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에서 온 전화

9. 마지막 임무, 그리고 편지

by 임효진

9. 마지막 임무, 그리고 편지

10시 반 정도부터 기림이는 책상 위에 핸드폰을 올려뒀다. 어차피 11시가 되어야 울릴 전화지만 혹시나 놓칠까 신경이 쓰였고, 또 한편으로는 내일의 세진이와 하는 마지막 통화에 대한 아쉬움도 조금은 있었다.

10시 42분

10시 46분

10시 48분

10시 50분

10시 51분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핸드폰의 시간을 보는 횟수도 늘어난다. 10시 57분이 되자 아예 미래폰을 손에 들고 자신의 핸드폰에서 초시간까지 확인하며 카운트 다운을 시작했다.

10,9,8,7,6,5,4,3,2,1

드르릉

정확한 시간이 되자 어김없이 전화가 왔다.

“세진아!”

기림이는 자신도 느낄 정도로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응, 기림아. 얼른 적어. 할 말은 많은데 시간이 없어.”

“알았어. 불러.”

기림이는 미리 펼쳐 둔 메모지 위에 손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볼펜을 꼭 쥔 손을 올려놓았다.

“5”

“응. 5”

“7”

“응. 7”

“그다음은 17”

세진이가 부른 숫자를 다시 확인하며 꼼꼼히 적었다. 그리고 두 아이는 둘의 숫자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기림아! 이 메모를 내일”

“화학 선생님께 드리면 되는 거지?”

“응. 맞아. 그리고 너에게 확인할 게 있어.”

“뭔데?”

“너는 이 일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고 그냥 내가 시켜서 하는 거야. 맞지?”

“그게 무슨 말이야?”
기림이는 세진이의 의도를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말은 일단 네가 이 숫자를 니 필요에 의해 사적으로 사용하면 안 된다는 거야.”

“당연하지.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어.”

“그래. 넌 그런 아이니까. 그리고 이 번호를 선생님께 드리는 것도 니 의지와 상관없는 내 결정이고.”

“니 결정이긴 하지만 나랑 아예 상관없다는 생각은 안 하는데?”

“한기림!”

기림의 말에 세진이의 목소리가 낮고 차분해진다. 기림이가 놀랄 틈도 없이 세진이가 말을 이었다.

“기림아. 잘 들어. 이 일은 내가 오랫동안 마음에 묻어둔 마음의 빚을 갚는 일이야. 이 일에 네가 연루되게 하긴 싫지만, 나에게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너를 지킬 거야. 그러니까 너는 그냥 이 일을 내가 시킨 걸로 해야 해. 그게 사실이고.”

“이 일을 하면 너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거야?”

기림이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아니, 나는 괜찮을 거야. 어쩜 더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이제 시간이 별로 없어. 내일 아침에 그 숫자를 화학 선생님께 드려. 그럼 선생님께서 너에게 편지를 주실 거야. 그걸 읽으면 너도 모든 것을 이해하게...”

“뚜”

전화가 끊어져 버렸다. 기림이는 심각하고 씁쓸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미래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눈길이 메모장으로 넘어갔다.

“괜찮겠지?”

자신보다는 세진이 걱정이 먼저 스멀스멀 올라왔다.

“괜찮을 거야. 나보다 훨씬 어른스럽고 생각이 깊은 아이니까.”

기림이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침대 이불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내일 무슨 일이 있을지 기대도 되고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생각들은 끝내 무거운 눈꺼풀에 덮이고 말았다.

아침이 되었다. 토요일이라 늦게까지 잘 수 있었지만,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에 어느 순간 기림이의 정신이 선명해졌다.

‘오늘 할 일이 있지.’

돌콩을 만나서 세진이의 메모를 전해줘야 한다. 그러고 나면 선생님이 편지를 주신다고 했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주실 편지라는 게 뭐지?’

갑자기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궁금증은 모든 나른함과 피곤함을 이겨 버렸다. 기림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아 시간을 확인했다.

7시 20분

문자가 하나 와 있다. 기림이는 핸드폰을 손에 들고 문자를 확인했다. 오늘 아침 6시경 돌콩에게서 온 문자였다.

“일어나면 바로 연락 줘. 나는 계속 기다리고 있을게.”

돌콩이 잠 한숨 못 자고 자신의 연락을 기다렸을 거라 생각하니 너무 곤히 잠을 잔 자신이 조금은 미안했다. 기림이는 그대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깼니?”

신호가 두 번을 채 다 울리기도 전에 돌콩의 목소리가 수화기 저쪽 편에서 들린다. 설렘도, 불안함도 찾을 수 없는 어쩌면 슬플 정도의 차분한 목소리에 기림이 마음도 이상하게 어두워진다.

