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에서 온 전화

4. 빌런의 등장? (2)

by 임효진

4. 빌런의 등장? (2)


토요일 오전부터 기림이는 집을 나섰다. 돌콩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오늘 모든 것을 알게 된다고 생각하니 떨리는 마음 한편으로 벌써부터 홀가분한 마음까지 드는 기림이었다.

아파트 주차장에 서 있던 하얀색 승용차 한 대에서 클락션을 울리는 소리가 난다. 가까이 가 보니 돌콩이었다. 기림이는 숨을 한번 가다듬고는 그 차에 올라탔다. 진하고 달콤한 커피 향이 차 안에 가득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그냥 여기가 아닌 곳? 우리 이야기가 길 것 같아서 말이야.”

돌콩은 차를 문현대학교 캠퍼스로 몰고 갔다. 기림이는 마음 한 편에 두려움이 있었지만, 선생님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불안한 두려움을 접고 또 접어 자신의 마음속 깊숙이 숨겨 넣었다.

차가 서고 한 건물 앞에 선 돌콩은 기림이에게 잠시 앉아 있으라고 하더니 음료를 두 잔 사서 돌아왔다.

“오렌지 주스 괜찮겠어?”

자리에 앉아 음료를 내밀며 묻는 돌콩의 말에 기림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밖에 나와 나란히 차에 앉아 음료를 마시니 기림이는 돌콩이 선생님이라는 마음보다 그냥 사촌 형 같다는 마음도 들었다. 가만히 앉아 서로의 음료를 마시던 돌콩이 입을 열었다.

“저기 저 앞 빨간 벽돌 건물이 화공학과 건물이야.”

“화공학과요?”

“응. 화학공학과 건물. 내가 저기서 가원이를 만났어. 복학했을 때 가원이는 1학년 신입생이었거든.”

“네.”

갑자기 웬 대학시절 연애 이야기인가 싶었지만 이유가 있겠지 생각하고 기림이는 가만히 들었다.

“우린 특별히 그렇게 애끓는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아. 그냥 자주 보다 보니 편하게 서로한테 스며들었고, 그렇게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가 됐어. 그러다 나는 졸업하고 학교로 나왔고 가원이는 제약회사에 취직하게 된 거고.”

“저도 제약회사에 들어가 신약을 개발하는 게 장래희망이에요.”

기림이의 말에 돌콩은 기림이를 따뜻한 눈으로 쳐다봤다. 커다란 산 같았던 선생님의 눈빛이 생각보다 다정해서 기림이는 왠지 돌콩이 믿고 싶어졌다.

“가원이도 그랬어. 신약 개발을 하는 게 꿈이라고.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사회생활을 하며 바쁘게 지냈지.”

“왜 결혼은 안 하신 거예요? 두 분 오래 만나신 것 같은데.”

기림이의 말에 돌콩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결혼이라는 것도 돈이 있어야 되는 거더라고. 나도 가원이도 평범한, 어쩌면 가난한 집 자식들이라 스스로 벌어 모으지 않으면 결혼이 힘들었어.”

“아...”

“아무튼 우린 서로의 경제적 상황과 꿈 사이에서 열심히 갈등하며 돈도 벌었어. 그러다가 1년 전쯤 나는 처음으로 미래폰을 손에 넣었어.”

“어떻게요?”

“너랑 같은 방식이었지. 퇴근길에 땅에 떨어져 있었고, 아무래도 학교 학생이 주인이지 싶어 주웠는데 파트너와 통화하면서 그게 아니란 걸 알게 된 거야.”

“그랬군요.”

“처음에는 좋았어. 나는 많은 일들을 했거든. 대형버스의 전복 사건도 해결하고, 지난해 전근 가신 우리 학교 미술 선생님 기억나니? 문정원 선생님. 그분 아버님도 내가 구해드렸어. 물론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라 증명할 길은 없지만. 힘들기는 했어도, 나에게는 꽤 보람차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어.”

차분하게 말을 하는 돌콩의 눈에서 씁쓸함이 흘러 지나갔다.

“그때는 정의감이었지,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영웅 놀이에 불과했지만...”

