 열심히 싸우고 있었을 텐데 집에 와 누우니 여유로움과 행복감이 넘쳐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
“아! 맞다.”
침대에서 일어나 외투 주머니에서 아까 주운 핸드폰을 꺼냈다. 책상에 앉아 와이파이 비밀번호부터 확인했다.
“어? 왜 이러지?”
이상한 핸드폰이다. 위에서 아무리 스크롤을 내려도 와이파이 연결이 나타나지 않는다. 설정으로 들어가 확인해도 연결하는 메뉴가 없다. 그저 음량 크기 조절만 있을 뿐이다. 기림이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우리나라 기계가 아닌가?”
그러고 보니 많이 이상하다. 흔히 보던 제조회사 로고도 없고 아까 켤 때 분명 처음 보는 통신회사 이름이 뜨는 것을 본 기억도 난다.
“에잇, 모르겠다.”
한참을 이리저리 살피다 핸드폰을 책상 제일 아래 칸 서랍 깊숙이 넣었다.
‘게임 어플 같은 것도 깔 수 없고 와이파이 연결도 안 되는 그런 폰인가? 어린아이들이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쓰시는? 에잇, 좋다 말았네.’
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에 누웠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쓸모가 없으니까 버려졌구나 생각이 든다. 천장을 가만히 보는 눈에 힘이 풀렸다. 졸리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누우니 포근한 이불이 몸을 감싸는 듯 기분이 좋다. 기림이는 그대로 누워 한참을 잤다.
드르르륵
진동 소리에 눈을 떴다. 전화기를 들어 누구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통화 슬라이드를 밀어 전화를 받았다.
“기림아.”
“어, 엄마?”
“너 목소리가 왜 그래? 아직도 많이 아파?”
“아, 자다가 받아서 그래. 괜찮아.”
“정말 괜찮은 거 맞아? 그러게 병원에 가 보라니까.”
“푹 잤으니까 괜찮아질 거야.”
“그래? 엄마가 문자를 늦게 봤어. 어쨌든 엄마 지금 퇴근하니까 조금만 기다려. 얼른 가서 맛있게 저녁 차려 줄게. 오늘 학원은 쉬자, 엄마가 전화해 놓을게.”
“네, 엄마.”
괜히 힘이 없는 척 대답하면서도 신나는 마음을 누를 수가 없어 기림이의 입 끝에 웃음이 번진다. 전화를 끊고 잠시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또 핸드폰 진동벨이 울린다.
침대 위에 놓인 자신의 핸드폰을 집어 들어 화면을 본다.
“어! 아니네.”
잠시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멍하니 있다가 아차 하는 생각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아까 주운 핸드폰에서 나는 소리다.
갑자기 무서워진다. 온갖 생각이 짧은 시간 머리를 휘젓고 지나간다.
‘누가 버린 공폰이 아니었나? 유심도 없는 핸드폰이 울리다니? 주인이면 뭐라고 말하지? 아니야, 유심이 없으니 주인이 아닐 거야. 그냥 설정해 둔 알람일 수도 있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책상으로 갈 마음이 조금은 생겼다. 천천히 책상으로 다가가 서랍을 열고 화면을 확인해 보았다.
‘헉’
기림이는 너무 놀라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발신 표시 제한
전화가 오는 것이 맞았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귓가에서 느껴질 만큼 크게 울린다. 기림이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일단 받자. 받아서 주인이면 돌려주면 되는 거지 뭐.’
그리 생각하니 전화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핸드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상대 쪽에서는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기림이는 큰 소리로 다시 한번 물었다.
“핸드폰 주인이세요?”
“혹시 그 핸드폰 주운 건가요?”
떨리는 목소리의 남자가 도로 물었다.
“네. 오늘 길에서 주웠어요. 어떻게 돌려드리면 될까요?”
“휴...”
남자의 긴 한숨이 왠지 불안하게 느껴진다.
“저기, 어떻게 돌려드릴까요?”
“혹시, 학생?”
“네, 학생이요.”
“명현고 학생이겠구나.”
“아, 네.”
남자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아니 씁쓸하게 느껴진다.
“핸드폰을 다시 돌려줄 필요는 없어. 그 핸드폰은 이제 나한테 쓸모가 없어졌거든.”
“네?”
기림이의 눈이 동그래진다.
“나는 그 핸드폰을 잘 사용하지 못했어. 아마 내 앞의 사람도 그랬겠지. 그 핸드폰을 주운 이상 네가 스스로 포기할 때까지 그 핸드폰의 주인은 너야. 나보다는 조금 현명한 사람이 주인이 됐으면 했는데, 어쩌겠니? 그것 또한 내가 어쩔 수 없는 너의 운명인 것을.”
기림이는 남자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뭔가 오싹하고 두려운 생각에 마음이 다급해진다. 그런 마음을 알아차린 듯 핸드폰에서 방전되기 전 나는 띠링 울림소리가 들린다.
“아뇨, 저 이거 필요 없어요. 도로 갖다 놓을게요.” 기림이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 남자는 마지막 이야기를 했다.
“저녁 11시에 울리는 전화를 받으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거야. 너의 파트너가 누구인지. 헛수고를 하게 될까 봐 미리 말하는데 파트너 이외의 사람에게는 진실을 알릴 수 없어. 제발 너에게는 그 핸드폰이 저주가 아니기를 바란다.”
삐 소리와 함께 핸드폰이 꺼진다. 충전기를 연결하려 했지만 핸드폰 어디에도 충전 단자가 보이지 않았다. 모르는 남자의 전화를 받고 나니 뭔가 더 찝찝했다. 게다가 아까 남자는 분명 저주라는 말을 했었다. 가만히 핸드폰을 보던 기림이는 핸드폰을 다시 책상 서랍 안쪽에 넣었다.
‘돌려줄 필요가 없다고 했으니 그냥 주말에 마트에 가면 중고폰 사는 기계에 넣어서 팔아야겠다. 쓸 것도 아니니까 이렇게 전원이 꺼진 상태로 두는 것이 좋겠지.’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밖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내가 얼마나 잔 거지?’
황금 같은 쉬는 시간을 잠을 자느라 다 날려 버렸다니, 뭔가가 아쉽다. 그래도 이렇게 여유 있게 푹 잤다는 사실에 뭔가 모르게 체력을 저장해 놓는 것 같은 기분이라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밖에서 현관 비밀 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 왔어?”
반가운 마음에 거실로 뛰쳐나갔다. 엄마가 들어오고, 아빠도 같이 들어왔다.
“아빠!”
얼마 만에 보는 아빠 얼굴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중학교 다닐 때까지는 주말이면 공원에 가 같이 농구도 하고 야구도 하고 했었는데 기림이가 고등학생이 된 뒤로는 아침 일찍 출근하시는 아빠와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 한집에 살면서도 제대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이 녀석 아프다더니 쌩쌩하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빠의 얼굴은 반가움의 미소로 가득하다. 둘은 늘 그래왔듯이 오른손을 한번 부딪히고 가볍게 어깨를 맞대는 인사를 했다.
