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기림이는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사고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고 사람들의 비명이, 앰뷸런스 소리가 귀를 울려댔다.
“너 좋아하는 콩비지 끓였어. 나와서 밥 먹고 또 쉬어.”
엄마가 나가신 뒤에도 기림이는 한참을 자리에 누워 있었다.
‘나 때문에 엉뚱한 사람이 죽었어.’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기림이의 눈이 벌게진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밝은 햇살이 포승줄처럼 자신을 옭아매는 느낌이 들어 소름 돋는다. 기림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우웅
핸드폰 진동 소리에 기림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용을 확인한다.
세진이었다.
“얘들아, 다들 편히 못 잤지? 나도 그래. 그래서 말인데 우리 오늘 좀 볼까? 좀 풀어내지 않으면 우리 한참을 못 잘 거 같아서.”
“그래. 우리 보자.”
세진이의 톡을 확인했는지 윤후에게서도 바로 답톡이 올라왔다.
“어제는 너무 고마웠어. 그런데 기림이가 너무 힘들 것 같아 걱정이야.”
재원이의 톡이다. 기림이는 ‘아니야’라는 글을 찍다가 지웠다. 아닌 것도 아니었고, 괜찮지도 않았다. 이 상태로 친구들을 만나면 자신의 상태를 친구들이 알게 될 것이고, 재원이가 너무 미안해할 것 같아서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못 나가겠다고 말하면 친구들이 더 걱정할 것 같았다. 잠시 생각을 해야 할 것 같아 핸드폰을 내려뒀다.
세수를 하면 정신이 조금은 맑아지겠지 싶어 거실로 나왔다. 현관문이 열리고 아빠가 들어온다.
“어디 다녀오세요?”
“어, 아니.”
기림이가 아는 체 하자 아빠는 뭔가 당황한 눈치였다.
“당신 지금 또 담배 피우고 들어온 거야?”
어느새 엄마가 기림의 뒤에서 아빠에게 화를 버럭 낸다.
“그게 아니고, 바람 좀 쐬러...”
당황하는 아빠에게 엄마가 다가간다.
“바람을 쐬는데 이렇게 담배 냄새가 나?”
엄마의 코가 아빠의 입을 향해 다가간다.
“아! 기림아, 너 재원이랑 만나기로 했어?”
아빠는 얼른 엄마를 피해 말을 돌리려는 듯 기림이에게 엉뚱한 질문을 했다.
“재원이? 왜?” 기림이의 목소리에 힘이 없다.
“방금 들어오는데 파란 모자를 쓴 아이가 입구 벤치에 앉아 있더라고. 아무리 봐도 재원이 같은데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긴가민가 했단 말이지.”
“파란 모자라고?”
“응. 파란 모자.”
파란 모자라면 재원이가 맞을 것이다. 재원이는 중학교 3학년 때 같은 반 여자 아이에게 장난 삼아 그 시기 한참 유행하던 퍼스널 컬러 진단을 받았고 가장 잘 어울린다는 파란색 모자를 그 해 생일 선물로 사 달라고 두 친구를 끈질기게 조른 결과 맘에 드는 모자를 선물로 강탈해 받아갔었다. 그리고 그 뒤 그 남색에 가까운 진한 파란색 모자는 재원이에게 있어 자신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 패션 아이템이자 세 친구의 우정의 상징이 되어, 재원이는 급히 외출할 때 항상 그 모자를 쓰곤 했었다.
항상 밝고 위트 넘치는 재원이가 오전부터 자신의 아파트 앞에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다고 하니 기림이의 마음이 아려왔다. 어제의 사고로 자신이 가진 죄책감만큼이나 큰 미안함을 자신에게 품었을 친구의 마음이 그대로 전달됐다.
기림이는 방으로 돌아가 핸드폰을 들었다.
“그럴까? 나 떡볶이 먹고 싶은데 가능하면 빨리 보자.”
글을 올리기가 무섭게 세진이가 답을 한다.
“언제?”
“지금 바로?” 윤후의 글도 바로 올라온다. 친구들이 다 자신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미치자 기림이는 마음이 조금 따뜻해진다.
