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림이는 처음 듣는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그동안 알 수 없었던 세진이의 비밀이 이건가 싶었다, 현재 상황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둘 사이의 대화가 너무나 궁금하고 당황스러웠다. 입을 꾹 다물고 듣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내가 우스웠겠네. 네가 레드 바이올렛인 것도 모르고 도움을 요청했으니.”
세진이가 허탈하다는 듯 말했다.
“아니, 즐거웠어. 너도 그렇겠지만, 나도 활동한 지 얼마 안 돼서 네가 내 첫 목표였거든. 그나저나 나 너무 재능 있는 것 같아. 처음으로 찍은 사람이 푸른 마녀단이 맞았고, 이렇게 완벽하게 내 실적이 되어주니 말이야.”
예영이는 정말로 즐거운 듯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화학 선생님은 왜?”
“네가 푸른 마녀단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주신 분이지. 이 분도 너 때문에 피해를 입고 너의 행적을 조사 중이시더라고.”
예영이의 말에 돌콩이 세진이 옆으로 다가가 섰다.
“니 존재가 너무 궁금했어. 나는. 그래서 한기림 주변을 샅샅이 조사했지. 그러다 기림이가 미래폰을 주운 뒤부터 급격히 친해진 여자 아이가 바로 너라는 걸 알았어. 그래서 너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여기 예영이를 불러내게 된 거고.”
돌콩의 말에 예영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께서 세진이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하신 순간 나는 알았지. 너의 확실한 신분을.”
“그래서 날 어떻게 할 계획이야?”
예영이의 말에 세진이가 물었다.
“푸른 마녀단의 처리 매뉴얼이 있잖아. 뭐 부적이 주로 쓰이긴 하지만. 그래도 친구로 지낸 시간이 있는데 그래도 그것보다야 자격 박탈이 낫지 않겠어?”
“차라리 죽이는 게 어때? 마녀에게 자격 박탈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잖아!”
세진이의 외침에 예영이는 빙긋 웃었다.
“그래? 그래도 어쩌겠니? 마녀가 된 자신을 원망해야지. 마녀 너는 그렇다 쳐도 억울한 목숨을 죽일 수는 없잖아. 그래서 말인데, 이제부턴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할 거야.”
무슨 일인지 짐작한 듯 입술을 꽉 깨무는 세진이의 곁에서 예영이가 한 발 물러 서고 돌콩이 다가섰다.
“제발, 부탁이야.”
“선생님. 안 되는 거 아시잖아요.”
애원하는 듯한 돌콩의 부탁에도 세진이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15분 정도 남았어. 네가 마음만 먹으면 되는 일이야. 그럼 적어도 저 아이는 안전해.”
돌콩은 울부짖듯 말하며 손가락으로 기림이를 가리켰다. 기림이의 몸이 움찔한다.
“무슨 일이에요? 선생님! 선생님이 이러시면 안 되잖아요. 우리를 도와주세요.”
기림이가 외쳤다. 눈이 기림이와 마주친 순간 돌콩이 기림이에게로 다가섰다. 손에는 묵직해 보이는 야구방망이를 든 채였다.
“이제 네가 설득해 봐. 오늘은 금요일이고 곧 내일의 저 아이에게서 전화가 올 거야. 그때 로또 당첨번호를 알려달라고 말이야. 내 사정 너도 알잖아?”
“그 그건...”
돌콩의 표정이 너무 간절했지만 그 간절함에 들어있는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기림이는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저 아이가 지금 마음만 먹으면 되는 거야. 그럼 곧 너의 미래폰으로 내일의 전화가 올 거고 너는 그 통화를 한 후 나에게 알려주면 되는 거지.”
“안 돼요. 갑자기 오느라 미래폰을 놔두고 왔어요.”
기림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거라면 걱정 마.”
예영이가 어느새 챙겼는지 기림이의 가방에서 미래폰을 꺼내 흔들었다.
