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잠든 기림이의 귀 옆에서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리자 기림이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재원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탓인지 전화를 늦게 받은 재원이의 목소리가 늘어진다. 일찍부터 깨운 기림이에 대한 짜증이 잔뜩 묻어나는 말투다.
“미안, 일찍 깨워서.”
“그러게. 뭐냐? 너 이 씨.”
“나 오늘 죽는대.”
왠지 친한 친구의 입에서 욕이 나올 것 같아 기림이는 장난처럼 가볍게 얼른 재원이의 입을 막았다. ‘헉’하는 소리와 함께 재원이는 기절이라도 한 듯 한참이나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여보세요? 듣고 있어?”
기림이의 다그침에 다급한 재원이의 숨소리와 함께 여러 질문들이 폭풍처럼 쏟아진다.
“네가? 왜? 언제? 무슨 일이야? 왜 그렇데? 응?”
“진정하고 들어. 일단 숨부터 들이마시고...”
재원이는 기림이가 시키는 대로 천천히 숨을 내 쉬었다.
“이제 진정했으니까 빨리 말해. 무슨 일이야?”
“세진이도 자세하게 모르는 것 같아. 그냥 오늘 내가 죽었다고... 많이 울기만 해서.”
담담하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다시 생각하니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나도 잘 모르겠어.”
“모르겠다니? 그걸 확실히 알아야지.”
재원이가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낸다.
“세진이도 나도 그걸 정확히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그저 누군가의 의도로 내가 죽으니 혼자 다니지 말라고 했거든.”
“누군가의 의도? 살해당한다는 거야?”
“그것도 몰라.”
기림이의 말에 재원이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장소는? 장소도 몰라?”
기림이는 학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럼 분명 재원이는 학교에 못 가게 할 테고, 세진이 혼자 위험에 빠질 테니까.
“응. 아무것도 몰라. 이번에 꾼 꿈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해.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 너무 충격이었나 봐.”
기림이의 대답에 재원이는 뭔가 결심한 듯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내일 수업시간은 어쩔 수 없으니까 빼고 그 외에는 항상 니 옆에 있을게. 너는 우리 없이는 교실 밖으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 그리고 지금도!”
“지금도?”
“내가 너 데리러 갈 테니까 전화할 때까지 집 밖으로 나오지 마.”
퉁명스러운 재원이의 말투였지만 기림이는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런 친구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 고맙고 든든했다.
“윤후는? 윤후한테도 이야기했어?”
“아니, 이제 전화하려고.”
“알았어. 그 자식도 너네 집 앞으로 오라고 해. 우리 만나서 같이 가자. 징그러운 자식들. 오늘 아예 질리도록 붙어있어 보자.”
“응.”
불안함에도 불구하고 재원이는 있는 대로 밝게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기림이는 윤후에게도 전화했다. 윤후도 재원이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놀라는 눈치 더니 곧,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먼저 집 앞으로 데리러 오기로 했다.
‘오늘의 1차 임무 끝.’
기림이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등교 준비를 시작했다. 세상 누구보다 든든하고 믿음직한 친구들의 목소리를 들으니 오늘 일어날 사고가 두렵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야! 날씨 좋다. 이제 완전 가을인데?”
학교 가는 길. 윤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니, 오히려 더 어색하게 밝은 말투로 물었다. 하지만 기림이의 귀에 윤후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기림이는 아까부터 자신의 주위에서 과장된 행동을 하며 자꾸 신경을 거스르는 재원이에게 시선이 꽂혀 있었다. 재원이는 몸을 낮추고 두 팔을 낮게 휘저으며 자꾸 두리번거리면서 기림이의 앞을 막아섰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한참 동안 재원이의 그런 행동을 거슬리게 쳐다보던 윤후가 입을 열었다.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야?”
기림이도 거든다. 재원이는 멋쩍은 듯 몸을 다시 세우더니 친구들 옆에 나란히 섰다.
“나는 일부러 그랬어.”
“일부러?”
재원이의 말에 윤후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웃는다.
“오늘 너를 타깃으로 삼은 사람이 있다면 우리가 이렇게 지키고 있으니 그 마음을 접으라고 말이야.”