“네. 선생님.”

“준비되면 내려와. 너희 아파트 주차장에 있어.”

“바로 내려갈게요.”

너무나 일찍 시작되는 오늘 일정의 시작에 기림이는 조금 얼떨떨했다. 하지만 돌콩에게는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니 그를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리게 하고 싶진 않았다.

잠옷 위에 얼른 트레이닝복을 겹쳐 입었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 올려진 메모장을 비닐에 한번 싼 다음 작은 가방에 넣었다. 가방을 들고 방 문을 여니 거실에 앉아있던 엄마와 바로 눈이 마주쳤다.

“어딜 가니?”
“아! 윤후가 물리 필기 좀 빌려 달라고 해서요.”

“이렇게 아침부터? 윤후는 열심히 하는구나.”

엄마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얼른 집에서 나섰다.

1층에 내려와 공용현관을 나서자마자 지난번 그 하얀 승용차에서 돌콩이 내린다. 돌콩은 기림이가 가까이 다가가자 차에 타라는 손짓을 하더니 다시 차로 들어가 앉았다. 기림이는 자꾸 무거워지려는 마음이 불안해 일부러 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자신의 몸속에 공기를 잔뜩 넣으면 기분이 풍선처럼 가벼워질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머리를 잠시 스쳐 지나간다.

돌콩의 차에 올라타자, 담배 냄새가 코를 찌른다. 기림이가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자 돌콩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 밤새 기다리는데 시간은 안 가고 애가 타더라고. 환기를 시킨다고 시켰는데 냄새가 아직 많이 나지?”

그 마음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기림이는 그냥 희미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으면 밤새 기다리지 않으셔도 됐을 텐데.”

“내가 무슨 염치로...”

돌콩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 비는 더욱 사나워져 사정없이 자동차 유리창을 때려댄다. 기림이는 가방에서 비닐로 싼 메모장을 꺼냈다.

“선생님, 이거요.”

돌콩은 아무 말 없이 메모장을 받았다. 그리고는 손에 꼭 쥔 채 한숨을 쉬었다.

“열어보지 않으셔도 돼요?”

“맞겠지...”

돌콩의 목소리에 힘이 빠진다. 돌콩은 조수석 앞의 글러브 박스를 열더니 작은 편지봉투를 꺼냈다. 슬픈 푸른빛이 도는 그 편지지에 기림이는 이유 없이 가슴이 아프다.

“이걸 주라고 했어. 세진이가.”

“세진이가 쓴 편지예요?”

“응. 네가 로또 번호를 주면 이 편지를 전해주라고 했어.”

“왜 직접 안 주고...”

이상한 듯 내뱉는 기림이의 말에 돌콩의 어깨가 움찔한다.

“정말 넌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구나.”

“뭘 모른다는 말이죠?”

기림이는 놀라서 돌콩을 쳐다본다. 돌콩의 눈빛이 차갑고 날카롭게 변했다.

“됐어. 이제 가 봐. 네가 할 일은 끝났어. 얼른 내리는 게 좋을 거야. 나랑 더 이상 엮이지 않으려면.”

돌콩은 차의 잠금 버튼을 눌렀다. 잠김이 풀리는 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크게 느껴져 기림은 도망치듯 차에서 내려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 당장 이 편지를 읽어야 해.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야?’

기림이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방으로 뛰어들어가 책상 앞에 앉았다. 마음은 급했지만 세진이의 편지가 찢어지는 건 싫어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었다. 가지런한 글씨가 세진이 같다. 읽는 것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마음 깊숙한 곳에서 슬픔이 올라온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기림아!

나 세진이. 갑자기 내 편지를 받으니 조금은 설레지? 아니라는 거짓말을 너무 표가 나게 할 니 모습이 떠올라서 나는 지금 저절로 웃음이 나. 내가 웃음이 나는 건 그런 니 모습 때문일까? 아님, 어느 순간부터 당연히 너만 생각하면 웃음이 났기 때문일까? 뭐, 이제 이런 건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

우선 미안하다는 말부터 해야 할 것 같아. 너한테는 괜찮다고 했지만, 사실 미래를 알려줘서 누군가에게 사적인 이득을 주는 건, 마녀가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일이었어. 결국, 로또 번호를 알려주는 일은 마녀의 규칙 위반이라는 거지. 이런 일을 하면 그 마녀는 세상에서 사라지게 돼 있어. 영원히.

미안해. 너한테 모든 일을 말하지 않아서. 근데 말을 하면 너를, 다른 친구들을 끊어낼 수가 없을 것 같았어.