“아야야!”
아빠가 괜히 어깨를 손으로 잡으며 엄살을 부린다.
“칫. 맨날 그래.”
기림이가 살짝 눈을 흘겼다.
“이 녀석 이제 너무 커서 부딪히면 막 아프고 그러네.”
아빠의 눈에 웃음이 가득하다.
“얼른 손 씻고 와서 반찬 좀 꺼내. 우리 기림이랑 오랜만에 저녁 먹는데 나 할 거 많아.”
엄마가 주방으로 들어가며 큰 소리로 아빠를 부른다.
“아, 알았어. 얼른 갈게.”
아빠가 기림이에게 눈을 찡긋하고 방으로 들어간다. 기림이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기림이는 그날 저녁 잠시 이상한 핸드폰은 잊고 부모님과 여유 있는 저녁 시간을 보냈다.
컨디션도 좋지 않으니 일찍 쉬라는 부모님의 성화에 자리에 누워서도 기림이는 한참을 뒤척였다. 낮에 너무 많이 잔 탓인지 자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정신이 더 맑아지는 것 같았다. 자리에서 돌아누우며 탁자 위의 시계를 봤다. 10시 57분이었다.
“이제 열 한시네.”
자신이 한 말에 기림이는 깜짝 놀라 일어났다.
‘아까 분명 저녁 11시에 전화가 온댔는데...’
꿈인 것도 같고 현실인 것도 같은 몽롱한 기억에 책상 스탠드 불을 켜고 의자에 앉아 서랍에서 낡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어!”
기림이는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아까 분명 꺼져버렸던 핸드폰이 켜져 있었다. 시간은 10시 58분. 기림이의 심장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정말 11시에 전화가 올까? 누군가 장난치는 걸 수도 있어. 그나저나 내가 핸드폰을 훔친 거라고 하면 어쩌지? 아! 이제부터 녹음을 해야겠다.’
기림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옆에서 충전되고 있던 자신의 폰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자신 방 문을 조용히 잠갔다. 부모님도 주무시러 들어가셔서 갑자기 들어올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핸드폰을 주워 온 걸 아시면 꾸중을 들을 것 같아 알리기 싫었다.
달칵
조용한 집 안에서 울리는 문이 잠기는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흠칫한다. 자신의 핸드폰에서 녹음 기능을 켜고 녹음 버튼을 누르면 바로 녹음이 시작되도록 설정해 놓고 시간만 쳐다보고 있었다.
“앗”
기림이가 몸을 움찔한다. 등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다. 시간이 10시 59분에서 11시로 바뀌자마자 낡은 핸드폰의 진동이 시작됐다.
발신 표시 제한
기림이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는 녹음 버튼을 누른 뒤 통화 버튼을 눌러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한기림 핸드폰이죠?”
분명히 아는 여자 아이 목소리다. 그래도 긴장한 탓인지 누구인지는 바로 알 수 없었다.
“한기림 맞는데 혹시 누구세요?”
“무슨 소리야? 네가 전화하라고 해 놓고는. 나 오세진.”
약간은 토라진 듯한 말투가 뾰족하다.
“세진이?”
반가운 마음에 기림이는 자신도 모르게 세진이의 이름을 크게 부르고는 얼른 자신의 입을 막았다. 세진이는 작년, 그러니까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였다. 모범생에다 단정한 외모라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아이였다. 사실, 기림이도 다른 남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세진이에게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처럼 먼저 사귀자고 고백하거나 자신의 마음을 알릴 용기는 없었다. 아니, 세진이 앞에 서면 부끄러워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서 오히려 피해 다녔다. 그렇게 학년이 바뀌고 다른 반이 되어 이제 더 이상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한 세진이에게 전화가 온 것이다.
“뭐야? 너! 전화하라 그래놓고 누구냐 물으니. 좀 황당하다. 내 번호 지운 거야?”
“아니, 니 번호를 왜 지워?”
거기까지 말하던 기림이가 다급히 핸드폰을 다른 손으로 바꿔 쥐며 세진이에게 되물었다.
“내가 너한테 전화하라고 했다고?”
“응. 오늘 점심시간에. 급식실에서 분명히 나한테 오늘 밤 11시에 중요하게 할 말이 있으니 전화해 달라고 했어.”
“점심시간? 급식실? 그럴 리가 없어. 나 오늘 1교시 끝나고 조퇴했는데?”
“너 자다 일어났어? 네가 조퇴한 건 어제야.”
“내가 어제 조퇴를 했다고?”
“응. 어제 머리가 아프다고 일찍 조퇴했다고 들었어.”
기림이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무언가 이상하다. 자신의 핸드폰을 터치해 오늘 날짜를 확인한다. 4월 9일이다.
“세진아.”
“왜?”
“오늘이 며칠이야?”
“오늘? 4월 10일.”
“아닌데. 오늘 4월 9일이야.”
“무슨 소리야? 오늘은 분명 4월 10일이고, 우리 엄마 생신이라서 생일파티까지 했는데. 방금까지도 고구마 케이크를 먹다 방에 들어왔는데. 그리고 지금 핸드폰까지 다시 확인했어. 오늘은 분명 4월 10일이야.”
“뭐?”
너무나 단호한 세진이의 말에 기림이가 황당한 표정으로 있다 아차 싶은 듯 자신이 들고 있는 핸드폰을 한 번 보고는 세진이에게 다시 물었다.
“너 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우리 1학년 때 반 전체 번호 서로 저장하고 조별 채팅도 과제도 했었잖아. 왜 자꾸 이상한 말을 해?”
“내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고?”
“휴”
세진이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네가 나한테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나 좀 기분이 나빠. 중요한 일이 있는 것처럼 전화해 달라고 해서 11시에 맞춰 전화했는데 자꾸 엉뚱한 소리만 하니까.”
“미안해. 세진아. 네가 이상하게 생각할 거란 건 알지만 나도 지금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무슨 소리야?”
“네가 전화를 한 건 내 핸드폰이 아니야. 그리고 내 핸드폰은 분명 4월 9일이고.”
“자꾸 장난칠래? 한기림! 반듯하고 좋은 아이인 줄 알았는데 너 참 고약한 취미가 있구나.”
세진이의 목소리가 차가워진다. 전화기에서 또 방전을 알리는 듯한 띠링 소리가 울린다. 기림이는 통화 시간을 확인했다. 2분 50초.
“미안해. 나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내일 만나서 설명할게. 오늘 전화 고마워.”
기림이가 얼른 말하고 세진이가 무언가 말을 하려는데 전화가 뚝 꺼진다.
딱 3분이다.
기림이는 자리에 멍하니 앉아. 메모지를 꺼냈다.
- 내일에서 오는 전화 -
그렇게 쓰고는 막 다시 줄을 그어 그 글자들을 덮었다.
‘그럴 리가 없어.’
이렇게 생각하고는 다시 낡은 핸드폰을 쳐다봤다.