돌콩은 다시 음료병을 들이키며 한번 숨을 골랐다. 별로 친하지 않은 선생님이었고, 미래폰의 전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는 존재를 들킬 것 같은 두려움에 피해야 할 악당처럼 느끼며 두려워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나란히 앉아 대화를 하다 보니 태산 같은 어른이며 저렇게 덩치가 큰 선생님도 자신과 같은 평범한 사람이며, 주변 사람들을 구하게 위해 많은 희생을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기림이의 마음을 흔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미래폰의 존재를 알게 되며 파트너로 믿고 의지했던 세진이가 자신을 속인 것이 분명한지, 그건 어떤 이유에서인지도 알아내야 했다. 누가 진실을 말하는 건지, 또, 두 사람의 말이 다 진실이라면 자신의 어떤 사람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지 기림이는 도저히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생각하니 목이 탔다. 기림이도 자신이 들고 있던 음료병을 조용히 입에 갖다 댔다.

“나에게 어떤 일이 있었기에 미래폰을 저주라 너에게지 말했는지 궁금하지 않니?”

“궁금해요. 그런데 함부로 여쭤볼 수 없어 기다리고 있었어요.”

기림이는 선생님의 눈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선생님의 눈빛이 작게 흔들렸다.

“1년 전쯤, 그러니 지난가을의 일이었어. 그때는 정말 사고가 많았지. 수능을 앞둔 학기 중인 데다 미래폰으로 떨어지는 임무가 일주일에 두 건은 됐으니까. 나는 정말 오래간만에 만나기로 한 가원이와의 약속도 그날의 사고로 변경해야만 했어. 그날 사고는 정말 막아야만 하는 사고였거든.”

“많은 사람이 다칠 운명이었나 보네요.”

기림이의 말에 선생님은 기림이를 쳐다보며 물었다.

“지금도 그래? 아는 사람, 어린아이, 많은 인명 피해 위주의 사건만 해결한다.”

“그래요. 아는 사람이 아닐 경우에는 휴일에만.”

“뭐? 휴일? 그건 달라졌네. 난 근무시간 중에도 외출을 하거나 수업 시간을 조절해 가며 움직였었는데. 파트너가 여유가 좀 생겼나 보네. 나는 도대체 뭐 하는 앤지 궁금했거든. 목소리는 학생 같긴 한데 말이나 행동은 나이 많은 어르신 같아서.”

“저도 또래 같은데 생각이 많이 깊은 사람 같다고 생각했었어요.”

세진이의 존재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어떤 힌트를 주게 될까 봐 기림이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지? 어쨌든 난, 그날이 마침 휴일이기도 했고, 그래서 가원이와의 약속은 사고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근처 장소로 늦추고 사고 장소로 향했어.”

“어떤 사고였나요?”

“어떤 트럭이 브레이크 고장으로 아이들을 내려주기 위해 정차해 있던 유치원 통원버스를 뒤에서 받는 사고였어. 만약 그 사고가 제대로 일어났다면 선생님을 포함한 사망자만 열 명이 넘었을 거야.”

“큰일 날 뻔했군요.”

“큰일 날 뻔? 아니 더 큰일이 났지.”

돌콩의 눈은 슬픔과 분노가 뒤섞여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얼굴은 너무 평온해 마치 폭풍전야 같다고 기림이는 생각했다. 돌콩의 슬픔이 왠지 자신이 겪은 그것과 비슷할 것 같아 기림이는 아무 질문도, 그저 대답조차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사고 예정 시각에 그 장소로 가 통원버스가 서자마자 모두를 급하게 내리게 했어. 모두들 날 미친 사람 취급했지만, 그건 아무렇지도 않았어. 이상한 행동을 하는 정신 나간 사람이라 여기는 것이 사람들을 버스에서 빨리 내리게 하는데 도움도 됐고. 그렇게 순식간에 기사까지 끌어낸 나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는 버스를 왼쪽으로 돌려 곧 달려올 트럭과의 충돌을 최대한 이 버스가 감당하도록 하고 버스에서 내렸어. 그리고 나는 봤지. 버스를 향해 달려오는 맹렬한 속도의 트럭. 그리고,,,”

여기까지 말하던 돌콩의 눈은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최대한 울지 않으려 참고, 슬픔을 누르려 가슴을 자신의 손으로 누르는 그의 목에서는 쇳소리가 났다. 돌콩은 목소리를 한 번 가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돌려놓은 버스에 막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핸들을 왼쪽으로 튼 상태로 노란색 통원버스 대신 그 트럭의 희생양이 된 빨간 경차 한 대를. 엉망징창으로 찌그러진 창문에서 너무나 익숙한 시계를 찬 팔목이 가느다란 나무줄기처럼 삐져나온 모습을...”

“허!”

