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제 11장

by 임효진

겨울도 끝나간다. 하지만 아직도 제법 바람이 매섭다. 장작 타는 냄새가 난다. 방학이라 집에 돌아온 연희가 ‘언니는 오랜만에 늘어지게 자’라고 하더니 새벽부터 일어나 아궁이 가득 장작을 쑤셔 넣은 탓인지 아랫목이 뜨끈뜨끈하다. 두 아이는 더운지 이불을 걷어찬 채 배를 내놓고 이리저리 흩어져 자고 있다. 등은 당장이라도 녹아내릴 듯 따뜻하고 코는 찬 공기에 시리다. ‘이게 겨울이지’ 생각하며 기지개를 켠다. 오랜만에 마음이 노곤노곤하다.

“이불 덮고 자야지.”

장희는 조심스럽게 일어나서 아이들을 바로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고 다시 그 사이에 가만히 누웠다. 떡을 만들러 나가야 하는데 날씨가 추우니 일어나기가 싫다. 그러다 도운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몸을 벌떡 일으켰다. 떡을 찌려고 어제 밤에 미리 불려놓은 쌀을 가지고 부엌으로 가니 연희가 건너방에서 따라 나온다.

“언니, 이제 나갈 것이여?”

“슬슬 준비해 나가야제.”

“오늘은 아이들 데리고 나가지 말어.”

“무슨 소리래? 어쩌려고?”

“나가 나이가 이제 몇인디 조카 둘을 못볼까봐 그려?”

“너는 공부를 해야 안허냐?”

“반나절만 있으면 언니 오는데 뭘. 공부는 저녁에 해도 되고...”

말을 하는 연희의 눈꼬리에 웃음이 번진다.

“오늘은 아그들 없이 도운 형부랑 둘이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랑께.”

“오메.. 그런 거 아니래도 참말로 야가 왜 이런다냐? 누가 형부여?”

말은 그렇게 해도 장희의 입가에 웃음이 퍼진다.

요즘은 떡을 팔러 나가면 읍내에서 항상 도운을 만난다. 일주일에 두 번 광주에 갈 때를 빼고는 도운은 매일같이 나와 장희가 떡을 다 팔 때까지 아이들과 놀아주며 기다린다. 도운의 집이 근처에 있어 비가 오거나 추운 날은 아이들은 그 집에서 장희를 기다리곤 했다. 떡이 다 팔리면 넷은 가족처럼 국밥을 사 먹고 장도 보곤 했다. 하지만 장희는 한 번도 도운의 집에 들어가 본 적은 없다. 들어가는 것은 도운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 같아 아이들을 데리러 갈 때도 대문 밖에서 조용히 아이들을 부르곤 했었다.

도운이 살아 돌아온 것을 안 연희는 반색했다. 당장 도훈을 따라가라고 성화였다.

“아기들이야 함평댁한테 맡기면 잘 키워주겠제. 어느 정도 커서 어매를 찾으면 그 때 데리고 와 같이 살아도 되는 것이고. 근디 언니 인생은 어쩔 것인가? 저리 형부가 돌아왔는디, 이제 언니도 행복하게 살아야 안 쓰겄소?”

연희의 말에 마음이 혹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장희는 절대로 아이들을 떼어 놓고 도운에게로 갈 수 없었다. 함평댁이 좋은 사람인 것은 맞지만 임현택 같은 아버지와 계모 사이에 아이들을 버리고 갈 수 없었다. 임현택은 그렇게 도운의 패물을 강탈해 나갔다 크게 다친 뒤로 볼 수 없었다. 가끔 들르는 함평댁의 말을 듣자하니 요새는 마음을 좀 잡았는지 문방구에 앉아 주변 장사치들과 바둑두는 재미에 흠뻑 빠졌다고 했다. 바둑을 두느라 문방구 장사가 뒷전이긴 하지만 돈을 빼가지 않으니 그럭저럭 가족들 입에 밥은 들어간다고 했다.

“지도 낯짝이 있으면 여기는 못 오제, 참말로.”

함평댁이 그 패물이 어머니의 유품이라고 임현택에게 말했다고 했다. 지금은 돈이 없어 당장 찾아줄 수는 없지만 아마도 마음 속에 죄 지었다는 생각은 하는 것 같다고.