“그래. 지금. 우리 아파트 앞에 미키 떡볶이라고 즉석 떡볶이 집이 있는데 맛있어. 나 바로 챙겨서 나갈게. 거기로 올래?”
기림이는 친구들의 답을 기다리며 베란다 쪽으로 나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벤치에 앉아있는 파란 모자를 쓴 재원이가 보였다. 얼굴을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이 슬퍼 보인다. 기림이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선 재원이가 떡볶이 집을 향해 발을 옮기는 것을 보고 나서야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왔다.
“먼저 와 있었네.”
떡볶이 가게에 들어서자 당연히도 재원이가 앉아 있다가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기림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살짝 웃으며 재원이를 마주 보고 앉았다.
“다른 아이들은 조금 기다려야 오겠지?”
재원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기림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집 앞이니까.”
“기림아, 미안해. 나 때문에 네가, 네가...”
재원이가 울먹인다. 기림이는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니 탓이 아니야. 너는 이모님을 구하기 위해 우리랑 함께 한 것뿐이잖아. 다른 사람이 죽는 이런 결과는 알지도 못했고...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
기림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때였다.
“그건 너한테도 적용되는 거 아니야?”
어느새 가게에 들어와 기림이 뒤에 서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진이었다. 세진이를 보자 기림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다. 세진이는 그대로 기림이 옆 의자에 앉아서 밝은 얼굴로 기림이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기림이도 세진이를 가만히 본다. 세진이 얼굴은 항상 밝았다. 목소리는 높고 쾌활했고 아무 걱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진만 기림이는 가끔 세진이의 눈빛이 참 슬프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도 그랬다. 분명 기림이를 위로하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그 눈빛은 누구에게라도 위로받고 싶은 눈빛이었다.
“너는? 너는 괜찮아?”
기림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세진이가 살짝 웃었다. 그 웃음이 슬프다.
“고마워. 나는 괜찮은지 물어 봐줘서. 나도 괜찮지 않아.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다는 건 몇 번을 겪어도 큰 충격이거든.”
‘몇 번을? 사람이 죽는 것을 몇 번이나 봤다고?’
기림이는 깜짝 놀랐다. 항상 밝게 보이는 세진이라 그런 슬픔이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기림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경험이 있는 세진이라 해도 자신처럼 실수로 엉뚱한 사람을 죽음으로 이끈 적은 없었을 테니까. 그런 기림이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세진이는 기림이의 손을 따뜻하게 꼭 잡았다. 그리고는 재원이를 한 번 쳐다보고는 힘차게 말했다.
“이건 재원이가 죄책감을 가져야 할 일이 아니라는 거 기림이 너도 알잖아.”
“맞아. 재원이가 나에게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기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원이가 너에게 미안해하는 건 네가 가진 죄책감 때문이야. 네가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면 재원이가 너에게 미안해할 필요가 하나도 없는 거라고.”
이렇게 말한 세진이는 기림이의 손을 더욱 힘차게 잡았다.
“기림아! 우리 예전에 기차선로의 딜레마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거 기억나?”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젯밤부터 계속 생각했던 이야기니까.
“그 이야기에서 빠진 중요한 사실이 있어.”
“중요한 사실?”
기림이가 고개를 들었다.
“너에게 그런 선택을 하게 한 사람이 진짜 악당이라는 거야. 그리고 선로에 사람들을 묶어 도망가지 못하게 만든 악당. 그런 악당들이 가져야 할 죄책감과 미안함을 왜 네가 가져가려 해? 다섯 명을 선택하든, 한 명을 선택하든 누군가는 죽게 돼 있고 선택한 사람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겠지. 자신이 살린 누군가보다 죽인 누군가의 목숨에 마음 아파하며. 하지만 그 사람을 죽인 건 네가 아니야. 사고 차량 운전자지.”
맞다. 맞는 말이었다. 맞는 말인데도 가슴이 무겁다. 기림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흘렀다.
“그래. 알았으면 됐어. 그래도 한동안은 트라우마로 남아 슬플 거야. 그래도 다행이야. 이 슬픔은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고통이거든.”