그 빨간 경차의 운전자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아서 기림이는 숨이 턱 막혔다. 돌콩의 눈에서는 참고 참은 듯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난 명현 병원 앞에서의 사고, 자신의 결정으로 생판 모르는 엉뚱한 사람이 죽은 것은 기림이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였다. 그런데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니. 선생님이 느꼈을 그 슬픔과 좌절의 크기를 짐작조차 할 수 없어 기림이는 아무런 위로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의 눈물과 함께 마른 숨소리로 울어 줄 뿐이었다. 한참을 숨을 가다듬던 돌콩이 고개를 들었다.

“가원이가 월급을 모아 차를 샀나 봐. 우린 데이트할 때 항상 걸어 다녔거든. 그즈음엔 내가 항상 피곤해하고 힘들어하니까 태워주고 싶었대. 그날 약속은 몰래 산 차를 나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잡은 거고. 주차장 위치도 모르고 운전이니, 주차니 익숙하지 않으니까 미리 나와서 차를 주차시켜 두려 하다가 그날,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사고를 당한 거야.”

“...”

“중상을 입고 여러 부위에 수술을 하고 한동안 의식불명으로 누워있긴 했지만, 다행히 생명을 잃지는 않았어. 대신 하반신 마비로 평생을 누워 지내야 한다고 했지. 가원이는 나와의 면회를 거부했어. 그런데 그보다 내가 가원이를 찾아갈 수가 없었어.”

“왜요? 죄책감?”

기림이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

“혹시 너에게도 그 파트너라는 여자 아이가 선로의 딜레마 이야기를 했었니?”

“네. 했었어요.”

“말은 쉽지. 미친... 만약 나에게 가원이 한 명이 묶인 선로와 천 명, 아니 만 명이 묶인 선로 중 하나를 정해 구하라고 했다면 나는 분명 가원이를 살렸을 거야. 그런데 신은 선로에 누가 묶였는지 알려주지 않고 나에게 정의로운 선택을 강요했어. 내가 가원이를 찾아가지 못한 건 죄책감 때문이 아니야. 나는 이렇게 만든 미친 선택을 저주했고, 나를 이 길로 이끈 파트너를 원망했어.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든 돌이키고 싶었어.”

“돌이킬 방법이 있다는 말인가요?”

“시간을 돌릴 수는 없지. 하지만 나는 너무나 황당한 피해와 엉뚱한 희생에 대해 보상을 받고 싶었어. 다행히도 미국, 한 대학병원의 경험 많고 능력 있는 교수가 가원이의 자료를 보고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왔어. 미국으로 가 다시 수술받고 재활치료를 한다면 예전처럼 다시 서서 걸을 수도 있고, 꿈이었던 직장생활도 가능하다고 말이야.”

“정말요? 그럼 희망이 생긴 거잖아요.”

기림이의 목소리가 올라간다.

“희망? 그 희망이라는 거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거 알고 있니? 몸을 움직일 수 없는 환자가 그저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만으로도 수천만 원의 돈이 들어. 병원비, 수술비, 재활치료비, 체류비까지 생각하니 나는 본 적도 없는 어마어마한 돈이 있어야 되겠더라고.”

“아.”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파트너를 닦달했지, 복권 당첨번호를 알려달라고. 이런 내가 한심하니? 하면 안 되는 행동을 한 걸까?”

“아니오.”

기림이는 바로 대답했다. 진심이었다. 가족이, 아니 친구가 다치고 병원비가 필요하다면 자신이 지금 자신의 기회나 능력을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상했겠지만 돌아온 대답은 안 된다는 거였어. 미래폰의 능력을 사적인 욕심이나 기회를 위해서 사용하면 안 된다는 교과서 같은 말만 반복하더군. 지금 내 상황이 어떤지 뻔히 알면서 말이야.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나에게 전화조차 하지 않았어, 나에게는 저녁 11시, 그 3분의 시간이 생명줄인데 말이지. 다른 사람들을 구하는 좋은 일이라고 실컷 부려 먹어놓고, 그 사고로 인해 목숨 같은 사람이 다쳤는데, 위로금, 아니 퇴직금이라고 생각해도 줄 수 있는 돈 아닌가?”