“사실 그 사람이 한량이긴 해도 그렇게까지 나쁜 인간은 아니니께.”

적어도 함평댁에게 있어 임현택은 착한 사람인가 보다. 하긴, 남편이고 아이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나쁜 인간으로 여긴다면 어찌 한 집서 그렇게 붙어 살 수 있을까? 함평댁이 참 선하고 좋은 사람이라 생각은 하면서도 남편을 그리 믿고 살아야 하는 여자들의 운명이 그렇게 어리석다는 사실이 참 기가 차고 슬펐다. 함평댁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아이들을 그런 그에게 맡긴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 죄를 짓는 일이다. 또, 그럴 리는 눈꼽만큼도 없지만 임현택네 집에서 아이들을 장희에게 보내 준다고 해도 아이들을 데리고 도운에게 가는 것은 도운에게 큰 죄를 짓는 마음이었다. 지금은 괜찮다고 해도, 저 아이들과 같이 사는 것이 어느 순간 도운에게도 큰 부담이 될 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장희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또 다른 막연한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이 생길 때는 그것을 얻기는커녕 도로 무언가를 더 잃었던 과거가 장희의 발목을 잡았다. 그저 장희는 지금 이대로가 행복했다. 아이들과 함께 지내며 도운과 마주보며 웃을 수 있는 지금이 정말 행복하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면서도 도운에게는 냉랭하게 대했다. 도운을 보내줘야 한다 생각하는 한편, 그가 없는 미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장희였다.

연희의 말대로 아이들은 연희에게 맡기기로 하고 떡은 아주 조금만 쪘다. 아이들과 연희, 셋이서 점심으로 먹을 밥과 국도 단단히 준비해뒀다. 늦을지도 모른다는 장희의 말에 연희는 다 안다는 듯 활짝 웃으며 오늘 안 와도 된다며 등을 떠 밀었다. 장희는 장희대로 얼른 떡을 팔고 도운과 둘이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시면 좋겠다는 기대를 하며 자전거를 타고 집에서 나섰다. 낡아서 끼익거리는 자전거 소리가 마치 노래소리처럼 흥겹다. 겨울이라지만 햇살이 제법 따뜻하다. 장희는 읍내 장터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자전거를 밟아 나갔다. 입구에 도착하자 자전거에서 내려 자전거 손잡이를 손에 잡고 끌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면 어느샌가 도운이 다가와 자전거를 대신 잡아 끌곤 했다. 그런데 왠일인지 오늘은 도운이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다 그대로 자전거를 끌고 채소가게까지 가서 그 앞에 자전거를 세운다. 서운한 마음과 걱정이 교차해 표정이 어둡다. 얼마 전부터 채소가게 주인이 평상 한 자락을 내어주며 여기서 떡을 팔아도 좋다고 했다. 처음에는 주인 인심이 좋다고 생각하고 고마워했는데 알고 보니 광주로 유학간 채소 가게 아들이 도운의 제자였고, 그것을 알게 된 도운이 따로 부탁을 넣은 것이었다.

“오늘은 쪼까 늦었구만.”

“야. 어쩌다 보니 늦잠을 잤으라우.”

채소가게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바구니를 옮겨 떡을 펼친다. 떡에서는 아직까지 모락모락 연기가 올라 왔다.

“이 집 떡은 일찍 안 오면 없더라고.”

기다렸다는 듯 알록달록한 한복을 곱게 입은 중년의 여인이 떡을 사 간다. 그 뒤로도 몇 명의 손님이 더 다녀가고 얼마 되지 않는 떡이 거의 다 팔렸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도운은 보이지 않았다.

‘날씨가 추워 감기라도 든 것이제.’

감기 탓을 하면서도 몇 달째 냉랭한 자신의 모습에 도운이 상처받고 포기했나 싶어 한편으로는 가슴이 철렁한다.

‘이제 와 마음 접고 떠났으면 어쩔 것이여. 잘 된 것이제. 조장희. 너도 이제 정신 차리고 새끼들하고 잘 살 궁리를 해야지.’

