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제 10장

by 임효진


죽은 줄 알았던 도운이 돌아왔다. 장희는 자신이 무언가 잘 못 본 거 같기도 하고 너무 놀란 마음에 아이들을 품에 안은 채 눈만 끔뻑였다. 도운은 그대로 가만히 서서 장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박씨가 민망한 듯 입을 열었다. 도운이 성큼성큼 장희에게 걸어왔다. 손을 내민다. 장희는 그 손을 잡지 못하고 대로 고개를 돌렸다. 혼자서 땅에 손을 짚고 일어났다.

“니가 왜 이러고 살아?”

도운이 꾹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터져 나온 것 같은 그 말 한마디에 장희는 가슴이 무너진다. 어디에 그렇게 많은 눈물이 숨겨져 있던 것인지 눈물이 펑펑 쏟아진다. 자신의 눈물을 도운이 보지 못하게 몸을 돌려 우는 아이들을 꼭 껴안는다.

“채훈이랬지야? 아저씨 기억나냐?”

채훈이가 박씨를 빤히 쳐다본다. 그러더니 땅에 나뒹구는 사탕을 아쉬운 듯 쳐다본다. 사탕에는 흙이 잔뜩 묻어있다.

“그랴. 쩐번에 사탕 사먹으라고 돈도 줬는디 사탕 사먹었디야? 아저씨가 또 사탕 사 줄테니 잠깐 따라갈테냐?”

채훈이가 장희를 한번 쳐다본다. 장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채훈이도 박씨를 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박씨가 채훈이 손을 잡자 채현이도 박씨에게 안아달라고 손을 뻗는다.

“내가 이 아그들 쪼 앞에서 사탕 한 개씩 사 먹이고 올 테니 두 분은 말씀들 나누고 계시게.”

박씨는 그렇게 한 팔로는 채현이를 안고 또 다른 한 손은 채훈이 손을 잡고 나간다.

“잠시 저기 저 방에 들어가 있으시오. 물이라도 떠 갈테니.”

도운과는 눈도 맞추지 않고 장희는 손짓으로 방을 안내하고 부엌으로 들어가 버린다. 도운은 장희가 일러 준 대로 방에 들어가 앉았다. 부엌에 들어간 장희는 허겁지겁 옷과 머리를 가다듬었다. 쟁반에 물을 떠서 방으로 들어간다. 방에는 도운이 앉아 침울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거...”

장희는 고개를 숙인 채 쟁반을 도운쪽으로 살며시 밀어 놓는다. 도운은 그런 장희를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미안하오.”

“이게 어찌된 것이오? 죽었다 들었는디...”

“전쟁이 터지고 우리 부대는 바로 전장에 투입됐소. 거기서 크게 다치고 포로로 잡혀 북한군에게 끌려 다녔소. 운 좋게도 잡힌 부대 북한군 대위가 외가 쪽 먼 친척이어서 치료도 받고 이리 살아남을 수 있었소.”

그제야 장희는 고개를 들어 도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샌님처럼 말갛던 얼굴이 조금은 까무잡잡해졌다. 고생을 한 탓인지 세월의 탓인지 눈 가에 주름 자국도 살짝 보인다. 장희의 눈길은 이마의 상처로 향했다가 다시 도운의 손을 향해 간다. 손등에도 상처가 있다. 저 상처는 장희도 아는 상처다. ‘지옥 같던 전쟁 속에서 얼마나 더 많은 상처를 몸에 새기고 온 것일까?’ 장희는 도운의 고통과 세월을 자신도 같이 느끼는 것 같아 몸이 저릿해 왔다. 다시 고개를 숙이는 장희를 보며 도운은 말을 이어나갔다.

“2년 전 휴전이 정해지며 마지막 포로 교환이 있었는데 그 때 남으로 내려올 수 있었소. 내려오니 부모님은 다 돌아가시고 안 계시더군. 동생 도현이만 작은 댁으로 몸을 피해 무사했고. 어르신이랑 정철군 이야기는 전해 들었소. 그리 가셨다니 정말 허망하고 원통하더군. 내 정혼자 소식을 몰라 2년을 알아보고 다녔소. 우리 집 박서방이 우연히 그 댁에서 일하던 김씨를 만나 여기 나주로 내려온 것을 알았지.”