재원이의 말에 기림이의 마음이 뜨끈해진다. 기림이는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은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 위해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겉으로 보기에 슬픈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이다.
“이 자식 왜 이렇게 썩은 표정을 짓는 거야?”
기림이의 표정을 살피던 윤후가 한쪽 눈을 찌푸리며 무심한 듯 말을 내뱉었다.
“어? 정말이네. 와! 너 이 자식 이렇게 썩은 표정 짓는 기술도 있고...”
친구들의 농담에 애정이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감사하고 뿌듯했다. 그래서 기림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난 처음에 오늘 내가 죽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많이 무서웠어. 그런데 위험할 지도 모르는 순간에 날 이렇게 도와주는 친구들이 있는 게 지금은 너무 고맙고 든든해. 오늘이 이제 더 이상 두렵지 않다고 할까? 비록 하는 짓이 유치하고 바보 같지만,”
“뭐라고?”
기림이의 말을 듣던 재원이가 옆구리를 주먹으로 툭 친다.
“아야야. 이 자식 학교 폭력이네.”
기림이가 괜히 죽는 시늉을 한다. 셋은 그렇게 웃으며 즐겁게 등교했다. 교실에 들어서고, 아침 자율학습 종이 울릴 때까지 재원이와 윤후는 기림이의 책상 옆에서 떠나지 않았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자율학습이 시작되는 종이 울리자 둘은 급하게 일어나서 자신의 교실로 뛰어갔다.
“쉬는 시간마다 올 거야.”
“혼자서 화장실도 가지 마.”
한 마디씩 던지고 가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보며 기림이는 한참이나 손을 흔들었다. 이거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친구들로 인해 적어도 자신은 안전할 거라는 생각이 들자, 이번에는 세진이가 걱정됐다.
‘세진이는 누가 곁에 있는 걸까? 그 예영이라는 아이?’
기림이는 고개를 저었다. 예영이에게는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어떤 방법으로 예영이를 설득해 하루종일 곁에 있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해도 여자 아이 둘이서 위험을 막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래도 기림이는 세진이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혼자가 아니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기림이는 아슬아슬한 학교에서의 오늘의 일상을 열어가고 있었다.
친구들은 약속대로 쉬는 시간마다 찾아왔다. 화장실까지 줄지어 다니는 세 아이를 다른 친구들은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정작 본인들은 아무렇지 않았다.
“지금 우리에게 심각한 건 다른 녀석들의 시선이 아니니까.”
윤후의 말에 기림이와 재원이 모두 입을 꼭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지나고 하교할 시간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윤후를 시켜 세진이 반도 한번 보고 오게 했지만 세진이도 아무렇지 않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반장!”
선생님의 말에 반장이 인사를 하고 아이들은 제각각 자리에서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갔다. 기림이는 윤후와 재원이를 기다리며 핸드폰 전원을 눌러 켰다.
드르르르륵
전원이 켜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전화가 왔다. 세진이었다.
“여보세요?”
반가운 마음에 얼른 전화를 받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보세요? 세진아!”
기림이의 목소리가 불안해진다.
“여보세요.”
다행히 건너편에서 가느다란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기림이는 놀랐던 가슴을 손바닥으로 잡으며 숨을 내쉬었다.
“세진아!”
“저기... 나 예영인데...”
예영이의 조심스럽도 불안한 목소리가 넘어온다. 수화기 건너편의 말에 놀란 기림이는 핸드폰을 다시 살펴봤다. 통화의 발신인은 분명 세진이다. 불안함이 온몸을 폭풍처럼 휩쓴다.
“어. 예영아. 세진이는? 세진이는 어딨어?”
“세진이는 돌콩이 불러서 별관 옥상으로 올라갔어. 그리고 돌콩이 너한테 전하라는 말이 있어서, 근데 내가 니 번호를 몰라서, 그런데 세진이가 핸드폰을 두고 가서 여기서...”
당황한 듯 느리게 말하는 예영이의 목소리에 기림이의 가슴이 터지는 것 같다.