선생님은 여기까지 말하고 기림이를 바라봤다. 기림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선생님의 입장이라고 해도 그런 요구가 무리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이 일을 시작할 때 세진이와 했던 다짐들은 어떤 경우에도 바뀌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세진이의 행동들이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세진이의 냉정함이 무섭다는 생각에 들었다. 게다가 세진이는 계속해서 미래폰의 파트너였으면서 여태까지 자신을 속인 사람이 아닌가? 기림이는 혼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파트너와 연락조차 되지 않자, 나는 점점 폐인이 되어갔어. 어떤 좋은 결과도 얻지 않은 상태에서 가원이를 만나러 갈 수가 없었거든. 학교에도 휴직계를 내고 하루 종일 술만 마시며 11시의 전화를 기다렸어. 그리고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때쯤 가원이에게서 연락이 왔어. 와 달라더군. 정신이 번쩍 들었어. 가원이가 나에게 할 말은 하나뿐이라는 생각이 그제야 들더라고. ”

“무슨 말이었나요?”

“헤어짐이었지. 가원이는 병실에서 참 많은 생각을 한 것 같아. 처음에는 나를 놓아주어야 한다는 생각, 그다음에는 내가 자신을 잡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런 고민의 시간 중에도 나는 끝내 가원이에게 가지 않았고, 가원이의 그 생각들은 그녀를 지옥으로 이끌었지. 그런데 그녀는 나보다 훨씬 현명한 사람이었어. 나를 보더니 웃더라고. 그렇게 힘없이 병상에 누워서도 말이야...”

돌콩의 목소리가 비틀어져 이상한 소리를 낸다. 슬픔은 여러 갈래로 갈라진 채 그 목소리에서 흘러나와 바람소리도 쇳소리도 아닌 희한한 울림을 내며 한숨 속으로 먹혀 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돌콩은 분명 울고 있으면서 웃는 소리를 내었다.

“여러 가지 고민을 하면서 죽을 것 같이 힘든데, 그래도 내가 보고 싶었대. 그런데 오지 않으니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들로 지옥의 늪 깊은 바닥까지 내려가고 또 내려가고... 다 내려갔다 싶었는데도 자꾸만 더 내려가더라는 거야. 그래서 어딘가 아무 벽이라도 발 닿는 곳을 디뎌 크게 도약을 했더니 생각보다 높이 제 자리로 올라오더라네. 올라와서 자신이 빠진 지옥의 늪을 내려다보니 그 늪은 너무나 깊어 자신이 벽이라도 디뎌 도약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계속 빠지고 있었을 거라는 걸 확인했다고. 그렇게라도 올라오지 않았으면 자신은 아직도 그저 빠지고만 있었을 거라고. 그렇게 마음이 정리되고, 마지막으로는 날 정리하고 싶어 나를 불렀는데 내 얼굴을 보는 순간 알았대. 아직도 저 사람은 늪에서 계속 가라앉고 있구나라는 걸.”

“아.”

대답은 했지만 선생님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만큼 깊은 늪에 빠져 본 적이 없어서일까? 이렇게 생각하며 기림이는 그저 마음이 슬펐다.

“결국 우리는 헤어졌어. 내 얼굴을 보니 그동안의 고통이 느껴져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은 사람인지 잘 알겠다고 그래서 더 잘 헤어질 수 있겠다고 말하더군.”

“사랑하는데도요?”

“응. 사랑하니까 더욱더 내 옆에서 비참해지기 싫다더라고. 나를 놓아주고 나 없이 잘 일어나 자신의 능력 안에서 또 다른 꿈을 일구며 살겠다는 그녀를 나는 더 잡을 수가 없었어. 그리고 집에 돌아와 미래폰을 버린 거야. 그리고 버린 날, 이상하게도 내 전화로 번호를 알 수 없는 전화가 왔어. 그건 너와의 통화였고.”

“아! 저는 그 전화를 선생님이 거신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그렇게 된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것 역시 그 폰의 능력이겠지.”

“그런데, 지금 선생님께서 절 찾으신 이유는 뭔가요?”

기림이는 선생님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처음에 명현 병원 앞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 너희들을 봤을 때, 나에게 다시 기회가 온 거라 생각했어. 너를 통해 파트너와 연락하고, 다시 열심히 내 목숨을 걸고 일할 테니 가원이에게 치료할 기회를 달라고 말해볼까 잠시 고민한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그 일은 이미 끝난 일이고, 이루어 지지도 않을 거란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어. 다만 너는, 너는 아직 어리잖아. 내가 선생님으로 있는 한 적어도 너는 나의 학생이고. 그래서 나는 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고 미래폰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어. 미래폰을 가졌을 때는 아무에게도 못한 이야기를 말이야. 그리고 그 무서운 아이.”