정혼자. 도운은 장희를 정혼자라 불렀다. 장희는 도운의 ‘정혼자’라는 말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 말은 한때는 행복한 설렘이었지만 지금은 상처뿐인 추억이 되었다. 이제 장희는 더 이상 그의 정혼자가 아니다.

“미안허요. 나는... 나는 그 짝이 죽은 줄로만 알았지라. 그래서...”

장희가 울음을 꿀꺽 삼킨다. 도운이 그런 장희를 안쓰럽게 바라본다.

“오면서 그간의 사정은 이모부댁 박씨에게 대강 들었소. 이제 다 됐소. 괜찮아. 괜찮을 거요. 내가 다 괜찮게 만들거니...”

장희의 울음이 터졌다.

“그러게 왜 이제 왔소? 응? 왜 얼른 안 오고 이제 왔냔 말이요. 나는 이제 어떡하라고?”

끅끅 거리며 우는 장희의 어깨를 도운이 가만히 감싸 안았다. 도운의 얼굴에도 눈물이 흐른다. 그렇게 둘은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감정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장희는 도운의 품 안에서 몸을 빼냈다. 자신을 쳐다보는 도운을 마주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아 도운이 앉은 뒤쪽 벽을 입을 꼭 물고 바라본다.

“가셔라, 이리 살아있는 거 봤으니 나는 됐소. 힘들게 살아 돌아왔으니 이제라도 행복하게 사시오.”

“같이 갈 것이오.”

“나는 같이 못 가오. 자식들이 있고 연희도 여기서 공부하고 있소.”

“내가 다 돌볼 것이오. 연희 처제 공부도 시키고, 아이들도 내 자식이라 생각하고 키우겠소.”

장희는 고개를 들어 도운을 똑바로 봤다.

“바보 같은 소리 마시오. 오라버니가 뭣이 모자라 나 같은 거 데리고 살면서 남의 자식을 키운단 말이오. 이제 다른 좋은 사람 만나서 나는 잊고 사시오.”

‘오라버니’

한참 어릴 때는 그를 오라버니라 불렀었다. 정철도 오라버니, 그 벗인 도운도 오라버니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자라 둘 사이에 혼담이 있다는 것을 안 뒤로는 장희는 절대로 그를 오라버니라 부르지 않았다. 오라버니는 친동기간인 정철 하나뿐이고 도운은 그의 남편 될 사람이었다. 오라버니라는 호칭을 쓰면 도운이 자신을 계속 친한 벗의 어린 동생으로 대하고, 여자로 보지 않을까 싶어 장희는 절대로 오라버니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었다. 그런데 장희가 쓴 ‘오라버니’라는 이 호칭이 둘 사이를 순식간에 과거로 돌려놓아 버렸다.

“지금 입장이 곤란한 것을 알아. 아이들도 있고.”

말을 하는 도운의 눈빛이 장희의 손으로 향한다. 아까 넘어지면서 바닥에 쓸렸는지 손바닥에 돌에 찍혀 피가 나 굳어 있다. 도운은 그 손을 잡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레 닦으며 계속 말을 했다.

“니가 이렇게 살지 않도록 내가 무슨 짓이라도 할 거야.”

손수건으로 상처를 묶는다.

“돌아가. 나 이제 오라버니 안 볼랑께.”

장희가 자신의 손에 묶어진 손수건을 처연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나는 이제 다시는 널 놓고 떠나지 않아. 두 번은 안 해.”