처음에 나는 마녀인 나 자신이 참 좋았어.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내가 멋있었고, 세상을 구한다는 사명감도 있었어. 내가 대단한 사람 같았고,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마녀 일은 나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어. 잘못된 선택은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멈추게 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는 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고통이었어. 그런 일들을 몇 번 겪으며 처음에는 괴로워하다가 어느 순간 모든 일들을 합리화시키는 나를 발견한 거야. 모든 일은 결국 내 탓이 아니라고. 너를, 재원이를, 윤후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나의 책임과 고통에 무뎌지는 다른 마녀들과 똑같은 그저 스스로를 영웅이라 생각하는 그냥 어리석은 마녀였던 것 같아. 내가 스쳐 지나갔던 평범한 얼굴들이 나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고, 그렇게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늘어가면서 나는 깨달았어. 세상의 그 누구의 목숨도, 삶도 저울에 달아 비교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라는 걸.

그래서 나는 마녀를 그만두기로 했어. 그만두는 방법으로 돌콩에게 로또 번호를 알려주는 것을 선택했고. 그건 내가 그분께 빚을 갚는 방법이기도 하니까.

마녀 자격을 박탈당한 마녀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나도 정확히 몰라. 어쩌면 내 인생이 이대로 끝나는 거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그것이 나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거나 상처를 입은 누군가의 삶에 빚을 갚은 일이라면 오히려 나는 기분이 더 좋을 것 같아. 하지만 너에게는, 다른 친구들에게는 정말 미안해. 그래도 나를 오래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아직 나는 어리잖아. 이렇게 빨리 죽는 건 조금 아쉬워서. 그래서 그냥 너희 기억에서만이라도 조금, 아주 더 조금 길게 살고 싶어. 그런데 그 기억들은 모두 좋은 기억이었으면 좋겠어. 같이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던... 그런 기억만으로 나를 네 마음속에 살려두면 나는 너무 좋을 것 같아.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지만 그러다간 내 결정을 돌리고 싶어질 것 같아서 이제 끝낼래. 이제 나는 더 이상 마녀가 아니야. 드디어 무거운 짐을 벗는 나를 진심으로 응원해 주면 좋겠어. 그리고 안녕.

친구 세진이가.

기림이는 세진이의 편지를 처음에는 아주 빠르게, 두 번째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아주 느리게 제대로 읽었다. 그러고도 가슴을 쥐어짜는 고통을 느끼며 주말 내내 그 편지를 손에 쥔 채, 다시 읽을 용기를 내지 못했다.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기림이는 세진이의 편지를 책상 깊숙이 묻어 둔 채, 다시 꺼내지 않았다. 그 편지를 읽지 않는다면 세진이가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었고, 그러면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도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어느 순간 조금씩 증발되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오늘은 학교에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친구 때문에 웃는 자신을 발견했다. 기림이는 웃으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부지런히 흐르고 있고, 자신이 세진이를 잊고 웃으면 시간의 부지런함에 지는 것 같아서, 자신이 세진이를 생각했던 마음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될까 봐 웃음을 눌러 참아냈다.

윤후와 재원이에게는 거짓말을 했다. 세진이는 마녀를 그만뒀고, 자신의 정체를 아는 이곳을, 우리를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기림이는 세진이로 인한 자신의 고통을 친구들에게 나눠주기 싫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고통을 친구들이 이해 못 할 거라고도 생각했다.

학교를 마치고 나오는 길, 익숙한 하얀 승용차 한 대가 교문 앞에 서 있었다. 돌콩의 차다. 기림이는 그 차를 보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성큼성큼 차 옆에 가 섰다. 창문이 열리더니 돌콩이 보인다.

“탈래?”

기림이는 한번 고개를 끄덕하고는 차에 올라탔다. 돌콩은 어디론가 차를 몰았다. 기림이는 돌콩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을 다 아는 누군가를 만났다는 사실이 위로가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설령 그것이 돌콩이라도.

“오렌지 주스?”

저녁노을이 보이는 공원 주차장에 차를 댄 돌콩이 물었다.

“저는 그냥 물이요.”

돌콩은 고개를 끄덕하더니 차에서 내렸다. 자판기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뿌옇게 흐려진다. 입술을 꼭 깨문다. 이제는 눈물을 다 흘렸다 생각했는데 아직도 눈물이 나는 것이 이상하다.

돌콩은 차로 돌아와 앉아 기림이에게 물이 든 작은 페트병을 건넸다. 차가운 물통이 손에 닿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돌콩은 자신의 손에 있는 물을 한 모금 꿀꺽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잘 지냈니?”

그냥 의례적인 안부인사에 기림이는 또 눈물이 쏟아졌다. 목에 메어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너무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했지. 어떻게 잘 지낼 수 있겠니?... 나는 그냥 너를 한 번 꼭 보고 싶었어. 우리 이야기를 다 알고 있고, 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저도 그랬어요.”