“집에 돌아갔다고 했는데 가방이 계속 교실에 있으면 안 되니까 내가 챙겼지. 참! 니 친구들은 지금 어떨지 모르겠네. 너 혼자 나갔다고 하니까 얼굴이 하얘져서 뛰쳐나가던데 말이야.”
“야!”
기림이는 너무 화가 나서 예영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네가 나한테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는 거 다 이해해. 너한테 유감은 없어. 단지, 못할 짓을 하게 될까 봐 조금 미안한데, 뭐 어쨌든 그 못할 짓도 내가 할 건 아니니까.”
이렇게 말한 예영이는 돌콩에게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살짝 까닥였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거야.”
돌콩이 답을 하듯 고개를 까닥이더니 야구 방망이를 들어 기림이를 내리칠 듯한 상태로 서서 세진이를 향해 말을 이어 나갔다. 스스로도 불안한 듯 그 목소리가 떨린다.
“너는 지금 당장 나에게 로또 번호를 알려 주는 걸로 마음을 먹어야 해. 나는 11시까지 기다릴 거고 11시에 이 미래폰이 울리지 않으면 이 아이를 다시는 못 보게 될 거니까.”
“당신이 한 짓이란 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
“난 최대한 이 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내려칠 거야. 기절할 만큼만 말이야. 그다음 기절한 이 아이를 옥상에서 밀어버릴 거야. 자살로 보이도록.”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
세진이가 소리를 질렀다.
“아! 내가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 ‘자살로 보이도록’이라는 말은 사람들은 기림이의 사인을 처음에는 자살로 알게 될 거란 말이지. 범인은 당연히 네가 될 거고.”
예영이가 뒤에서 말했다.
“사람들이 네 말을 믿을 것 같아?”
“글쎄. 내 말보다야 믿음은 가지 않을까? 우린 두 명인데. 믿을만한 신분의 선생님도 있고 말이야. 우린 서로의 알리바이가 되어 줄 거야. 이 옥상에는 너희 둘만 있었던 거고, 안 그래?”
예영이의 말에 세진이가 분한 듯 씩씩거린다.
“이제 10분 남았어. 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 거야.”
돌콩이 세진이를 향해 마지막 말을 던졌다. 기림이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선생님, 제발 풀어주세요. 이건 해결책이 아니에요.”
“절실한 사람에게는 보이는 모든 문이 탈출구야. 나도 너에게는 미안해.”
돌콩은 기림이의 눈을 애써 피하며 말했다.
“풀어주세요. 우리 부모님이 찾고 계실 거예요. 여기로 오실지도 몰라요.”
기림이가 애원한다.
“그건 걱정 마. 니 핸드폰으로 친구들과 스카에 간다고 어머니께 문자 보냈어. 평소에도 문자로 대화 많이 한 것 같더라. 금방 알겠다고 답 문자도 왔고...”
예영이의 대답에 기림이는 마지막 희망조차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있으면 자신은 비참하게 죽고 세진이는 그 죄를 다 뒤집어쓰게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기림이가 고개를 들고 세진이에게 말했다.
“세진아. 제발... 우리 그냥 시키는 대로 하자”
기림이와 눈이 마주친 세진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다가 눈을 꼭 감더니 입을 열었다.
“할게요.”
“뭐라고?”
작은 목소리로 흐느끼듯 말하는 세진이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지 돌콩이 되물었다.
“할게요. 번호 알려 드린다고요.”
세진이가 체념하듯 외쳤다. 그리고는 기림이를 보며 말했다.
“네가 이런 일 겪게 해서 정말 미안해. 좀 있다 전화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모든 힘을 다 해 너 지킨댔지? 그러니까 진짜 걱정하지 마.”
“응”
고개를 끄덕이는 기림이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세진이의 선택이 어떤 대가를 치를지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을 만든 자신이 원망스럽고 세진이를 믿지 못한 그 시간이 너무나도 미안했다.