단호한 도운에 말에 장희는 가만히 그를 바라본다. 도운의 눈빛은 따뜻하지만 강했다. 정말 그의 말대로 도운만 믿으면 되는 것일까? 장희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그럴 리가 없다. 임한택의 집에서 채훈이를, 채현이를 놓아 줄 리가 없었다. ‘그럼 나는?’ 장희는 생각했다. ‘나는 이제 행복해 질 수 없는 것일까?’ 아니다. 장희는 도운 없이도 행복했었다. 그 행복을 준 것이 자신의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을 놓고 도운 곁으로 간다면 자신이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장희는 잘 알았다. 선택을 해야 했다. 아니,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도운이 장희에게 있어 자신만큼 소중한 존재라면, 아이들은 자신을 걸고서 지켜야 하는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였다. 이제 나는 여자로써 삶은 접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저 아이들의 엄마일 뿐이다. 장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끝났어. 나는 남편이 있는 여자여. 자식도 있고. 오늘은 잠시 다툼을 한 것이제, 사실 평소에는 사이도 좋당게. 오라버니의 친구고, 가족같은 사이라 오늘은 이리 만난 것이지만, 다시는 찾아오지 말랑게. 동네 사람들 볼까 무서우니.”

일어서며 냉정하게 내뱉는 장희의 말을 도운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듣고 있다. 그러더니 일어나 장희의 손을 가만히 잡는다.

“니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흔들리지 않아. 이제부터 보여 줄거고. 너는 나를 믿게 될 거야.”

밖에서 아이들의 소리가 들린다. 박씨가 채훈이, 채현이를 데리고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도운이 계속해서 말했다.

“일단 나는 장성 집으로 돌아가 이것저것 정리해 다시 여기로 올 거야. 우리 같이 생각해보자. 너와 아이들을 데리고 여기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말을 끝낸 도운은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 사탕을 물고 기분 좋은 채훈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따라 나온 장희를 본다.

“이 녀석은 정철과 똑같이 생겼는 걸.”

웃으며 말하는 그의 해맑고 말끔한 미소에 장희는 자기도 모르게 입 끝에 미소가 번진다. 하지만 내색 않고 가만히 아이를 부른다.

“채훈아”

채훈이가 조르르 뛰어와 장희에게 안긴다. 장희는 그런 채훈을 부서져라 꼭 안았다. 박씨가 성큼성큼 다가와 채현을 안겨주고 두 남자는 다시 문 밖으로 나섰다.

“며칠만 더 기다려.”

도운은 그렇게 말하고 박씨와 돌아갔다.

일주일이 지났다. 그 사이 임현택은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다. 엊그제 함평댁이 들러 임현택의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그 패물을 몽땅 팔아 노름판에 간 모양이었다. 며칠 동안 잠도 안자고 몇 번을 땄다가 잃었다가를 반복하다가 그 많은 돈을 몽땅 써버렸다고 한다. 그리고는 술에 거나하게 취해 논두렁에 쳐 박혀 있는 것을 동네 사람들이 발견했는데 굴러 떨어지면서 그런 것인지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고 했다.

“한짝은 완전히 부러졌고, 다른 한짝은 금이 짝 갔당게.”

그렇게 말하며 함평댁은 신이 나서 웃었다.

“일단 두 다리가 그러니 한동안 노름판은 못 가겠제.”

“그라지라.”

“나는 말이여, 그 인간이 노름판에 못 가는 것도 너무 좋고, 다리를 두짝 다 다쳐서 기브수인가 뭣인가를 하고 방에 그라고 누워 있는 것이 참말로 너무 꼬시당께. 내가 이런 꼴을 보려고 그 인간이랑 여태 그라고 살았는가 싶소.”

“성님 말씀하는 것이 참 우습소.”

“그나저나 자네는 그 패물들이 다 어디서 난 것이어? 중요한 것 아니여?”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물려준 것이지라.”

이전 정혼자에게 받은 것이라는 말을 하기가 참 곤란해 대충 둘러댔다.

“아따... 참말로 못돼 먹은 인간이네... 그 소중한 것을 아이고.. 벼락을 맞을 인간. 하늘이 벌을 줬는갑소. 그라니 그리 다쳐 누워있제.”

“그러게 말이오.”

“그것들이 아마도 읍내 전당포에 다 있을 텐디. 돈만 있으면 다시 찾아와야 쓰겄구만.”