세진이가 조용히 말했다. 기림이는 세진이의 말을 다 알 것 같았다. 지금은 슬프지만 이제는 곧 극복하고 말거라 생각했다. 물론, 가끔은 생각나고, 영원히 잊을 수 없겠지만 말이다.
“오! 다들 와 있었네. 내가 꼴찌라는 말이지?”
평소에 과묵한 윤후가 괜히 방정을 떨며 들어온다. 그 마음을 알 것 같아서, 괜히 고마워서 앉아 있던 아이들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짧은 여름 방학이 아쉽게 끝났다. 기림이는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자신의 선택에 누군가 죽었다는 사실은 엄청나게 큰 트라우마로 남았고 쉽게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개학하고 바빠지면 조금은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기림이는 개학을 기다렸다. 그런 기림이를 배려해서인지 아니면 정말로 아무런 사고가 없어서인지 세진이는 방학의 남은 기간 동안 11시에 전화하는 것을 멈췄다. 대신 다른 시각에 둘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자주 통화하며 서로가 얼마나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는 했었다. 둘의 대화는 주로 서로의 일상이나 공부에 관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기림이는 자신에 대한 세진이의 따뜻한 배려가 항상 기분 좋았다.
개학하고 첫날, 점심시간이었다. 식사를 끝내고 급식실에서 나오던 기림이는 재원이, 윤후와 마주쳤다.
“야! 너네들 왜 이렇게 늦게!”
여기까지 말하던 기림이는 두 친구의 표정이 이상해서 입을 다물었다. 재원이는 얼굴을 찡그리며 조용히 하라는 듯 신호를 보냈고, 윤후는 작은 목소리로
“나중에.”
라는 짧은 말만 남긴 채 기림이를 스쳐지나 급식실로 들어갔다. 기림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잠시 자리에 서 있었다. 친구들의 행동이 이상했지만, 이유가 있을 것 같아 따라가서 물을 수가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친구들이 들어온 급식실 입구를 돌아서니 화학 선생님, 돌콩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기림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앞을 지나갔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아까 친구들의 행동 때문에 뭔가 무서웠다. 등골이 서늘해지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돌콩의 앞을 지나는데 그 따가운 눈길이 느껴진다. 뒤통수가 터질 듯이 화끈거린다. 기림이는 그대로 운동장 쪽으로 걸어갔다. 일단 세진이를 만나야 했다. 잘 모르겠지만 두 친구들의 반응으로 봤을 때 세진이와 운동장을 걷는 것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급식실 입구 쪽을 보며 운동장을 걷는데 세진이가 나타났다. 기림이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세진이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표 나지 않게 세진이를 향해 걸었다. 거의 스쳐 지날 만큼 가까워졌을 때 기림이는 세진이에게 속삭였다.
“재원이랑 윤후가 이상해. 돌콩 하고 관련된 것 같아. 나중에 통화하자.”
세진이는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알겠다는 듯 표정을 바꾸고 아무 일 없는 듯 기림이를 스쳐지나 그대로 교실이 있는 건물로 들어가 버렸다. 기림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마음 한쪽에선 호기심과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무슨 일이기에 윤후와 재원이가 아는 척도 하지 않는 걸까?’
궁금해 견딜 수 없었지만, 친구들의 교실로 찾아가 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답답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의 한 시간이 일 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딩동댕
긴 한숨과 함께 학교에서의 일과가 끝났다. 기림이는 주변을 살피며 조심조심 교문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돌콩을 비롯한 다른 선생님들은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 전원을 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톡이 울렸다.
“지난번 그 스터디 카페 4인실. 재원이랑 먼저 와 있어.”
윤후였다. 기림이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는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레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다행히도 들어갈 때까지 뒤를 쫓는 듯한 낌새는 없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자 입구에서 기다렸다는 듯 재원이가 맞이하며 문 밖을 한 번 더 살피고는 문을 잘 닫았다.
“잘 살피면서 왔어?”
“응. 누가 보거나 쫓아오는 느낌은 없었어.”
“휴”
윤후와 재원이는 동시에 큰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야? 세진이는 안 불렀어?”