“그래. 마음의 결정을 했다면 우리가 잠깐 비켜주지. 그래야 미래폰이 울릴 테니.”
예영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돌콩은 앞으로 묶인 기림이의 손에 미래폰을 쥐어 주더니 살짝 속삭였다.
“헛짓거리는 접어 둬.”
그렇게 말한 돌콩은 예영이를 따라 옥상 문을 열고 나갔다.
쾅 철커덕
문이 닫히고 잠기는 소리가 소름 돋도록 크게 울린다. 세진이는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눈물만 흘리고 있었고, 기림이는 그런 세진이를 보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너무나 두려웠다. 조심스럽게 세진이를 불렀다.
“세진아, 괜찮아?” 세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너는 괜찮아.”
“나도 괜찮아.”
기림이는 억지로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미안해. 나 때문에...”
“너 때문이 아니야. 내가 성급하게 군 거지. 아니, 나 때문도 아니네. 나쁜 건 이렇게 만든 사람들이잖아.”
“많이 놀랐지?”
“괜찮아. 정말로”
“아니, 그거 말고. 내가 마녀라는 거.”
세진이의 말에 기림이가 흠칫한다. 잊고 있었다. 처음에 들었을 때는 놀랐지만 그것보다는 돌콩의 야구 배트가 언제 자신을 향해 휘둘러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마녀 이야기는 기림이에게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 그건 좀.”
기림이가 말을 얼버무리자 세진이의 눈이 슬퍼진다.
“차라리 무당이 나았을 텐데. 어차피 무당하고 크게 다를 것도 없는데 마녀라는 이름이 붙어버렸어.”
“응. 마녀라는 이야기는 조금 놀랍긴 했어.”
기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다시 조심스레 세진이에게 물었다.
“너 정말 괜찮은 거야? 로또 번호를 알려줘도?”
“그 무엇이라 해도 네가 죽는 것 보다야 괜찮겠지. 그래서 그냥 알려줘 버리려고.”
세진이가 희미하게 웃었다.
“알려주면 너는? 너는 어떻게 되는 건데?”
“이제 더 이상 마녀로서 활동을 못하게 될 거야. 그리고 내게 모든 가르침을 주신 대모님 또한 그 자격을 박탈당하는 거고. 그리고 나도 잘 모르는 어떤 형벌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어. 그 형벌을 받은 마녀들은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못해. 만난 적도 없어.”
“그럼 너도?”
놀란 기림이가 세진이에게 되묻다가 입을 다물었다. 방법이 없었다. 세진이의 형벌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그러게. 나도 아무런 생각도 떠 오르지 않아. 그냥 나는 네가 무사히 여기를 빠져나갔으면 좋겠고, 다시는 나랑 안 얽히면 좋겠어.”
여기까지 말한 세진이가 휴 하고 큰 한숨을 쉬었다.
“지금 몇 시야?”
기림이는 손에 쥔 미래폰을 내려다봤다. 10시 59분이었다.
“1분 남았어.”
“그래.”
세진이의 목소리에 힘이 없다. 기림이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답답하고 가슴 아팠다. 멀리서 별 하나가 유난히 반짝였다. 눈물이 나려는지 그 별이 흐릿하게 번져 보였다.
웅
손에서 울리는 진동에 기림이가 흠칫 놀란다. 고개를 들어 세진이를 보니 세진이도 놀란 듯 눈이 동그래져 있다. 그러더니 전화를 받으라는 듯 기림이를 향해 고개를 크게 한 번 끄덕였다. 기림이는 손에 든 미래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스피커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기림이의 목소리가 떨린다.
“기림아! 너 괜찮아?”
내일의 세진이 목소리도 불안함이 가득했다.
“응. 나는 괜찮아.”
기림이가 울 듯한 목소리를 삼키며 겨우 답했다.
“기림아, 이제부터 내 말을 잘 들어야 해.”
“응. 말해.”
“나는 너에게 로또 번호를 알려주지 않을 거야.”
“응?”