“참! 내 핸드폰.”
기림이의 핸드폰은 계속 녹음되고 있었다. 기림이는 녹음을 중지하고 저장했다. 그리고 다시 재생시켜 보았다.
“지지지지직”
한참을 들어도 지직 거리는 기계음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음량을 높여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대고 흔들어 보며 별 짓을 다 해 보아도 아무 소리도 녹음되어 있지 않았다. 기림이는 핸드폰을 가만히 침대 옆에 다시 갖다 놓고 자리에 앉았다. 연필을 들고 메모지 위에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 내일에서 오는 전화 -
① 저녁 11시에 걸림 (전 주인 정보)
② 세진이 ( 파트너?)
③ 3분 동안 통화 가능 (확인했음)
④ 녹음 안 됨 (확인했음)
⑤ 세진이와 통화만 가능한가?
⑥ 이걸로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⑦ 이전 주인
⑧ 저주? 나의 운명?
내일에서 오는 전화가 현실이라는 생각에 기림이는 아직 기분이 얼떨떨했다. 그래도 머릿속 복잡한 생각들은 어디라도 써 놓아야 정리가 될 것 같았다. 일단 내일은 학교에 가서 세진이를 만나야 한다, 세진이를 만나면 무언가 더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두근거리고 심란하던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는 것 같았다. 메모지를 곱게 챙겨 노트 사이에 끼워 넣었다. 머리가 복잡해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자리에 누웠다. 그렇게 한참을 뒤척이다 어느 순간 깊은 잠에 빠졌다.
“기림아! 일어나! 늦겠다.”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시계를 보았다. 6시 반이다. 책상 서랍에서 낡은 핸드폰을 꺼냈다. 통화 버튼을 눌러보았지만 유심이 들어있지 않아 긴급통화만 가능하다는 메시지만 뜰 뿐이었다. 통화목록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기림이는 가방 안에 핸드폰을 넣고 학교 갈 준비를 했다.
학교에 가서도 신경은 온통 핸드폰뿐이었다.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잠시 세진이와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 일 없는 듯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기림이가 어색한 듯 세진이는 눈을 한번 깜빡이더니 고개만 까닥 인사하고 스쳐 지나가 버렸다. 기림이는 그런 세진이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을 뿐이었다. 드디어 점심시간이 되었다. 점심 식사는 포기하고 그 이상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채 급식실 앞에 서서 세진이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재원이나 윤후 같은 친한 친구들이 밥을 안 먹고 여기 왜 서 있냐고 귀찮게 물어댔지만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여자 아이들은 왜 저렇게 밥을 오래 먹는 거야?’
점심시간 50분 중 30분이 지나도록 세진이는 급식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답답하고 불안해서 급식실 안으로 들어가 찾아보려는 순간, 세진이가 단짝 예영이와 팔짱을 끼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깔깔거리며 나왔다.
“저기...”
기림이가 부르자 여자 아이 둘이 동시에 쳐다본다. 기림이는 목을 한번 가다듬고는 세진이를 보며 말했다.
“할 말이 있는데 잠시만 시간 내 줄래?”
“나?”
세진이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응. 세진이 너.”
기림이의 부드럽지만 단호한 말투에 눈을 동그랗게 뜨던 예영이가 다 알겠다는 듯 피식 웃더니 세진이의 등을 살짝 툭 치더니
“잘해봐.”
말하고는 운동장 쪽으로 뛰어나간다.
“아니, 뭘?”
세진이가 당황한 듯 예영이의 등 뒤에 대고 소리치지만 이미 예영이는 저만큼 달려 나가고 없다. 세진이는 한숨을 한 번 푹 내쉰 다음 기림이 앞에 서서 눈을 가늘게 내려 무슨 일인지 안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 이 아이는 지금 이 상황을 내가 고백하려는 상황으로 알 수도 있겠구나.’라는 느낌이 들어 기림이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게 아니야!”라고 말해버렸다.
“그래. 그런 건 아닌 거 같았어.” 세진이의 말에 기림이가 놀란 눈으로 세진이를 쳐다봤다.
“네가 평소에 나한테 관심 있어 보이진 않았거든.”
“그런 건 아니고...”
“뭐야? 그럼 관심은 있었단 말이네.”
세진이의 눈이 반달처럼 웃고 있었다.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다. 너무나 당돌하고 여유 있는 세진이의 말에 기림이는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네가 쉽게 믿지 못할 거라는 건 알지만...”
여기까지 말하고 주위를 둘러보는 기림이를 세진이가 피식 웃으며 본다.
“뭐? 사람 없는 곳으로 가야 하는 거야?”
“응.”
“응?”
기림이의 대답에 이번엔 세진이가 놀란 눈이 된다.
“많이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라서...”
“비밀스러운 이야기라...”
잠시 생각하던 세진이가 기림이의 소매를 잡아당긴다.
“그냥 운동장을 걷자. 다른 아이들이 많아서 차라리 자연스럽고 시끄러워. 우리 대화는 안 들릴 거야.”
기림이는 운동장에 나가 걷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급식시간이 끝나면 그냥 교실로 들어와 과제를 하거나 음악을 듣곤 했었다. 그러다 가끔 창밖을 내다보면 운동장을 걷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그 아이들은 뭔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 방향으로 목적도 이유도 없이 둘, 셋씩 모여 걷고 있었다. 기림이는 하염없이 운동장을 돌고 있는 저 아이들이 회전 초밥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른들이 정해놓은 틀에 맞춰 누군가에게 선택받을 그날을 기다리며 그저 열심히 돌고 있는 접시에 담긴 초밥들. 매일 같은 일상의 반복을 운동장에서조차 하기 싫다고 생각하곤 했었다. 하지만 세진이는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기림이의 팔을 끌고 나갔고, 어느새 둘은 다른 회전 초밥들처럼 운동장을 둘러 걷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세진이의 물음에 기림이가 어렵게 입을 연다.
“나 사실은 어제 낡은 핸드폰 하나를 주웠거든. 그런데 어젯밤 11시에 너한테서 전화가 왔어.”
“내가? 너한테?”
세진이가 집게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낡은 핸드폰으로.”
기림이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세진이에게 보여 주었다. 세진이가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한 표정으로 기림이를 쳐다봤다.
“난 너한테 전화한 적이 없는데? 혹시 착각한 거 아니야?”
“응. 알아. 적어도 어제의 너는 나에게 전화하지 않았어.”
기림이의 대답에 세진이가 멈춰 서서 눈을 깜빡거린다.
“무슨 말이야? 어제의 나라니?”
“이 핸드폰으로 어제 나에게 걸려온 전화는 오늘의 너였거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황금 같은 점심시간에. 이런 소리하려고 나 불러낸 거야? 좀 짜증이 나려고 해.”
세진이는 기림이를 흘겨보고는 걸음을 빨리해 저만큼 멀리 걸어 나아갔다. 기림이는 뭐라고 해야 믿을지 몰라서 잠시 자리에 멈춰 멍하니 세진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20미터쯤 걸어가던 세진이가 잠시 멈추더니 뒤돌아 기림이를 쳐다본다. 그러고는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기림이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온다.