파트너인 세진이를 말하는 것 같았다.

“너무 믿지 말라고 꼭 이야기 해 주고 싶었어. 결국 나의 선택이 가원이를 그렇게 만들고 나를 절망으로 이끌었지만, 나는 파트너라는 그 아이가 나를 이용하고 버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지금 너는 정의감에 사람들을 구하고, 누군가를 지킬 수 있다는 사실에 잘 모르겠지만, 내일을 미리 알고, 남들과는 달리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건 결코 축복이 아니거든. 자꾸 누군가가 죽을 선로를 골라야 하는 삶을 산다는 건 굉장히 괴로운 일이야. 게다가 어느 순간 알게 될 거야. 오늘이 아닌 미래를 살고 있다는 건 너에게 많은 희생이 필요한 일이라는 걸.”

돌콩의 진심이 느껴져 기림이는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괴로움과 미래를 생각해 일부러 시간을 내 자신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해 주시는 선생님께 세진이의 일을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는 것도 죄책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세진이의 일은 끝까지 말할 수 없었다.

‘아직까지는 믿고 싶어.’

그냥 그런 마음이었다. 기림이는.

상담도 한탄도 아닌 길었던 이야기가 끝나자 돌콩은 다시 기림이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고추잠자리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닌다. 파랗고 높은 하늘을 빠르게, 자유롭게 날고 있는 잠자리들을 보자 뭔가 가슴속이 답답해져 왔다.

“보니까 굉장히 성실한 것 같던데, 성적도 좋고. 바빴을 텐데 대단해.”

돌콩의 말에 기림이가 피식 웃었다. 돌콩의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찡긋하자 기림이가 서둘러 말한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선생님 같아서요.”

그래놓고는 아차 싶은 듯 머리를 긁적인다.

“그래. 오늘 너한테 신세 한탄을 좀 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네. 근데 오늘 나는 잊고, 앞으로는 좋은 선생님으로 널 만날게. 뭐, 미래폰 전임자 역할로도 괜찮고. 힘들거나 필요한 일 있으면 언제라도 말해.”

기림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또 다른 친구가 생긴 것 같아 든든했다. 게다가 어른이라니. 자신의 고민과 선택을 이해하고 의논할 선생님이라는 존재는 단단한 기둥처럼 느껴졌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고개를 숙여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돌콩은 한 손을 들어 살짝 흔들며 인사하더니 그대로 차를 몰고 아파트 단지를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기림이는 돌콩의 차가 눈앞에서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돌콩이 간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저 사람 만나고 온 거야? 내 연락을 피하면서?”

순간 흠칫 놀란 기림이가 고개를 돌려 뒤쪽을 본다. 세진이었다,

벤치에 앉아 얼마나 기다린 건지 바람에 흩날려 엉망인 머리카락이 평소의 세진이 같지 않다. 원망하는 듯한 그 눈빛에 배신감이 가득하다. 그런데 왠지 기림이는 별로 미안하지 않았다.

“왜? 만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스스로도 놀랄 만큼 단호하고 냉정한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기림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 네 말 대로 누구를 만나는 건 니 자유고 선택이겠지. 하지만 며칠째 잠도 못 자고 걱정한 나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나한테 이야기는 해줬어야 해.”

세진이의 목소리가 떨린다.

“걱정? 내가 걱정됐다고? 설마. 넌 내가 걱정됐던 게 아니야.”

기림이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게 무슨?”

“웃기지 마. 넌 나를 걱정하지 않았어. 내가 진실을 알까 봐 신경 쓰였던 거지.”

화를 내듯 마음에 꽁꽁 숨겨둔 말을 쏟아내는 기림이를 보며 세진이의 표정이 분노에서 놀라움, 그리고 슬픔으로 변한다.

“어디까지 안 거야?”

“네가 숨기는 건 어디까지인데? 오늘 내가 안 것 말고도 뭐가 더 있는 거야?”

“기림아...”

세진이가 애원하듯 부른다. 무슨 상황에서도 세진이에게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믿을 거라 다짐했고, 무엇보다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은 만들지 않을 거라 다짐했건만, 막상 세진이의 얼굴을 보니 마음속 깊이 구겨져 쳐 박혀 있던 자신도 모르는 진심들이 쏟아져 나온다.

“내가 다 이야기할게.”

세진이가 애원하듯 기림이의 팔을 잡고 흔든다.