기림이의 놀란 눈이 세진이를 향한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세진이도 놀란 듯 입을 벌렸다.
“너를 포기하는 게 아니야. 너희는 무사할 거야. 단지 시간을 좀 끌어야 해. 10분? 아니, 넉넉잡아 20분이야.”
“무슨 소리야? 20분 동안 시간을 끌라니?”
“20분 안에 너희를 구할 사람들이 나타날 거야. 어제의 내가 준비한 게 있거든.”
휴대폰 건너편에서 들리는 소리에 맞은편에 묶여 있는 세진이가 소리를 질렀다.
“정말이야? 그분이 오신다고?”
세진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내일의 세진이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기림이가 다시 물었다.
“여기 세진이가 묻는데 그분이 오시냐는데.”
“응. 조금 늦지만 반드시 오신다고 전해줘. 그러니까 너는 시간을 잘 끌어야만 해.”
기림이가 고개를 들어 얼핏 보니 세진이의 얼굴이 환하게 밝다. 무언가 해결이 되는 것 같아 기림이도 안심이었다.
“어떻게 시간을 끌지? 오자마자 물어볼 텐데.”
기림이가 물었다.
“무슨 방법이든 써 봐. 다른 번호를 알려주는 것도 괜찮고.”
“그거 좋겠네. 어쨌든 오늘은 결과를 알 수 없잖아.”
“번호를 알려주는 것도 시간을 끌어야 해. 번호를 알게 되면 너희가 다시 위험해질지도 모르니까.”
“알겠어.”
기림이가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건 도움을 요청한 사람이 나타날 거고, 너희는 무사히 그곳에서 탈출한다는 거야. 그러니 너무 두려워 말고 지금 니들 앞에 주어진 일을 잘 해결하길 바라.”
“응. 알겠어.”
“그럼 나는 이만 끊을게. 지금 니 옆의 나와 대화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 계획을 짜야하잖아. 그 사람들 딱 3분 있다 올라오려고 시간을 재고 있을 거거든.”
“어? 어.”
세진이는 그렇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예상과는 너무나 다르게 흘러가는 현재의 상황에 의자에 묶인 두 아이는 어리둥절했다.
“이제 우리 어떡하면 될까?”
세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림이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여러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마음이 다급해서 인지 그다지 좋은 생각들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보다 더 당황해 어쩔 줄 몰라하는 세진이에게 뭔가 희망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나한테 생각이 있어. 최대한 시간을 끌어볼게. 너는 나한테 적당히 맞춰줘. 우린 분명히 당첨 번호를 들은 거야.”
기림이의 말에 세진이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기림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철커덩. 쾅
큰 소리와 함께 옥상의 문이 다시 열렸다. 두 아이는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많이들 긴장한 모양이네. 이제 다시 시작해 볼까?”
예영이가 웃으며 들어왔다. 아까와 같이 죄책감이라고는 하나 없는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그 뒤를 따라 돌콩도 따라 들어온다. 어두운 얼굴로 손에 든 야구 배트가 소름 끼치도록 무거워 보인다. 기림이는 크게 심호흡하며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둘은 서로 눈짓을 하더니 돌콩은 기림이 쪽에 와 서고 예영이는 세진이의 옆에 가 선다. 갑자기 돌콩이 기림이가 앉아있는 의자를 세진이와 먼 쪽으로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끼익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린다.
“왜 그래요? 어디로 끌고 가는 거예요?”
기림이가 두려움에 소리쳤지만 돌콩은 그대로 몇 걸음 더 세진이와 기림이의 거리를 멀어지게 했다. 기림이는 세진이를 보았다. 10m쯤 떨어진 거리가 하나로 묶인 둘의 의지를 더 꺾어 버리는 것 같아 두렵다. 어두운 밤에 이만큼 떨어지니 달빛에도 별빛에도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다.
“조금 떨어뜨려 놓고 확인할 게 있어서 말이야.”
세진이 옆에 선 예영이가 말했다.