“세진아!”
“적어도 내가 아는 너는 실없는 헛소리를 할 사람은 아니야. 뭔가 이유가 있겠지. 계속해봐. 일단 니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볼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 믿을지 나도 잘 모르겠어. 그리고 사실은 어제 통화한 그 사람이 네가 맞는지도 잘 모르겠어. 이젠... 내가 겪은 일이 나도 믿을 수 없으니까...”
기림이가 한숨을 쉬며 괴로워하자 세진이도 함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좋아. 그럼 어제 너에게 나라고 하며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부터 알아봐야겠네. 그 사람이 뭐라고 했어?”
뭐라고 했더라? 기림이는 기억을 더듬었다.
“서로 날짜를 가지고 다투고, 나에게 화를 내고... 아! 오늘이 엄마 생신이라고 했어.”
“뭐?”
세진이의 눈이 커진다.
“엄마 생신이고, 고구마 케이크를 먹었고 그것 말고는 다른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어.”
기림이는 이렇게 말하고는 세진이의 반응을 살핀다. 세진이는 소름이 돋는 것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자신의 손으로 입을 막았다.
“말도 안 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세진이의 두 눈이 기림이의 눈과 마주친다.
“오늘 우리 엄마 생신이 맞아. 게다가 엄마가 좋아하시는 메리버스데이 베이커리 고구마 케이크를 한 달 전에 예약했고, 오늘 수업이 끝나면 그 케이크를 찾아서 집에 갈 계획이었어.”
“그 얘기를 누구한테 한 적은 없어?”
“아! 예영이. 근데 예영이도 우리 엄마 생신만 알지 케이크에 대해서는 몰라. 말한 적 없거든.”
“네가 은연중에 말하고 예영이가 또 누군가에게 말했을지도 모르잖아.”
“아니, 절대 그럴 일이 없어. 너도 아는지 모르겠지만 예영이 부모님이 빵 가게를 운영하셔. 때문에 다른 가게에서 케이크를 주문했다는 얘기를 하는 게 조심스러워서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어.”
“그럼 어제 전화한 게 네가 맞다는 얘기야?”
기림이의 질문에 세진이가 아무 대답을 못 하고 서 있었다.
“그것도 오늘의 너.”
“그 전화 좀 다시 보여줘.”
세진이는 기림이에게서 건네어 받은 핸드폰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뭐야? 유심도 없다잖아. 게다가 충전 단자도 없고, 통화 내역도 찾을 수 없어. 일단 이 핸드폰을 만든 회사가 어딘지 알아보자.”
세진이의 말에 기림이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찾아봤는데 알 수 없었어. 미래 통신이라는 회사인데 그런 핸드폰을 만드는 회사는 있지도 않았고 내가 어제저녁 통화 녹음을 했는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어.”
“그럼 내가 오늘 저녁 너한테 전화를 하지 않으면?”
세진이의 질문에 기림이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 저녁의 전화는 어젯밤에 받았으니 바뀌는 게 없을 거야. 그리고 내일 저녁에 네가 전화를 하지 않는다면 오늘 내가 저녁에 받을 전화가 없는 거겠지.”
“그럼 뭐 해? 전화를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확인할 수가 없는 걸.”
기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왜 하필이면 나였을까? 너에게 전화를 한 게.”
“나도 잘 모르겠어.”
고개를 떨구던 기림이가 다시 고개를 들어 어제 오후에 받은 핸드폰의 전 주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5교시 예비 종이 쳤다. 운동장에 삼삼오오 모여 놀고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교실을 향해 걸어간다.
“이 녀석들! 서둘러 안 들어가니? 종이 쳤는데...”
학교 밖에서 식사를 하고 들어오시던 화학 선생님이 멀리서 크게 소리친다.
“아! 돌콩이다.”
“돌콩?”
“너 저 선생님 별명을 아직 모르는가 보구나. 돌아이 킹콩.”
“돌아이 킹콩?” “처음에 저 선생님 좀 잘생기기도 하고 어깨가 넓어서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았어. 근데 저 어깨만큼 넓지 못한 신경질적인 성격에 팬들이 다 안티로 돌아섰잖아. 그래서 붙은 별명. 어깨는 킹콩인데 성격이 돌아이라고. 그나저나 저 선생님은 지난 학기 내내 병가를 내시더니 어디서 다시 기운 충전이라도 하고 돌아왔나 봐.”
세진이가 괜히 툴툴거린다. 기림이가 피식 웃었다.
“이제 웃네.”
세진이가 기림이 등을 툭 치며 같이 웃었다.
“네가 내 말을 믿어 주니 이제 조금 맘이 편해서...”
“나도 아직 다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래도 니 말이 완전 거짓말이라는 생각은 안 해. 그리고 내일 너한테 전화할 일이 조금은 기대돼서. 그 아저씨 말대로 우리가 파트너라면 무슨 일을 같이하게 된다는 건데 그것도 조금 궁금하고. 나는 요새 인생이 조금 재미없었거든.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안녕!”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세진이는 교실로 뛰어 들어갔다. 기림이는 그대로 멈춰 서서 세진이의 마지막 말을 곱씹고 있었다.
‘나한테 전화를 거는 게 기대된다는 게 무슨 뜻일까?’
혼자 얼굴이 발그래져 있는데 누가 등을 툭 친다.
“이 녀석 봐라. 내가 뒤에서 쫓아오고 있는대도 거북이걸음이야?”
돌콩이었다. 기림이는 잔뜩 긴장해 인사를 꾸벅하고는 자신의 교실로 서둘러 돌아갔다.
‘오늘 밤, 오늘 밤이다. 그 아저씨의 말이 맞다면 나는 오늘 저녁 열한 시에 내일의 세진이가 건 전화를 받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내일이라는 시간보다 세진이라는 사람이 기다려지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시간은 달팽이처럼 느리게 그러나 일정한 속도로 분명히 흘러가고 있었다.
학원을 마치고 집에 오니 열 시 반이었다. 서둘러 씻고, 엄마에게는 공부해야 하니 방해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드린 뒤 열 시 오십 분부터 자리에 앉아 핸드폰이 울리길 기다렸다. 호기심과 설렘, 불안함이 섞인 여러 감정들이 순식간에 기림이의 머릿속을 들락날락거렸다.
드르르륵
정확히 열한 시가 되자 핸드폰이 울린다. 기림이는 서둘러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기림이니?”
기림이의 여보세요 만큼이나 조심스러운 목소리의 답이 돌아왔다.
“응. 나 기림이.”
“지금 이 통화하는 네가 어제의 너란 말이지?”
“지금 네가 4월 11일에 있다면 분명히.”
핸드폰 건너편 속 세진이가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귀를 통해 전달된다. 숨소리 속에 섞인 어떤 설렘과 기대가 자신의 것인지 세진이의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기림이는 했다. 숨을 가다듬은 듯한 세진이가 입을 열었다.