“전당포라 그렸소?”

장희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전당포에 가면 도운의 패물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떡을 팔러 다니면서 자리를 봐 뒀기에 어딘지 알고 있다.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받아 썼다더라고. 어머니 유품이라면 찾아 와야제. 그라제.”

함평댁은 그리 말하고는 이제 누워 있는 인간 점심 줘야 한다고 집으로 가 버렸다.

장희는 함평댁이 가자마자 이불장에서 돈 봉투를 꺼냈다. 그리고는 자고 있는 채현이를 들쳐 업고 마당 귀퉁이에서 놀고 있는 채훈이 손을 잡고 읍내로 향했다.

전당포는 2층에 있었다. 그런 곳은 처음이었다. 감옥같은 창살 안에 들어가 있는 주인에게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 쪽에서 먼저 말을 건내왔다.

“뭣을 맡기러 온 것인지, 찾으러 온 것인지 말씀하시오.”

“찾으러 왔지라”

“찾는 물건이 무엇이오”

“반지랑 목걸이랑 옥가락지. 뭐 이것저것 있소.”

“혹시 이것인가?”

주인이 장희의 패물 주머니를 통째로 꺼내 보여줬다.

“그거 맞소.”

“이건 안 된당께.”

주인의 말에 장희가 놀란 눈을 했다.

“왜 안되어라? 돈도 가지고 왔는디.”

“이것은 맡긴 사람이 다시 찾으러 올 테니 아무한테도 넘기지 말고 잘 보관하라고 준 것이오.”

장희는 헛웃음이 났다. 딴에 양심은 있었나보다 싶었다.

“임현택이라는 사람이 맡겼지라? 내가 그 물건들 주인이니 돌려주시오.”

“아... 그 짝이 그 둘째 부인인갑소.”

아무렇지도 않게 둘째 부인이라 말하는 주인이 야속했다. 하지만 싫은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임현택이 받아간 돈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주인이 부르는 값은 생각보다 높았다. 봉투의 돈을 다 털어야 그 물건들을 모두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안 장희는 일단은 반지만 찾기로 했다.

“다른 물건들은 아무한테도 팔지 마시고 그대로 냅두시오. 내 꼭 다시 찾으러 올테니께.”

그렇게 주인에게 몇 번이나 다짐받는 장희였다.

반지를 찾았지만 손에 달랑 들고 오기도, 아무렇게나 주머니에 넣기도 참 곤란했다. 갑자기 뭔 바람이 분건지 장희는 그 반지를 손가락에 끼었다. 제대로 끼어보지도 못하고 잃어버릴 뻔 했던 반지가 다시금 소중해 장희는 엄지 손가락으로 몇 번이나 그 반지를 쓰다듬었다.

전당포에서 내려와 집을 향해 걷는데 등에 업은 채현이가 칭얼댔다. 채훈이도 다리가 아픈지 징징거렸다.

“그려. 힘들지야? 우리 저그 빵집에라도 갈까?”

좋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채훈이를 한번 보고 빵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데 바로 앞에 도운이 서 있었다.

“오라버니”

“여기서 만나는군.”

순간 반가워 자기도 모르게 장희는 도운을 불렀다. 며칠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간 그가 일주일째 연락이 없으니 기다린 것도 사실이었다. 허언을 하지 않는 도운의 성품을 알기에 반드시 다시 올 거라는 것을 알았고, 다시 찾아온 그를 어떤 말로 또 거절해야할지 수 백번도 더 고민을 했었다. 그러나 그런 고민을 하는 시간조차 그리움과 기다림의 시간이었음을 이 만남으로 단번에 장희는 알았다.

“응. 볼 일이 있어서...”

“빵집에 간다더니 나도 가도 될까?”

도운은 채훈을 향해 질문했고, 채훈은 그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안아달라는 듯이 도운에게 손을 뻗었다. 도운이 번쩍 안아 들자 신난 채훈은 연신 ‘와’,‘와’ 소리를 질러댔다. 채훈을 안은 도운이 앞서고 장희는 한숨을 포옥 내 쉬고는 채현을 업고 그 뒤를 따랐다. 네 사람은 마치 가족처럼 빵집 테이블에 둘러 앉았다.