가슴에서 꾹꾹 짜낸 말이 울음처럼 나온다. 돌콩은 화장지를 꺼내더니 기림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변명 같지만 마녀 자격을 박탈당한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몰랐어. 그리고 세진이 그 아이가 자기는 방법이 있다고, 괜찮을 거라고 했었고. 그런데 이렇게 사라져 버리니...”

여기까지 말하고 돌콩은 답답한 듯 창문을 조금 열었다. 제법 싸늘한 바람이 창문을 통해 들어온다. 울음으로 달궈진 기림이의 눈이 조금은 식는다. 복잡한 머리 속도 조금은 시원해진다.

“선생님은 어떻게 되셨어요? 그분은요?”

“가원이? 우리는 결국 헤어졌어.”

헤어졌다는 말에 기림이는 고개를 들어 돌콩을 쳐다보았다. 조금 슬퍼 보이긴 하지만 예전처럼 피폐한 눈빛은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진이가 알려준 번호가 맞았고, 나는 당첨금을 찾아 가원이를 찾아갔었어. 그리고 같이 치료받으러 떠나자고 말했지. 그런데 가원이가 싫다는 거야. 내 돈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내가 이 돈을 위해 무슨 짓까지 했는데... 화도 내고 애원도 했지만 가원이는 꿈쩍도 하지 않더군. 이해가 안 됐어. 사실 아직까지 가원이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그분은 아마도 선생님이 죄책감을 갖고 있는 것이 견딜 수 없었을 거예요.”

기림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왜? 내가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안다면 내가 그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치료를 잘 받으면 되잖아. 그러면 자기도 훨씬 행복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저도 그분의 마음은 잘 모르지만, 세진이가 그랬어요. 죄책감이 무거운 짐이라고, 그것을 벗어내고 떠나는 자신을 응원해 달라고. 그것이 죽음이라도 말이죠. 그분은 지금 충분히 건강한 마음으로 살고 있고 선생님이 그 사건에서 완전히 벗어나길 바라는 것 같아요.”

“그런 말은 했었어. 내가 죄책감 때문에 자신에게 집착한다고.”

돌콩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나도 모르겠어. 내가 가원이를 사랑해서 치료하고 싶은지, 아니면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치료를 시켜주고 싶은지. 일단 치료부터 하고 나면 내 남은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서둘렀는데.”

“문제는 벌써 알고 계시네요. 그분은 치료보다 선생님의 답이 듣고 싶은 것 같네요. 선생님께서 먼저 선생님의 마음을 알고 정리하신 다음에 그분을 설득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돌콩이 고개를 들어 기림이를 쳐다본다. 눈빛이 따뜻하다. 그런데 기림이는 그 눈빛이 마음 아파 고개를 돌렸다.

“기림아!”

“네.”

“혹시 푸른 마녀단에서 찾아왔었니?”

“아니요.”

기림이의 눈이 동그래진다.

“세진이가 어떤 처벌을 받고 어떻게 됐는지 몰라. 나도 너무 궁금해서 그 아이 생활기록부를 찾아보고 부모님께 전화도 했었거든. 그런데 없는 번호더라고. 집도 이사를 했는지 찾아가도 없고... 근데 보름 전인가 푸른 마녀단 사람들이 찾아왔었어. 세진이의 규칙 위반에 내가 엮여 있었으니까. 근데 그 아이가 그동안 내가 협박을 하거나 행패를 부린 사실은 전혀 말하지 않고 자신이 그냥 그렇게 해 주고 싶어서 그랬다는 편지를 남긴 모양이야. 덕분에 나는 무사할 수 있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마녀가 아니라서 마녀의 규칙은 적용받지 않는 것 같았어. 너도 별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조심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그때 세진이가 준 편지는 사과 편지였어요.”

“사과 편지?”

“증거로 남길 사과 편지요. 나를 속이고 이런 일을 벌여서 미안하다고도 쓰여 있었거든요.”

“허!”

허탈한 듯 웃는 돌콩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런 아이한테 나는 무슨 짓을 한 걸까?”

“선생님.”

“응”

“그때 세진이가 선생님의 그분을 만났었잖아요. 그분과 무슨 대화를 했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세진이는 선생님과 그분이 다시 이어질 거라고 믿는 것 같았어요. 우리 세진이의 생각을 믿어봐요.”

“그래. 내가 뭘 하면 될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아. 고마워. 어린 친구.”

둘은 살짝, 하지만 슬프게 웃고는 지는 해가 하늘이라는 도화지에 뿌리는 마법 같은 불꽃놀이를 한참을 보고 그렇게 집에 돌아왔다. 저렇게 화려한 마지막을 보여 주고 오늘을 끝내는 해가 너무도 처절해서 더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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