“기림아, 내가 생각을 많이 해 봤거든.”
“내가 통화하는 게 진짜 어제의 너고, 너는 이 통화 내용으로 오늘 낮의 나를 이해시켜야 하는 거잖아.”
“그런 거겠지.”
“그럼 오늘 낮의 내가 믿을만한 이야기를 내가 너한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은 이야기. 비밀스러운 이야기. 근데 널 얼마나 믿어야 할지 모르겠어.”
“괜찮아. 세진아, 하기 어려운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가만히 들어봐!”
세진이가 기림이의 말을 끊는다.
“나는 오늘 2교시에 지난주에 친 수학 1 단원시험 결과를 받았어. 근데 50점도 안 되는 거야. 믿어지니?”
“뭐? 50점도 안된다고?”
기림이는 자신도 모르게 크게 소리쳐놓고는 놀라서 작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미안해. 너무 의외라서...”
전교권 성적의 모범생 세진이가 그토록 낮은 점수를 받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밝은 세진이가 더 이상했다.
“아니야. 네가 놀라는 거 당연한 일인 걸. 나도 내가 그런 성적을 받은 게 놀라워. 근데 한편으로는 우스워. 90점 이하로만 떨어져도 부들부들 떨고 세상이 끝나는 것 같이 느껴졌는데, 진짜 평균에도 한참 못 미치는 성적을 받고 보니 세상이 다시 보인달까.”
세진이의 말을 기림이는 알 것도, 모를 것도 같았다. 그래서 아무런 대답을 못하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나는 그동안 시험 결과에 너무 매달리며 살았던 것 같아. 남들에게 모범생, 공부 잘하는 예쁜 아이로 비치는 그런 겉모습이 너무 중요했던 거지. 근데 내가 행복했나면 그건 아닌 것 같아서. 그래서 지난겨울 방학부터 공부를 아예 안 해봤어. 내가 진짜 행복한 건 언제인지 무엇을 할 때인지 찾아보고 싶었거든. 그런데 우스운 게 뭔 줄 아니? 성적이 46점인 시험지를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가 없었어. 그래서 그 시험지를 조각조각 곱게 찢어 휴지에 돌돌 싸서 여자 화장실에 버렸지. 공부를 놓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는데 결국 내가 놓을 수 없던 건 내 자존심이었던 것 같아.”
“그렇구나...” “어쨌든 내가 얘기할 비밀은 46점 시험지가 아니라 이런 내 흔들림들이야. 이런 이야기를 난 아무한테도 한 적이 없거든.”
여기까지 듣는데 핸드폰에서 또 띠링 소리가 울린다.
“세진아! 내가 이야기 안 한 게 있는데 핸드폰 통화 시간은 최대가 3분이야 곧 핸드폰이 꺼질 거야.”
“아! 그래? 그럼 그냥 끊어져 버리는...”
세진이의 말을 끝으로 통화는 끝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자신의 핸드폰으로 다시 세진이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전화를 받는 세진이는 내일의 세진이가 아닐 거란 생각에 마음을 접었다.
기림이는 가만히 앉아 세진이의 말들을 곱씹어 보았다.
자신이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를 찾고 있는 세진이. 그런 세진이에게 무언가 멋진 조언을 내일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기림이 스스로도 자신이 언제 가장 행복한 지를 모르고 있었다. 기림이도 세진이의 말처럼 자신이 가장 행복한 것은 언제인지를 생각해보다 잠이 들었다.
오늘은 다행히도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마음을 가다듬으며 오늘의 세진이를 이해시킬 말들을 정리해 보았다. 아침을 먹고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고 즐겁다. 어제 통화한 세진이는 분명 자신을 믿는 듯 보였고, 또 무언가 정확하진 않지만 세진이의 비밀을 알게 되어 그 아이와 한 걸음쯤은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아! 올해도 같은 반이었으면 얼마나 좋아?”
“뭐가? 누구랑?”
교문 근처에서 세진이를 생각하며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을 어느새 다가온 재원이가 들었는지 갑자기 헤드락을 하며 캐묻기 시작한다.
“아! 아니야, 아무것도,”
“뭐가 아니야? 어제는 밥도 안 먹고 너 세진이랑 운동장에서 데이트했다는 소문이 다 퍼졌어.”
전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학생이랑 단둘이 운동장을 걸었으니 그런 소문이 날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데이트? 그런 거 아니야.”
기림이가 극구 부인하자 재원이는 목을 감았던 팔을 슬쩍 풀어준다.
“그럼 어제 무슨 일이었는데?”
어느샌가 다가온 윤후가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윤후도 세진이에게 관심이 있었다는 기억이 난다. 기림이는 중학교 때부터 절친이었던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어 잠시 고민했다.
“나도 많이 곤란한 상황인데 다 이야기할 수가 없어. 사귀는 건 절대 아니야. 그냥 어떤 일이 생겨서 의논하는 것 뿐이지.”
“사귀는 건 정말 아니라는 말이지?”
윤후가 다행이라는 얼굴로 되묻는다.
“그래. 네가 세진이랑 엮이면 윤후 저 자식이랑 우리 사이도 이제 끝장이구나 싶어 내가 얼마나 마음 졸였는데...”
재원이자 농담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을 하는데 가슴이 뜨끔하다.
“지금은 그냥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러는 거 뿐이야.”
기림이의 말에 재원이가 윤후를 툭 친다.
“이 자식이 먼저 고백하고 사귀고 그럴 용기가 있겠냐? 아마 너랑 비슷할걸.”
재원이의 말에 윤후가 피식 웃었다.
“나도 뭐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건 아니고...”
“에이....”
이번에는 윤후의 말에 재원이가 웃음을 날린다. 그렇게 날아온 두 친구의 웃음은 왠지 기림이의 마음에는 무거운 돌덩이가 되어 가라앉는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계속 속일 수는 없고 내 말을 믿어 줄까?’
기림이가 고개를 젓는다.
‘일단은 세진이부터 만나고, 재원이랑 윤후는 그 다음이다.’
기림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드디어 점심시간. 오늘은 세진이도 자신을 기다릴 것을 알았기에 급식실에서 서둘러 밥을 먹었다. 미친 듯이 교실로 돌아와 평소에는 잘 안 하던 양치까지 끝내고 운동장에 나가 걷고 있는데 어느새 세진이가 곁에 와 같이 걷는다.
“왔어?”
기림이가 방긋 웃으며 반긴다. 세진이도 같이 웃지만 그 표정이 밝지만은 않다, 기림이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어제도 전화 왔었어? 오늘의 내가?”
기림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진이는 한숨을 푹 쉬었다.
“만약 네 말이 진실이라면 오늘 저녁의 내가 너한테 한 말을 나는 알 것 같아. 나 오늘 오전 내내 그 생각만 했거든.”