“너희는 분명 로또 번호를 같이 들었을 거야. 네가 손을 올릴 수 없으니 말이야. 그러니 번호를 말했다면 둘 다 듣지 않았겠어? 그러니 너는 여기서, 저 마녀는 저 마녀 사냥꾼이라는 아이에게 각자 들은 로또 번호를 말하는 거야. 그럼 우리는 서로가 들은 번호를 확인할 거고 하나라도 번호가 틀리면 알지?”
그렇게 말하며 돌콩은 자신이 들고 있는 야구 배트를 소리가 나게 땅에 대고 두드렸다. 깜짝 놀란 기림이가 어깨를 움츠렸다.
‘어쩌면 좋지? 번호에 대해서는 말을 맞춘 적이 없는데...’
불안한 생각에 머리는 쉴 새 없이 이리저리 굴러간다. 그런 낌새를 눈치챈 듯 돌콩이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끝난 거나 다름없는 내 인생에서, 너 하나 더 없앤다고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돌콩은 미친 사람 같았다. 그전에 보았던 한 여자를 따뜻하게 사랑하던 다정한 선생님은 없어진 것 같았다. 기림이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말했다.
“번호를 알려드리기 전에 거래할 게 있어요.”
“쓸데없는 수작 부리지 말랬지?”
돌콩이 소리쳤다. 하지만 예영이는 흥미 있는 듯 피식 웃더니 기림이 쪽으로 다가왔다.
“거래라니 기대되는데. 네가 말하는 거래가 뭐야? 마녀에게 피해를 입고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게 레드 바이올렛은 관대하거든.”
“우린 분명 로또 번호를 들었고 같은 번호를 말할 거야.”
기림이는 세진이도 들을 수 있게 일부러 조금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지.”
예영이가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하지만 로또 번호를 들은 다음 우리를 해치면 어떡해? 내가 불안한 건 그거야.”
“그건 걱정 마. 나는 약속을 지키니까.”
기림이의 말에 예영이가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내가 네 말을 믿을 수 있겠어? 나한테는 그 번호가 유일한 무기인데. 듣고 나서 네가 나나 세진이를 해친다면?”
기림이가 말했다.
“그건 내가 약속해.”
돌콩이 나선다. 간절하고 다급한 표정이다.
“그럼 선생님을 믿을게요. 난 엄마 생일인데도 못 가고 빨리 끝내고 싶어요.”
기림이는 일부러 더 크게 말했다. 엄마 생일을. 그리고 세진이가 조금이라도 눈치채 주길 간절히 기도했다.
“일단 번호를 작은 숫자부터 하나씩 말할 거예요. 우리도 그 차례로 들었으니까. 숫자를 한 개 알게 될 때마다 하나씩 우리를 풀어주면 좋겠어요. 그래야 우리도 안심하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돌콩은 허락을 구하는 듯 예영이를 쳐다봤고, 예영이는 별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렇게 하지. 번호는 최대한 작은 소리로 말해야 해.”
돌콩이 말하자. 예영이는 원래 자신의 자리였던 세진이의 옆으로 돌아갔다. 돌콩의 귀가 자신의 입 가까이로 다가왔다.
“4”
자신의 엄청나게 쿵쾅거리는 것을 느끼며 기림이는 첫 번째 숫자를 말했다. 숫자를 메모한 돌콩은 예영이 쪽으로 다가가 메모를 보여줬다. 숫자를 확인한 예영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희미하게 보이자 기림이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신호인 엄마 생일을 알아챈 세진이가 든든하고 기뻤다. 세진이가 당연히 자신의 엄마 생일을 알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건 예영이나 돌콩도 마찬가지일 거고. 둘이 같이 알고 있는데 그들이 눈치 못 챌 방법으로 기림이는 세진이 어머니의 생일. 그러니 둘이 처음 통화한 날을 생각해 낸 것이다.