“응. 안 불렀어. 위험할 것 같기도 하고 일단 우리끼리 먼저 의논할 일 같아서.”
기림이의 질문에 윤후가 대답했다.
“대체 뭔데? 돌콩이 뭐라고 했길래?”
“미래폰을 아냐고 묻더라고.”
재원이의 말에 기림이의 말문이 막혔다.
‘돌콩이 미래폰을 안다고?’
믿을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 미래폰?”
“응. 우리가 미래폰을 쓰는 걸 다 알고 있다고 자신을 도와주면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주겠다고 그렇게 말하던데 우리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더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린데 그냥 모른다고 무시하지 그랬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스스로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기림이도 느껴졌다.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게 그날 명현 병원에서 우리가 한 일을 봤다던데?”
“뭐라고? 우리를 봐?”
“정확히 말하자면 나랑 윤후지.”
재원이는 돌콩과 있었던 일을 기림이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개학한 오늘, 둘은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일찍 등교한 교실에서 아침 자율학습시간을 기다리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누군가를 찾으며 복도를 돌아다니며 교실을 두리번거리던 돌콩과 눈이 마주쳤다고 했다. 돌콩은 둘에게 8월 3일 토요일 오후에 명현병원에 갔었냐고 물었고, 당황한 윤후와 재원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할 이야기가 있으니 학생 상담실로 가자고 했다고 한다. 학생 상담실에서 돌콩은 윤후와 재원이가 바쁘다고 하는 한 임산부를 이상하다 생각될 정도로 반 강제로 병원 안으로 끌어당겨 들어가는 것을 보았고 곧이어 밖에서는 큰 사고가 났다고 했다.
“그 사고가 무슨 상관인데요? 나는 그냥 우리 이모가 반가워서 맛있는 거 사달라고 졸랐을 뿐이에요.”
재원이는 이렇게 돌려 말하며 아무 일 없는 척했지만 돌콩은 코웃음을 치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그날 분명 들었어. 네가 그냥 널 믿고 따라오라고 그 임산부에게 소리치는 걸 말이야. 너는 분명 곧 일어날 사고를 아는 것 같았어. 나에게 솔직히 말해줘. 미래폰을 둘 중 누가 주운 거지?”
두 아이는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당연한 일이다. 윤후와 재원이는 미래폰의 존재를 모르니까. 이 아이들은 그저 세진이의 비밀을 지켜주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기림이는 혼란스러웠다.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과 돌콩에 대한 불안함, 호기심이 함께 뒤섞여 복잡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너희는 어떻게 했는데?”
기림이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친구들에게 물었다.
“어떡하긴? 그 선생님 좀 이상한 것 같았어. 1학년 때도 좀 멍하니 다른 세상 사람 같았는데 병가 끝나고 돌아와서는 정신병자 같달까. 병원 앞에서 우리를 놓치고 개학할 때까지 매일매일 우리 얼굴을 기억하려고 애써서 잡아낸 거래. 그러니까 우리 중 미래폰의 주인이 누구인지 찾을 때까지 우리를 주시할 거라던데. 그래서 우리가 널 피한 거야. 너랑 세진이까지 얽힌 걸 알게 되면 좋을 건 없겠다 싶어서.”
“그렇구나.”
재원이의 말에 기림이가 멍한 눈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 뒤를 이은 윤후의 말에 기림이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근데 돌콩이 이상한 말을 했어. 어차피 미래폰의 진짜 주인은 네가 아니라 파트너인 그 여자 아이라고. 이용당하고 나처럼 버려지기 싫으면 지금 자기랑 만나보는 게 나을 거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습관처럼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자신의 방에 들어와 책상 앞에 앉은 기림이는 메모지를 꺼내 생각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돌콩, 미래폰의 전 주인
이렇게 쓰고 나서 기림이는 미래폰을 주운 날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분명 미래폰은 학교 근처에서 주웠고, 자신과 통화한 전 주인의 목소리는 기억나지 않지만 돌콩인 것도 같았다. 그는 분명 학생이라는 자신의 대답에 명현고에 다니는 것까지 알아냈었다. 그러니 돌콩이 미래폰의 전 주인일 확률은 굉장히 높다. 그런데 그때 돌콩은 분명 자신에게 미래폰은 더 이상 필요가 없기 때문에, 저주라서 스스로 포기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왜 이제 와 미래폰의 새 주인을 찾는 것일까? 이 답은 돌콩 본인에게서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림이는 다시 볼펜을 집어 든다. 그리고는 또 다른 글을 썼다.