세진이의 말을 들으며 기림이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다른 사람의 비밀을 입에 올리는 일은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니 이야기를 듣고 참 많이 생각했어. 나는. 그리고 내린 결론은 니 용기가 대단하다는 거야. 난 그런 시도를 할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근데 나는 당장 내가 행복한 순간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건 10년 뒤가 될 수도 있고 30년 뒤가 될 수도 있으니까.”
여기까지 말하고 기림이는 숨을 한 번 골랐다. 그리고는 세진이를 똑바로 쳐다보며 계속 말했다.
“우리 아빠가 하시는 말씀이 있거든. 행복하게 사는 건 어쩜 그냥 오늘을 열심히 살아내는 게 아닐까라고. 그럼 당장 오늘이 행복하지 않아도 미래에 대한 희망이 생기는 거고 그건 적금 같은 거라서 미래에 대한 희망들이 모여 인생이 행복해지는 거 아닐까. 오늘이 행복하지 않다고 미래에 희망이 없다고 여기면 그건 진짜 불행한 인생이라고 생각해. 나는...”
“오늘을 열심히 살아내는 거.”
기림이의 말을 세진이가 따라 읊는다. 그리고는 기림이를 다시 쳐다본다.
“일단 첫 번째는 오늘을 열심히 살아내야 한다는 니 말을 난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 뭔가 되게 좋은 말인데 오늘을 열심히 살아내야 하는 방법이 꼭 공부일까 하는 생각을 나는 많이 했거든. 내가 오늘을 더 열심히 살아낼 다른 방법이나 이유가 있어야 나는 그 말에 좀 더 울림이 생길 것 같아. 그리고 두 번째는.”
여기까지 말한 세진이는 기림이에게 악수를 청하듯 오른손을 내밀었다. 기림이도 얼떨결에 그 손을 마주 잡고 세진이와 손을 힘차게 흔들며 악수했다.
“두 번째는 네가 어제 통화한 내가 오늘의 내가 분명하다는 거야.”
“이제 내 말을 믿겠어?”
“응. 믿어.”
세진이의 말에 기림이는 다행이라는 듯 활짝 웃었다.
“다행이야. 난 네가 끝까지 날 믿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했거든.”
“물론 몇 가지 테스트를 하긴 했지만, 네가 아니었다면 그런 테스트를 하기도 전에 미친 소리라며 상대도 안 했을 거야. 근데 너니까.”
“나라서?”
기림이가 놀란 눈으로 세진이를 쳐다본다. 세진이가 그런 기림이에게 손을 내저으며 웃으며 대답한다.
“오해하지 마. 너라서 상대했다는 말은 그만큼 네가 믿을만한 아이라는 얘기니까.”
세진이는 여기까지 말하고 기림이를 향해 악수를 청하듯 오른손을 뻗었다. 기림이는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고는 세진이의 손을 잡았다.
“반가워. 파트너.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어떤 일들에서 나를 잘 부탁해.”
자신에게 생긴 일이 어떤 일인지 왜 일어났는지 자세히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무조건 반기는 듯한 세진이가 너무 겁 없어 보여 기림이는 도로 정신이 번쩍 든다.
“넌 괜찮아?”
“뭐가?” “난 조금은 걱정되고, 조금은...”
“조금은 뭐?”
“두렵다고 해야 하나? 암튼 좀 그래.”
기림이의 말에 세진이가 웃는다. 그 환한 웃음이 기림이의 두려운 마음 한 구석을 조금은 밝게 비추는 느낌이 든다. 마음 깊숙한 곳부터 무언가 따뜻하게 밀려온다, 왠지 이 아이와 함께라면 다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다.
“한기림.”
“응.”
“나는 있잖아. 그냥 남들한테 보이는 나 말고 진짜 나는 어떤 모습일까? 내가 가장 행복할 때는 언제인지 너무 알고 싶었어.”
“그래.”
“근데 인생이 너무나 단조롭다고 느끼던 나한테 어떤 선물이 주어진 것 같아. 너와 함께. 이 선물은 숙제 같은 걸 수도 있고 어떤 기회 일수도 있겠지. 근데 나는 진짜 무언가 잘해보고 싶은 욕심이 막 생겨.”
“근데 세진아.”
“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까맣고 동그란 눈동자가 어쩌면 슬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기림이는 조심스럽게 주머니에서 메모지를 꺼내 세진이에게 보여줬다.
“전 주인과 통화를 했을 때 그 사람은 이 통화가 자신에게는 저주라고 했었어. 나는 그래서 조금 걱정이야.”
“그러고 보니 너 글씨체가 정말 엉망이구나. 난 하도 반듯하고 성실한 아이라 글씨도 엄청 예쁠 줄 알았는데 읽는데 너무 힘들었어.”
세진이의 뜻밖의 지적에 기림이 얼굴이 귀까지 빨갛게 물든다. 그런 기림이의 얼굴을 세진이가 보며 웃고 있다.
“아. 이건 그냥 나 혼자 막 흘려 쓴 거라...”
“푸하하. 장난이야, 장난. 너 글씨 예뻐. 아마 내 노트 보면 기절할걸.”
“나 1학년 때 과제 걷느라 네 노트 본 적 있는데 너 글씨도 예뻤어.”
“글씨도?”
빤히 쳐다보며 묻는 세림이의 얼굴에 기림이가 목이 메인 듯 컥컥 거린다. 세림이가 웃음을 멈추고 기림이의 메모를 정리한다.
“그러니까 이 핸드폰은 스스로 포기할 때까지 네가 주인인 거고, 나는 너의 파트너가 되어 매일 밤 11시에 그날의 정보를 3분 간 알려 줘야 하는 거고, 이 사실은 우리 둘 외의 다른 사람에게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거지? 그러니까 녹음도 저절로 지워진 거고.”
“응. 그런 것 같아.”
“일단은 네가 알아낸 사실들 외에 뭐 그다지 궁금한 건 지금은 없어. 다른 것들은 앞으로 알아가면 되니까. 근데 이 핸드폰을 우연히 학교 앞에서 주웠다고 했지?”
“응. 교문을 나가 오른쪽으로 돌면 커다란 나무 있잖아. 그 가지에 끼워져 있었어.”
세진이의 여러 질문에 기림이는 성실하게 대답했다. 어찌 생각하면 탐문이고 귀찮은 질문들이었지만 기림이는 이 시간이 그저 즐겁고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컵라면을 사 먹으러 가자고 꼬드기는 윤후와 재원이를 따돌리고 서둘러 집에 돌아와 앉았다. 이제는 세진이의 전화를 기다리는 일이 기쁘고 설렌다. 공부를 하기 위해 책상에 앉아서도 계속 시간만 확인하고 한숨을 쉬는 기림이었다. 11시가 되자 어김없이 핸드폰의 진동이 시작되었다.
“여보세요?”
“기림아. 나도 고민을 많이 했는데... ”
“고민? 무슨 고민?”
“시간이 많이 없으니까 일단 너한테 오늘의 사건들을 보고할게.”
“오늘의 사건?”
“응. 오늘의 사건. 너에게는 내일이겠지만.”