돌콩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왔다. 둘이 같은 수를 말하자 어느 정도 믿으며 안심하는 눈치였다.
“자, 다음은?”
또다시 돌콩의 귀가 다가온다. 시간을 끌고 싶은 기림이가 괜히 기침을 하며 콜록거렸다. 돌콩이 인상을 쓴 채 고개를 들어 기림이를 쳐다봤다.
“10이에요.”
기림이는 또다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돌콩은 이번에도 메모를 하더니 예영이에게 들고 가 확인하고 돌아왔다.
“그다음.”
돌콩이 또 가까이 다가왔다.
“잠깐만요!”
기림이가 다급하게 외쳤다.
“또 무슨 수작이야?”
돌콩이 험악하게 소리친다.
“번호 두 개를 알려 드렸으니 줄을 하나 풀어주세요.”
기림이의 말에 돌콩이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예영이에게 다가가 가위를 받아와서는 발목의 케이블 타이를 끊어주었다. 그 가위를 돌려받은 예영이가 세진이의 케이블 타이를 끊으려고 하자 이번에는 세진이가 크게 외친다,
“잠깐만.”
“무슨 일이야?”
예영이의 질문에 세진이가 답했다.
“나는 안 풀어줘도 괜찮으니까 나 말고 기림이를 풀어줘.”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예영이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기림이 쟤 허리가 많이 아파서 저렇게 오랫동안 앉아 있는 거 힘들어. 나중에 신경이 눌러져 못 움직일 수도 있다더라. 손목만 묶어 놓으면 달아날 수 없을 거야. 내가 이렇게 묶여 있는데 도망갈 아이도 아니고.”
“눈물 나게 고마운 우정이군.”
예영이가 가소롭다는 듯 말하더니 돌콩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돌콩은 다가와 기림이와 의자를 묶은 줄을 풀어 주었다. 기림이는 묶인 두 손을 빼고는 편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모든 번호를 말할 때까지 이제 기림이는 더 풀어줄 수 없어.”
예영이의 말에 세진이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한 예영이가 재촉했다.
“그다음!”
돌콩이 다가와 앉아 있는 기림이의 입 가까이 머리를 갖다 댔다.
지금이다
기림이는 벌떡 일어나며 무릎으로 돌콩의 머리를 가격했다. 그리고는 재빨리 무릎을 들어 케이블 타이로 묶인 손목으로 치켜올린 무릎을 향해 내리쳤다. 몇 차례 TV나 유튜브에서 호신술이나 묶인 끈을 푸는 동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림이는 얼굴을 감싼 채 나뒹굴고 있는 돌콩 옆에 있는 야구배트를 주워 든 채 세진이쪽으로 달려갔다.
“뭐야?”
깜짝 놀란 예영이가 뒤로 물러났다. 세진이 곁에 서서 야구 배트를 든 채 기림이는 돌콩이나 예영이가 다가오지 못하게 배트를 그들을 향해 겨눈 채 눈을 떼지 못한 채 서 있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기림이가 세진이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만 더 버텨 보자.”
세진이 역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림이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어떻게 시간을 끌지 앞이 깜깜했다.
어느새 일어선 돌콩이 아까 기림이가 앉아 있던 의자를 들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 새끼가!”
돌콩이 의자를 높게 치켜들었다. 세진이가 크게 소리쳤다.
“그만해요. 번호 알려드린다고 했잖아요.”
돌콩이 의자를 든 채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다.
“알려주기로 한 녀석들이 이렇게 사람을 기만하냐? 너도 저 자식도 똑같아. 절박한 사람 마음을 이용이나 하고 말이야...”
“이용한 적 없어요. 나도 나름대로 방법을 찾고 있었어요.”
“웃기지 마. 네가 얼마나 약고 영악한지 난 다 알고 있어.”
“정말이에요. 난 그분을 계속 살펴 왔고, 치료받을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알아보고 있었어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로또 번호 같은 게 아니라.”