“알았어! 급하니까 본론만 말해. 돌콩이 뭐라고 했는데?” “나보고 너를 데리고 별관 옥상으로 오래. 이렇게만 말하면 올 거라고 했어.”
“알았어. 미안하지만 너는 윤후와 재원이를 옥상으로 좀 보내 줄래?”
“너랑 같이 다니는 애들 말이지?”
“우리 교실로 곧 올 거야. 걔들.”
급히 통화를 끊고 기림이는 그대로 핸드폰을 들고 교실 밖으로 뛰어갔다. 본관 4층에 있는 교실에서 1층까지 미친 듯이 내 달렸다. 별관 건물로 진입하자 핸드폰이 울린다. 재원이다. 하지만 지금은 핸드폰을 받을 마음의 여유도 시간도 없었다. 기림이는 4층 건물인 별관 계단을 바람처럼 달려 올라 옥상에 이르렀다. 굳게 닫힌 철문을 쉴 새도 없이 밀어 열었다. 가을 저녁의 제법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얼굴로 몰아친다.
“세진아!”
기림이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 서서 의자에 앉은 채 꽁꽁 묶여 기절한 듯 정신을 잃고 있는 세진이를 보고 소리쳤다. 의자는 낮은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고 그 옆에는 돌콩이 서 있었다.
“가까이 오지 않는 게 좋아. 적어도 나는 너희 둘 다 해칠 마음이 없으니까.”
돌콩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세진이의 의자를 밀 듯이 살짝 손으로 쳤다.
“하지 마세요.”
기림이가 다급히 외쳤다.
“너에게는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이 아이는...”
돌콩은 슬픈 것 같기도 하고 화난 것 같기도 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뒤의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났다. 어느새 따라온 예영이가 뒤에 와 섰다.
“애들은?”
“말했어.”
기림이의 말에 예영이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근데 왜 같이 안 온 거지?’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기림이는 지금 세진이의 상태가 너무 불안해 돌콩과 세진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뭔가가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불안함을 곱씹던 기림이는 어떤 충격에 갑자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쿵
얼마나 지났을까? 기림이의 눈이 희미하게 떠진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프다. 이번에는 자신이 아까의 세진이처럼 의자에 묶여 있었다. 손목과 발목은 케이블 타이로 묶인 채 꼼짝할 수 없었다. 힘을 줘 봐도 풀리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본다. 깜깜한 가을밤이다. 불과 5미터 거리의 맞은편에 자신처럼 묶여 있는 한 사람이 더 보인다. 세진이었다.
“세진아!”
체념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세진이가 기림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든다.
“기림아! 너 괜찮아?”
“응. 나는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
“나는 예영이를 따라 상담실로 갔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게 기절해서 지금 여기와 있어. 너는?”
“나는 돌콩이 너를 불렀다고 해서, 예영이가.”
그렇게 말하던 기림이 머리에 이상한 생각이 스쳤다.
“예영이, 예영이가 이상해.”
“예영이가 이상하다고?”
세진이가 되물었다.
“너 예영이랑 같이 상담실 갔다고 했었지?”
“그러게. 예영이는 어떻게 된 거지?”
“여기 있네. 그 예영이.”
세진이의 말에 어둠 저 편에 앉아있던 누군가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기림이와 세진이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예영이었다. 그 옆에는 돌콩도 서 있었다.
“내가 조용히 둘이서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싶었는데 자꾸 나를 찾아서 말이야. 나를 찾는 사람에겐 인사를 해주는 게 예의 아니겠어?”
예영이는 평소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세진이 쪽으로 다가갔다. 그 뒤를 돌콩이 아무 말 없이 따른다.
“하지 마!”
기림이가 외쳤다. 예영이가 빙긋 웃으며 기림이를 쳐다봤다.
“뭘 하지 말라는 거지?”
“그. 그냥 아무것도. 이거 다!”
당황한 기림이가 외치자 예영이는 가볍게 무시하고는 세진이 바로 옆까지 다가섰다.
“너 레드 바이올렛이지?”
세진이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야 알아챘나 보네. 하긴 나도 네가 푸른 마녀단이라는 확증을 잡는데 시간이 꽤 걸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