여기까지 말하고 세진이는 크게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수현대 사거리 알지?”
“응, 알아. 은행도 있고.”
“오늘 오후 8시쯤 거기서 여섯 살짜리 애기랑 그 할머니가 음주운전을 하던 차에 치여.”
“차에 치인다고? 그래서?”
“그 자리에서.”
여기까지 말한 세진이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건 막을 수 있을 거 같아. 내가 내일 여덟 시쯤 거기.”
기림이의 말을 세진이가 막는다.
“그게 다가 아니야. 끝까지 들어 봐. 오후 5시에는 녹민공단의 섬유공장에서 폭발 사고가 나서 작업자 수 십 명이 죽거나 크게 다쳐.”
“수 십 명?”
기림이의 눈이 커진다.
“그리고 오늘 저녁 9시쯤엔 우리 동네 이현 아파트 205동 옥상에서 중학생이 한 명 뛰어내려.”
“그럼 잠깐만, 나는 내일 조퇴를 해서 일단 녹민 공단에 가서 폭발 사고부터 막아볼게. 그리고는 바로 수현대 사거리로 가고...”
기림이가 메모를 보며 횡설수설하는데 세진이가 다정히 부른다.
“기림아. 이 중에서 우리가 막을 수 있는 일은 없어.”
“그게 무슨 소리야? 막을 수 있는 일이 없다니?”
“가서 뭐라고 할 건데? 폭발 사고가 나니 조심하라고? 음주 운전자를 피하라고? 누가 니 말을 믿을 것 같아?”
“그래도 사람이 그렇게 많이 죽는다는데 뭐라도 해 봐야지.”
“나는 오늘 일어난 우리 지역 사건만 너에게 얘기했을 뿐이야. 우리 지역에서, 우리나라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 오늘 하루 동안 얼마나 안타까운 생명들이 많이 죽었는지 아니?”
“네 말은 알겠어. 그래도 우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잖아.”
기림이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커진다.
“나는 지금 이 전화를 너에게 하면서 너무 많은 고민을 했어. 미래를 알려주는 것이 너에게 과연 행복한 일인지를.”
“그게 무슨 소리야?”
“기림아! 우리 포기할 건 포기하고 살자. 모든 일을 내일을 안다는 이유로 우리가 다 해결할 수는 없어.”
세진이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기림이는 그래도 알게 된 내일의 그 죽음들에 가슴이 답답했다.
“우리는 신이 아니야. 영화에 나오는 히어로도 아니고. 우리의 일상, 해야 할 일들을 다 내팽개치고 다른 사람들을 구하러 다닐 수는 없잖아.”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래도 이렇게 알았는데.”
“그래서 내가 너한테 이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 고민을 한 거야. 이제부터 우리 생각을 좀 해야겠어.”
“뻔히 알면서도 다른 사람이 죽는데 그냥 있어야 된다면 미래폰을 가지고 우린 뭘 해야 하는 거지?” “그러니까 가이드라인을 짜자고. 우리가 구해야 할,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해서.”
세진이의 말을 끝으로 통화는 끝났다. 기림이는 허탈한 마음으로 이불 위에 누웠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알아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니.’
미래폰을 가지게 되고 그 특별한 능력을 알게 되었을 때, 기림이는 미래폰을 잘 이용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에잇”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기림이는 노트북을 켰다. ‘윙’하고 울리는 노트북의 진동소리가 음산하게 느껴진다. 인터넷으로 오늘 일어난 사건 사고를 검색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인구 300만의 도시 문현시에서 오늘 하루 일어난 사망 사건만 열 건이 넘었다. 어제 날짜로도 검색했다. 어제는 더 많았다. 다른 도시의 것들도 찾아보던 기림이가 한 숨을 내 쉰다. 매일매일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사고로 죽다니. 뉴스를 들으면서 여태 흘려 들었던 그 모든 사고들에 죄책감이 더해진다.
‘이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견뎌낼 수 있을까? 미래폰이 저주라는 그 아저씨의 말이 정말 맞는 게 아닐까?’
기림이는 불편한 마음으로 한참을 잠들지 못했다.
다음 날, 학교에서 세진이를 만났지만 이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오늘 오전의 세진이는 아직 그런 고민을 가지기 전 일 테니까. 미리 알려주어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지게 하기는 싫었다. 점심시간에 만난 세진이에게는 그냥 뻔한 일상적인 얘기를 하며 내일, 토요일에 길게 만날 약속을 잡았다.
“정말로 가이드라인이라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서.”
그렇게만 말했는데도 세진이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저녁, 최대한 모른 체하고, 찾아보지 않으려 했지만 공장 폭발 사고로 수 십 명이 죽은 일, 음주 사고로 어릴 때 부모님을 잃고 할머니와 둘이 살던 어린 유치원생이 부모님과 같은 이유로 안타깝게 사망한 일은 하루 종일 만나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리고 한 동네에서 몇 번 스친 적도 있던 그 아이가 일 년 넘게 같은 반 아이들의 폭행 속에 괴로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 중학생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기림이는 숨이 막힐 듯한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스스로 냉정해지려 애썼다.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죄를 지은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하지만 답은 알 수 없었다. 기림이는 차분하게 최대한 숨죽여 마음속으로 울며 내일을 기다렸다.
“일찍 나왔네.”
“너도 일찍 왔네.”
세진이의 밝은 표정을 봐도 기림이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세진이는 의자에 가방부터 놓더니 기림이의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았다.
“뭐 마실래?”
“난 어제부터 생각을 많이 했더니 단 게 먹고 싶어. 버블티.”
“난 따뜻한 대추차로 할래.”
기린이가 대추차를 고르자 세진이의 눈이 동그래진다. 기림이가 그 의미를 알고 빙긋 웃었다.
“할아버지 같지?”
“그건 아니고, 친구들 중 대추차 먹는 사람 처음 봤어. 그거 우리 고모 최애 메뉴거든.”
“나는 기관지가 많이 약해. 천식도 있고.”
기림이는 가방에서 기관지 흡입제를 꺼내 흔들었다.
“그렇구나.”
세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가능하면 찬 음료를 안 마셔. 그러다 보니 생강차, 대추차 같은 전통차들만 마시게 되더라고.” “그럼 너 버블티 아직 한 번도 안 먹어봤겠네”
“응. 아직.”
기림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진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세상에. 아직 아가구나, 아가.”
“뭐 아가?”
기림이가 피식 웃는다.
“있잖아, 버블티는 말이야. 처음에는 쌉쌀함과 달콤함이 같이 느껴지거든. 근데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찝찝한 버블들을 여러 고민들과 고통들을 질근질근 씹어 터트리는 마음으로 쫀득쫀득 씹는 거야. 그렇게 씹다 보면 입 안에 향긋한 달콤함이 꽉 차거든. 뭔가 고통의 끝에 느껴지는 행복한 단맛이랄까? 고민을 많이 해 고통스러웠던 사람에게 주어지는 달콤한 선물인 거지.”