미래폰의 진짜 주인, 파트너, 여자아이.
이것은 세진이에 대한 말이다. 그런데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미래폰의 진짜 주인이 세진이라고? 세진이가 날 이용하고 버린다고?’
드르릉
갑자기 기림이의 핸드폰이 울린다. 기림이는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조심스레 핸드폰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한다. 세진이었다. 기림이는 바짝 탄 입술을 한 번 꽉 깨물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기림아!”
걱정한 듯한 따뜻한 목소리가 귀를 통해 전달된다.
‘그래, 세진이는 따뜻하고 현명한 아이야. 돌콩의 헛소리 따위는 신경 쓸 거 없어.’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서 자라나기 시작한 불신과 불안의 씨앗은 꺾어낼 수 없었다.
“아까 일 때문에 많이 걱정했지?”
“응, 윤후랑 재원이랑 만났어? 무슨 일이래?”
“세진아, 사실대로 말할게.”
“응. 말해 봐.”
“돌콩이 명현 병원 앞에서 사고가 있던 날 이모님을 모시고 가는 윤후와 재원이를 봤나 봐.”
“그래서?”
“아무래도 돌콩이 미래폰의 전 주인 같아.”
“그래?”
세진이의 말투가 의외로, 아니 생각했던 것처럼 담담하다고 느끼며 기림이는 계속해서 말했다.
“윤후와 재원이의 행동이 미래를 아는 사람 같았나 봐. 그래서 두 녀석들한테 미래폰을 주운게 아니냐고 추궁한 모양이야.”
“그랬구나. 그래서 아이들은 뭐라고 했대?”
“당연히 모른다고 했지. 진짜로 모르니까.”
“돌콩이 미래폰의 전주인이 아니라면 미래폰의 존재를 알 리가 없지. 니 말대로 돌콩은 미래폰의 전주인이 맞는 것 같아. 근데 왜 돌콩은 이제 와서 미래폰의 지금 주인을 찾으려는 걸까?”
“그러게 말이야. 나도 궁금해서. 그래서 말인데 세진아.”
“응.”
“내가 그냥 돌콩을 찾아갈까? 내가 지금 미래폰의 주인이라고. 대체 나와 손 잡고 할 일이 뭔지 물어볼까 싶어서.”
핸드폰 건너편 쪽에서 당황한 듯 세진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기림이는 세진이를 시험하는 듯한 자신의 태도에 스스로도 놀랐다. 돌콩이 세진이에 대해 한 얘기는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고 지금도 세진이의 반응을 살피는 듯한 자신의 행동이 조금은 비겁하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전 주인이 정말로 이용당하고 버려졌다면...’
자신이 세진이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었다. 기림이는 그냥 진실이 알고 싶었다.
“기림아, 내 생각엔 말이야.”
한참을 망설이던 세진이가 입을 열었다. 기림이는 가만히 세진이의 말을 기다렸다. 마음속에서 자라난 세진이에 대한 불신은 세진이를 믿기보다는 이 아이가 어떤 식으로 나를 설득시키려 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림이는 세진이가 자신을 설득시키기를 간절히 바랐다. 세진이가 자신에게 무언가 속이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싫었다. 여러 감정이 섞여 머릿속이 복잡해진 기림이는 차라리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일단은 조금 지켜봐야 할 것 같아. 돌콩이 미래폰의 전 주인이고, 지금 주인을 찾는다는 건 뭔가 목적이 있는 거니까 그 목적이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함부로 접근해서 니 존재를 밝히는 건 위험한 일 같아.”
“그럼 돌콩이 윤후와 재원이를 의심하는 건?”