세진이가 울음을 토하듯 말했다. 돌콩은 의자를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네가 가원이를 살폈다고? 치료받게 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로 사람 우습게 만들지 마.”
그렇게 말하면서도 돌콩의 목소리에 힘이 빠진다.
“지난번 명현 병원에서 재원이랑 윤후를 봤다고 했죠? 그날 사고에서 그분은 죽을 운명이었어요.”
“뭐라고 가원이가? 가원이가 거기 있었다는 말이야?”
돌콩이 놀란 듯 가까이 다가온다. 기림이는 배트를 쥔 손에 힘을 더 꽉 주었다. 하지만 돌콩을 내려칠 수는 없어 그 손이 떨렸다.
“네가 가원이를 구했다고?”
“네. 계속 그분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왜? 네가 왜?”
돌콩이 울부짖듯 외쳤다.
“나도 그분의 불행에 책임이 있으니 말이에요. 선생님이 말한 저주? 내가 내 능력이 저주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세요? 할 수만 있다면 내가 그분 대신 다치고 싶었어요. 그래서 나는 다음 미래폰의 주인인 기림이에게 내 존재를 밝힌 거예요. 나도 이제부터는 위험한 그 자리에 항상 함께 나가 사고를 목숨 걸고 막아내고 사고의 책임을 같이 져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려면 내 신분을 속여서는 안 되는 거니까요. 내 마음에도 큰 상처가 있어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그런데 그분은, 김가원이라는 그분은 너무나 건강한 사람이더군요. 몸만 멀쩡한 당신과는 달리.”
“가원이가 왜? 너한테 뭐라고 했어?”
“그날 사고를 피하기 위해 나는 그분을 업고 편의점으로 뛰었어요. 그리고 그분의 휠체어는 알다시피 그날 사고를 정면으로 맞이할 운명이라 너무나도 다행스럽게 주인 없이 자동차에 부딪혀 폐기되었고요. 나는 그분께 사과를 했어요. 중요한 휠체어를 망가뜨려 죄송하다고. 그런데 그분이 그러시더라고요. 괜찮다고. 그리고는 휠체어 말고 이렇게 누군가에게 의지를 하는 것도 참 든든하고 고마운 일이라고. 자신도 그 사람에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그렇게 말했어요.”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네.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게 아니라 선생님이 자신에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을 했어요.”
그 말을 듣던 돌콩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가원이가 그렇게 돼 버려서 나를 원망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아일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 놓으려고 했고. 그러다 버림받았지. 근데 그 아이는 자신의 장애 따위는 스스로 아무렇지도 않았던 거야. 그걸 딛고 일어서서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보이고 싶었던 거고. 사고 이후 변한 건 나였네. 가원이의 장애는 그 다리가 아니라 나였던 거고.”
“네. 그분은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어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그래서 다시 함께 손잡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그런 날을요.”
돌콩은 한참이나 자리에 앉아 얼굴을 감싸 쥐고 흐느꼈다. 기림이는 난감한 듯 손에 쥐고 있던 배트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아! 진짜 손 안 대고 코 푸나 했는데...”
짜증 섞인 목소리의 예영이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다가왔다. ㄱ자가 여러 개 얽힌 것 같은 이상한 무늬의 펜던트 같은 것을 꺼내 손으로 툭툭 털며 웃었다.
“안돼!”
세진이가 나지막하게 외쳤다.
“왜? 무슨 일이야?”
기림이의 물음에 예영이가 대답한다.
“이거? 저거 마녀 퇴치 부적 같은 거야. 저게 몸에 닿으면 저 마녀의 능력은 완전히 사라져. 능력뿐만이 아니라 마녀로 존재한 순간부터의 모든 기억과 나이에 맞는 지능까지. 그냥 몸만 자란 어린아이가 되는 거지... 우리 레드 바이올렛은 너무 관대한 거 아닌까? 죽여도 모자랄 마녀 따위에게 이런 관용을 베풀다니, 안 그래?”
“뭐라고?”