버블티에 진심인 듯한 표정과 꿈꾸는 듯한 눈빛으로 진심인 듯 말하는 세진이를 보니 그동안의 고통스러운 고민들이 어느 정도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왠지 자신보다 더 어른스러운 느낌의 세진이에게 의지하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다.
“그럼 나도 오늘은 버블티로 마셔 볼까?”
직원에게 음료를 주문하고 둘은 다른 이야기를 했다. 어제의 통화, 그러니까 기림이에게는 그 보다 전날의 통화 이야기는 한참을 입 밖에 꺼내지도 않았다. 그냥 평범한 일상을 얘기하던 세진이가 카페 직원이 버블티 두 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가자 기다렸다는 듯 가방에서 노트를 하나 꺼냈다.
“뭐야?”
“내가 우리의 업무 가이드라인을 정리해 봤어. 너는 아마도 아직도 많이 혼란스러울 것 같아서.”
“너는 괜찮아?”
“나?”
세진이가 피식 웃었다.
“나도 아직 완전히 괜찮지는 않아. 이건 아마 평생 괜찮아질 수 없을 걸. 너 혹시 그 이야기 알아? 기찻길 딜레마.”
들어본 적이 있었다. 선로 한 개에는 다섯 명이 묶여 있고, 다른 하나의 선로에는 아는 사람 한 명이 묶여 있을 때 선로 조작자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도 알아. 그런데 그게 왜?”
“엄밀히 따지자면 그 딜레마와는 좀 다르긴 한데, 우리가 살릴 누군가를 선택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이 생각해 볼 이야기 같아서. 너라면 누굴 선택할래? 다섯 명? 아는 사람?”
“음...”
아는 사람을 생각하자. 제일 먼저 가족이 떠오른다. 어떻게든 지키고 싶은 세진이. 그리고 자신만큼 소중한 친구들 재원이 윤후... 그들이 떠오르자 답은 정해진다.
“나는 아무래도 아는 사람을 선택할 거 같아. 특히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어.”
“그래. 그건 나라도 그래. 근데 아무리 아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누군가의 죽음을 방치했다는 건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되겠지.”
세진이의 말에 기림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기림아. 이제 선택도, 그에 따른 고민도 다 내가 지고 가 볼게.”
“그게 무슨 말이야?”
놀란 눈의 기림이가 고개를 들어 세진이를 쳐다봤다.
“넌 어차피 내가 알려주지 않으면 내일을 알 수 없으니까 너에게 어디까지 말할지를 내가 정하겠다는 말이야.”
세진이의 슬픈 듯한 눈이 담담하게 깜빡인다.
“그럴 수 없어. 선택의 모든 고통을 너에게만 다 넘겨 버릴 수는 없어.”
기림이가 안타까운 눈으로 세진이에게 외쳤다.
“나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이미 많이 단단해졌거든. 완전히 괜찮은 건 아니지만 너보다는...”
여기까지 말하던 세진이는 피식 웃었다.
“나 의외로 산전수전 겪은 게 많아. 언젠가는 너한테 다 이야기하겠지만. 버블티도 못 먹어본 아가는 상상도 못 할 일들. 그러니까 이 누나한테 어느 정도는 맡겨도 된단다. 이 아가야.”
자신을 아기 취급하는 세진의 말에 기림은 울컥하면서도 자신은 절대 혼자 감당 못할 결정을 하고 있는 세진이의 의연함이 조금은 든든했다.
“네가 말을 안 해주면 나는 알 수가 없겠지. 그런데도 그 선택의 짐이 너에게 너무 무겁지 않을까 걱정이야.”
기림의 진심 어린 걱정에 세진이가 따뜻한 눈빛으로 웃었다.
“그래서 보험 하나를 들어놓는 거야.”
“보험?”
“내가 너에게 말할 일과 말하지 않을 일을 함께 어느 정도 정해 놓으면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나의 고민은 조금 덜어질 거고, 혹시나 모를 너의 원망에 대처할 방패도 될 것 같고 말이지.”
“아냐. 나는 그냥 니 결정에는 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게.”
고개를 세차게 젓는 기림의 말에 세진이는 피식 웃으며 노트를 펼쳐 기림의 앞에 놓았다.
“무조건 날 믿을 일도 아니라니까. 일단 이 노트를 봐.”
기림이는 세진이가 써 온 노트를 차분히 읽어 보았다.
1. 오세진, 한기림의 주변 사람은 시간과 상황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해 구한다.
2.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문현시에서 휴일에 일어나는 사고 중 어린아이와 관련된 사고는
서로 충분히 의논한 후 움직인다.
3.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문현시에서 휴일에 일어나는 사고 중 세 명 이상의 피해자가 발생
하는 사고는 의논하고 관여한다.
4.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사고 중 열 명 이상의 사망자나 중상자가 생기는 경우에는 관련
부서나 기관에 미리 알려 관계기관에서 대처할 수 있도록 한다.
5.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리 큰 사고라도 덮어둔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영웅이
분명 있을 테니까.
6. 이 조항들은 서로의 합의 하에 언제든지 수정 가능하다.
7. 파트너가 된 이상, 서로를 믿는다.
“너, 참 많은 생각을 했구나. 그 짧은 시간에.”
노트를 다 읽은 기림이가 고개를 들어 살짝 웃으며 세진이를 봤다. 이리 정리해 놓으니 그간의 고민들도 뭔가 해결이 된 거 같고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그러니까 네가 정한 규칙대로라면 아는 사람의 일에는 상황과 상관없이 뛰어들어 열심히 구하고, 나머지 일들은 원래 우리의 생활 패턴을 잃지 않는 선에서 매뉴얼 대로 움직이자는 말이지?”
기림의 말에 세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고를 당할 모두를 구하는 건 능력 밖의 일이고, 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양심을 버리는 일 같아서... 그러니 이런 규칙들을 정해두고 우리의 일상은 지켜가며 좋은 일도 해 보자는 말이지.”
“나는 이 말이 마음에 들어. 그들에게는 그들의 영웅이 있다. 뭔가 내가 가진 부담을 덜어주는 말인 거 같아. 왠지 우리 말고도 그들을 도울 누군가가 분명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고.”
“분명 그럴 거야. 이런 기회가 우리에게만 주어진 건 분명 아닐 거야.”
세진이도 고개까지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하나보다는 둘이 낫다더니, 그동안의 고민들도 너와 이야기 하고 나니 훨씬 편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기림이는 진심으로 훨씬 홀가분해진 마음이었다. 그제야 세진이가 입고 온 옷, 세진이의 머리, 활짝 웃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고민이 해결되고 나니 이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둘이 있으니 이런 것이 데이트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세진이의 재잘거리는 이야기들이 귀를 스쳐 지나간다. 마음속에는 묻어둔 말을 어떻게 꺼낼 지에 대한 고민만 가득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눈에 힘을 주고 물었다.
“우리 여기서 나가면 영화 보러 갈래?”
세진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기림이는 요 며칠 간의 지옥에서 벗어나 천국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