“돌콩은 명현 병원에서의 일로 윤후와 재원이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지 스스로도 확신은 없을 거야. 정말 다행인 게 윤후와 재원이는 진짜 미래폰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고, 그래서 돌콩은 윤후와 재원이에게 아무 짓도 할 수 없을 거야.”
“그래. 그랬으면 좋겠어. 근데 세진아.”
가만히 세진이를 부르는 기림이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스친다.
“왜?”
세진이의 대답이 불안하다.
“내가 더 알아야 할 일은 없는 거지?”
기림이의 질문에 세진이의 답이 늦다. 그 몇 초의 시간에 기림이는 심장이 뛰었다.
“그런 거 없어.”
“그럼 됐어.”
둘은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세진이와 통화를 하면 무언가 정리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머리보다 마음이 복잡하다. 기림이는 일단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내일이 되면 내일의 해결책이 나타날지도 몰라. 오늘은 일단 잊고 자자.’
기림이는 꿈을 꾸었다. 철로 한쪽에는 윤후가 묶여 있고, 한쪽에는 재원이가 묶여 있었다. 기림이는 울부짖으며 기차의 방향을 재원이로 정해놓고 재원이를 향해 뛰었다. 재원이는 윤후보다 빠르니까. 그런데 달리는 자신의 팔을 누군가가 잡았다. 돌아보니 돌콩이다. 돌콩은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힘껏 뿌리치려 애쓰지만 돌콩은 자신의 팔을 놓지 않았다. 누군가 웃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세진이가 서 있다.
“세진아”
크게 소리쳤지만 세진이는 기림이의 목소리가 파묻힐 정도의 더 큰 소리로 웃어댔다. 기림이는 괴로움에 몸을 비틀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아침이다. 베개가 다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며 악몽을 꾼 것이다. 젖은 몸이 무겁다. 자면서 얼마나 용을 쓴 것인지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이대로 다시 눕고 싶었다. 학교에 갈 힘이 없었다. 아니, 학교에 가는 것이 불편하고 두려웠다. 하지만 일어나야 했다. 돌콩은 위험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윤후와 재원이가 그의 감시를 받는 건 안 될 일이다. 기림이는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학교로 갔다.
하루종일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윤후와 재원이를 급식실에서 만났지만 간단히 인사만 하고 스쳐 지나갔다. 세진이와 아는 척하는 것도 내키지 않아 운동장에도 나가지 않았다. 세진이를 믿을 수 없었고, 아직 자신의 생각도 정리되지 않은 기림이었다.
야간 자율학습시간이었다. 수학문제를 풀려고 책상에 펼쳤지만 문제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답답한 한숨만 나왔다. 잠시 고개를 들어 경직된 목을 푸는데 복도 쪽 창문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돌콩이었다.
‘헉, 오늘의 야자 감독이 돌콩이구나!’
깜짝 놀란 마음에 고개를 푹 숙였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어깨까지 움찔한 자신에게 신경이 쓰인다. 어느새 교실로 들어온 돌콩이 작은 메모지 하나를 자신의 눈앞,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3층 상담실로’ 라고 적힌 메모지를 본 기림이는 고개를 들어 돌콩을 보았다. 돌콩은 아무렇지 않은, 어쩌면 부드러운 눈빛으로 재차 확인하듯 눈썹을 찡긋하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여유 있는 돌콩의 모습에 기림이는 마음 한 구석에서 용기가 솟아나는 걸 느꼈다.
‘어차피 알아내야 할 진실이라면 더 이상 혼자 고민하지 말자. 돌콩에게도 세진이에게도 솔직하게 진실을 물어보자.’
그렇게 생각하니 차라리 담담해졌다. 기림이는 돌콩을 향해 입술을 꼭 다문 얼굴을 살짝 끄덕였다. 돌콩이 조용히 교실을 나가고 기림이는 그 뒤를 따라갔다. 학생상담실로 들어가자 돌콩이 문을 닫는다. 조용한 복도에 울리는 문 닫는 소리가 소름 돋게 무섭다. 담담해졌다고 생각하는 마음에 또다시 불안이 엄습한다.