웃으며 다가오는 예영이의 말에 기림이가 놀라 다시 야구배트를 주워 들었다. 예영이는 아랑곳 않고 가까이 다가왔다.
“가능하면 이걸 안 쓰고 자격 박탈로 끝내고 싶었는데 좀 안타깝지만 어쩌겠어?”
“도대체 세진이한테 왜 그러는 거야?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웃으며 다가오는 예영이에게 기림이가 소리쳤다.
“나쁜 짓이 아니라고? 신이 내린 운명을 거스르고 자신이 마치 신인양 사람의 죽음을 고르는데 그게 나쁜 짓이 아니라고?”
예영이가 비웃듯 되물었다.
“그래도 사람을 많이 구하고...”
기림이의 말에 점점 힘이 없어진다.
“원래 죽음은 신이 내리는 거야. 그것이 인간의 운명인 거고. 푸른 마녀단은 아주 옛날부터 자신이 마치 신이라도 된 듯 자신과 친한 사람의 운명에 개입하고, 자신이 선택한 몇몇 사람들의 운명을 바꿔왔어. 그래서 신을 모시는 우리 레드바이올렛은 1000년도 더 전부터 그들을 제거하는데 뜻을 모으고 활동을 해 왔지.”
“1000년 전?”
너무나 오랜 역사에 놀란 기림이가 입을 벌렸다.
“그래. 지금은 중세라고 불리는 그 시대. 그 시대에도 마녀사냥이 있었다는 거 알고 있지?”
예영이의 말에 기림이는 너무 놀라 다시 한번 세진이를 쳐다봤다. 세진이는 눈을 꼭 감고 자신에게 다가올 끔찍한 일을 준비하는 듯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기림이는 고개를 한 번 젓고는 예영이에게 소리쳤다.
“그럼, 너도 잘못하는 거야! 너도 다른 사람의 운명을 거스르는 거잖아!”
“너는 아직 저 마녀가 사람으로 보이는가 보구나!”
기림이의 말에 예영이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딱 부딪히는 소리를 내었다. 갑자기 기림이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입도 벌어지지 않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중세시대 레드 바이올렛들은 마녀를 처단할 능력이 없었지. 다행히도 그들에겐 신을 숭배하는 대중의 힘이 강한 능력으로 더해졌었고. 그래서 그들은 대중을 선도해 마녀 사냥을 하고 마녀들을 태워 없앴어. 중세가 지나자 과학이 발전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더 이상 마녀에 대해 믿지 않았어. 우리는 마녀를 찾아내고도 잡지 못하는 한심한 사냥꾼이 되었지. 우리는 신을 향해 빌고 또 빌었어. 마녀를 처단할 능력을 달라고. 신이 그런 우리에게 은총을 내리신 거야. 어느 순간 우리에게 돌연변이 초능력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거든. 바로 나 같은.”
여기까지 말하던 예영이는 어느샌가 일어서 자신을 잡으려던 돌콩을 향해 다시 한번 손가락을 부딪혔다.
쿵
무슨 이유에서 인지 저만큼 날아가 땅에 세게 부딪히며 나뒹구는 돌콩의 입에서는 끙하는 소리가 났다.
“이제 니 차례야. 그분이 창조하고 그의 품과 같은 이 세상에서 마녀는 조용히 사라져 줬으면 좋겠다. 참! 알고 있겠지만 너의 대모에 대한 정보를 준다면 너를 마녀 박탈로 끝내줄 용의는 있어.”
“웃기지 마”
세진이가 소리쳤다. 예영이가 황당하다는 듯 피식 웃더니 손에 든 펜던트를 세진이 가까이 갖다 대었다. 펜던트의 기운 때문인지 고개를 돌리던 세진이가 고통의 소리를 질렀다. 그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게 대모가 누군지 알려줬으면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진 않았을 텐데.”
기림이는 그 모습을 보며 소리 지르며 세진이쪽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용을 쓰는 이마에선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