“아니, 지금 니 말은 어떤 말이라도 믿을 수 없어. 그냥 내 질문에만 대답해 줘. 너는 이 미래폰 주인이 바뀔 때마다 함께 바뀌는 파트너인 척, 처음인 척했지만, 사실 이 미래폰의 주인은 원래 너였어. 맞아?”

“응. 맞아.”

세진이의 고개가 체념하듯 떨어진다.

“돌콩, 화학 선생님을 이용하고 여자 친구분이 다치자 도와달라고 한 선생님을 외면하고 연락을 끊은 것도 맞아?”

“응, 하지만 그건 우리의 규칙이..”

“규칙이 뭐 어떻다고? 규칙 이야기는 하지도 마. 너는 내가 그런 상황이어도 규칙 이야기를 하며 돌아설 거였잖아.”

기림이가 폭발하듯 세진이의 말을 끊었다.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놀란 듯 두 사람을 흘깃거리며 지나간다. 하지만 둘의 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그게 아니야. 나도 어쩔 수 없는...”

세진이가 말을 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기림이는 그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웃었다.

“봐! 다 말할 거라고 해 놓고 지금도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무엇을 말할 수 없는지 속으로 다 계산하고 있지? 너는?”

기림이의 말에 세진이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그 눈물에 흠칫하면서도 기림이는 멈출 수 없었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너는 나를 믿을 마음이 없구나.”

세진이의 말에 이번에는 기림이의 말문이 막혔다.

“알았어. 아무 변명도 하지 않을게. 네 말대로 나는 필요에 의해서 너를 속였어. 그리고 필요가 다하면 너 역시도 미래폰의 주인에서 물러나게 될지 몰라, 근데 너를 버리는 건 나한테 조금 어려운 일이야. 왜냐면 내가 미래폰을 받고 나서 미래폰의 주인이 총 여러 차례 바뀌는 동안 나는 여태 너 말고 다른 사람에게 내 신분을 밝힌 적이 없었어. 그러니까 내 말은 적어도 너는 그렇게 버려질 일은 없단 말이야.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 그 규칙을 바꿨는지 너는 알고 싶지도 않겠지만.”

“필요한 말만 해. 나 네 말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기림이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반쯤 돌려서 말한다. 얼음 같은 말만 내뱉는 기림이를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던 세진이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서로 신뢰가 없는데 우리가 앞으로 같이 일을 하긴 어려울 것 같다. 친구가 되는 것도 그렇겠지? 미래폰은 잠시만 맡아줘. 버려도 좋고.”

“버리라고?”

기림이가 당황한 듯 세진이를 쳐다본다.

“응.”

세진이의 표정이 확고하다.

“알았어. 주인이 버리라는데 버려야지.”

기림이가 내뱉듯 마지막 말을 남기고 돌아서 자신의 집 쪽으로 향한다. 마음이 심란하다. 거짓말을 한 세진이에게 화가 났다. 믿을 수 없는 아이에게 여태껏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의지했던 자신도 한심했다. 그러면서도 세진이가 다시 달려와 자신의 팔을 잡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이렇게 자신을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렇게 걷다 아파트 현관 앞에서 기림이는 끝내 돌아보지 않으려 했던 마음을 접고 뒤를 돌아봤다. 자신도 모르게 큰 한숨이 나온다. 세진이는 그 자리에 없었다. 자신보다도 더 빠르게 돌아서 가 버린 세진이가 기림이는 슬픈 것 같기도 하고, 미운 것 같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와 점심은 먹었냐 묻는 걱정스러운 엄마의 질문에 먹었다고 건성으로 대답하고 방으로 들어와 책상 앞에 앉았다. 멍한 손으로 서랍을 열었다. 덩그러니 놓여 있는 미래폰이 보인다. 까만 화면이 오늘따라 차갑게 느껴진다. 미래폰을 들어 손에 터질 듯이 꼭 쥐어 잡았다. 손이 하얗게 변하며 터질 듯이 아프다. 기림이는 미래폰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손이 아파서가 아니었다. 미래폰이 세진이와 연결된 마지막 끈 같았다. 그리고 미래폰은 세진이 같았다. 자신이 아파서, 다 돌려주고 싶은 마음에, 자신에게 박혀 있는 가시를 뽑아 분명히 세진이를 찌른 것 같은데, 왜 자신이 찌른 세진이를 보는 게 이렇게 아픈 건지 모르겠다. 기림이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아’하는 답답한 소리를 내지르고는 침대로 가 누워버렸다. 등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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