기림이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한 돌콩은 기림이의 맞은편에 앉았다.
“너 맞지?”
돌콩이 물었다.
“맞아요.”
기림이의 대답에 돌콩은 당황하는 눈치였다. 분명 기림이가 숨기려고 애를 쓸 거라 생각했고, 자신의 심문에 입을 열게 만들 거라는 계획으로 상담실로 데려왔건만 너무나 쉬운 기림이의 대답에 돌콩은 어쩌면 허탈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네가 맞다고?”
“미래폰을 찾으신다고 들었어요.”
“그럼 그때 4월에 통화한 게 너였구나.”
“네. 저도 선생님인지 모르고 받았어요.”
“지금 폰은 어딨니? 파트너는?”
돌콩의 목소리가 다급해진다.
“폰은 항상 집에 놔두고 다녀요. 어차피 11시에만 통화가 되는 거 아시잖아요.”
“파트너는 어때? 너랑 비슷한 또래라도 완전 너구리 같은 앤데, 너한테 자기에 대해서 말해 준 건 없어?”
이상한 일이라고 기림이는 생각했다. 돌콩의 파트너는 분명 자신의 파트너와는 다른 사람일 거라 생각했는데 돌콩은 자신의 파트너와 기림이의 파트너가 같은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선생님의 파트너도 여자아이였어요?”
“파트너는 변하지 않아. 원래 그 폰의 주인이니까. 걔가 그 폰을 가진 사람을 조종하고 이용하는 거야. 따지자면 우리는 그 폰과 그 여자아이의 노예가 되는 거니까.”
“네?”
기림이의 놀라는 표정에 돌콩은 도로 안심이 된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너도 속았나 보구나,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도 않고 미래를 알려주는 척 나에게 희생을 강요한 다음, 내가 절실하게 필요할 때 그 핸드폰과 주인은 나를 잘라내 버리지.”
돌콩의 말에 기림이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세진이가 원래 미래폰의 주인이라니, 다 알고 있으면서 여태 자신을 속인 것이라고 말하는 돌콩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세진이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마음속에서 솟아올랐다.
“그게 정말이에요?”
“내가 왜 너에게 거짓말을 하겠니?”
“그런데 그때는 왜 스스로 미래폰을 포기한 것처럼 말씀하셨어요?”
“그건 이야기가 길어. 이제 곧 마칠 시간이니까. 오늘은 미래폰의 현 주인을 찾은 것으로 됐어.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시간이 많을 때 이야기하자.”
“선생님이 저를 찾으신 이유는 뭔가요? 제가 뭘 해주길 바래서 아닌가요?”
자신의 목소리가 다급해지는 걸 기림이 스스로도 느꼈다. 돌콩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룬듯한 눈빛이었다.
“내 이야기는 주말에 따로 만나서 넉넉한 시간을 갖고 하는 것이 좋겠어. 그리고 너를 위해 너한테 당부하는데 한동안은 미래폰의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미래폰의 파트너가 너를 이용할 수 없도록. 그래야 너도 네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가 있을 거니까.”
돌콩과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자율학습 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렸고 돌콩도, 기림이도 상담실에서 나가야만 했다.
‘내가 원하는 것?’
돌콩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세진이에게 돌콩과 한 이야기를 전할 수도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세진이에게 모든 것을 묻고 따지고 싶었지만 세진이는 분명 자신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을 것 같았다. 적어도 세진이가 돌콩의 파트너였고, 자신의 파트너인 것은 분명했다. 그럼 여태까지 처음인 척 자신을 속인 것도 분명했다. 그런 세진이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마음 한 편으로 왜 세진이가 자신에게는 정체를 공개한 것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진짜 마음 깊은 한 편에서는 돌콩이 세진이가 누구인지 몰라서 다행이다, 끝까지 몰라야 한다는 마음도 존재했다. 자신의 마음도 정리되지 않은 지금, 세진이의 전화를 예전처럼 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림이는 세진이에게 카톡 하나를 보냈다.
“세진아, 미안하지만 우리 한동안 연락하거나 만나는 걸 조금 피하자. 돌콩이 내 존재도 알아챈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