“여기 카스테라하고 우유 두 잔 주세요.”

주문을 한 도운이 가게를 둘러보더니 빙긋 웃고 장희에게 말했다.

“빙수도 있네. 우리 빙수 먹자.”

장희는 피식 웃었다. 빙수. 오빠를 따라 빙수 집에서 도운을 만났었지. 그 때의 설렘이 지금도 온 몸 가득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왜 그 때 빙수 가게에서, 정철이 널 데리고 나오기로 했는데 한참이 지나도 안 오는거야. 정철 그 친구가 시간을 지키지 않을 친구가 아닌데... 나중에 결혼 날짜 잡고 나니 술을 한잔 하자더군. 그러더니 그날의 이야기를 하더군.”

아! 기억난다. 그 때 오라버니는 장희를 데리고 가게 주변을 한참동안 맴돌았었다.

“참말로, 그 때 왜 그랬대?”

아무렇지도 않게 묻는 장희의 얼굴을 빤히 보던 도운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날 장희 니가 너무 이뻐서...”

“잉? 그게 무슨 소리여?”

“너무 좋아서 예쁘게 꾸미고 나온 동생 마음을 내가 알아챌까 싶어 그러면 손해 보는 것 같아 일부러 시간도 늦고, 몇 바퀴 돌면서 모습도 흐트러뜨리며 진정도 시킨 거라던데.”

“무슨... 뭣이 좋아서래. 아니랑께.”

장희가 손을 내젓자 그 손을 바라보던 도운의 눈이 순간 반짝 빛난다.

‘아차, 반지’

장희는 그 손에 도운의 반지가 있음을 깨닫고 얼른 손을 테이블 아래로 숨긴다. 반지를 빼려는데 손가락이 굵어진 탓에 꽉 끼어버린 반지는 좀처럼 빠지질 않는다.

빵과 빙수가 나왔다. 채훈이 목이 마른 듯 우유를 벌컥벌컥 마시자 입술 위로 수염같은 우유자국이 생긴다. 도운은 웃으면서 채훈의 하얀 수염을 지워준다. 장희는 카스테라 조각을 조금 떼어 채현의 입에 넣어준다. 배가 고팠던 것인지 날름날름 잘 받아 먹는다. 그 모습을 도운이 가만히 보고 있다.

“그 아이가 채현이지? 아기 새처럼 잘 받아먹네. 눈이 참 선하게 생겼다.”

그러다니 채훈의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토닥거린다.

“아저씨가 너희 외삼촌 친구야. 이제부터 우리 자주 보자. 아저씨가 맛있는 것도 많이 사 주고 많이 예뻐해 줄게.”

장희는 그렇게 말하는 도운을 쳐다봤다.

“오라버니, 이제 이러지 말랑께.”

“장희야. 나도 그간 생각을 많이 했어.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니가 부담스럽고 힘들겠다는 생각도 했고.”

“그려. 부담스럽당께.”

“너한테도 이것저것 결정하고 생각할 시간을 줘야겠다는 마음이 들더라고. 하지만 또 그동안 니가 힘든 일을 겪는 것은 더 싫고.”

물을 한잔 들이키고 도운은 말을 이었다.

“나 여기 읍내에 집을 얻었어. 광주 학교에 시간강사 자리를 얻었고. 일주일에 두 번은 광주에 다녀와야 해. 나머지 시간은 여기서 너를 보며 지낼 거야.”

“오라버니가 그래도 난 변하지 않을거여.”

도운은 장희의 단호한 말에도 아무렇지 않은 눈치였다. 다정하게 웃는 눈길은 장희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로 향했다.

“니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냥 이대로 지내지 뭐. 니가 원하지 않으면 이렇게 오라버니로 니 옆에 있을거야. 그런데, 가라고는 하지 마. 너를 못 보고 지낸 5년은 나한테 죽은 시간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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