혼자 궁시렁거리면서도 아쉬운 마음에 눈은 나타나지 않는 도운을 찾는다.

‘정말로 감기가 심하게 들었으면 어쩐디야? 이 동네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나 뿐인디.’

도운이 말없이 가버렸을 리는 절대 없고, 아픈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저런 걱정들이 자리에서 못 일어나고 끙끙 앓고 있는 도운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에 미치자 장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벌써 마치나벼?”

채소가게 주인 여자가 말을 건다.

“네. 일찍 들어가려구요.”

장희는 떡 한조각을 빼 놓은 채 남은 떡을 곱게 싸서 채소가게 주인에게 주었다.

“이거 드시랑께요.”

“오메, 번번히 뭐 이런걸... 채훈어메 온 뒤로 우리는 떡도 이리 얻어먹고 참말로 좋당께. 우찌 이리 젊은 사람 솜씨가 좋은지.”

“지가 항상 감사하지라.”

“그라고 보니 오늘은 수요일도 아닌디 선상님이 안나오셨네.”

“그러게요.”

“채훈 어메한테도 암말 없었나 보네.”

“예.”

“그럴 사람이 아닌디 어디 아픈 것 아녀?”
정말로 아픈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짠하다.

“내일 또 뵙지라우.”

서둘러 인사를 하고 바구니를 자전거에 얹어 묶었다. 아직도 따뜻한 떡 한 조각은 식을까 싶어 외투 안주머니에 꽁꽁 싸 품었다. 자전거를 끌고 조심스레 도운의 집을 향해 갔다. 도운과 갔던 빵집, 도운이 머리핀을 사 온 가게, 도운과 함께 먹었던 국밥집. 온 거리가 도운으로 꽉 찬다. 지금 장희의 머리 속에는 도운밖에 없다.

책방 모퉁이를 돌아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작은 골목이 나오고, 한번 더 오른쪽으로 꺾으면 도운의 집이다. 자전거를 끌고 가기에는 조금 좁은 골목이라 일단 서점 앞에 자전거를 세워두었다. 모퉁이를 돌아 도운의 집이 있는 오른쪽으로 들어가 작은 골목에 섰다. 골목 입구에서부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하하 웃는 도운의 목소리다. 그의 목소리와 함께 밝은 여자의 목소리도 들린다. 장희는 얼른 열려있는 집 대문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두 남녀가 웃으며 지나간다. 필히 도운의 집에서 함께 나온 것이리라. 문 밖으로 살짝 고개를 내밀고 그 둘의 뒷모습을 보았다. 잘 어울리는 다정한 연인의 모습이다. 잠시 멈춰 선 여자는 도운의 팔에 팔짱을 낀다.

“큰길까지만 가요.”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여자에게 팔을 내어주며 도훈이 답한다.

“그럴 수 있나? 버스 타는 건 봐야지.”

길게 내린 생머리가 등 중간까지 흘러내리고 반짝이는 애나멜 구두에 밤색 코트를 입었다. 늘씬한 뒷모습만 봐도 그 젊음과 생기가 느껴지는 아름다운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여자랑 집에 같이 있었어.’

갑자기 배신감이 든다.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가도 설령 그렇다 해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일이라고 열심히 생각했다. 둘의 모습이 골목에서 사라지고 나자 장희는 서둘러 골목을 벗어나 자전거를 세워둔 책방 앞으로 왔다. 가게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 나름대로 단정하게 꾸미고 나오긴 했지만 흐트러진 머리, 까칠한 피부, 다 낡아 헤진 저고리 치마. 영판 없는 동네 아낙이다. 어쩌면 당연하다. 이런 나를 보다가 저런 젊고 예쁜 처녀를 보면 흔들리는 것이... 도운에게는 저런 예쁜 여자가 어울린다. 그는 멋진 사람이니까. 그래도 마음 아프다.

‘예전의 나도 그와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자전거를 끌고 터벅터벅 걸어간다.

‘여자가 생겼으니 이제는 떠나겠지?’

그리 생각하자 눈에 눈물이 고인다. 고인 눈물로 눈이 마구 흐려져 길도 잘 보이지 않는다. 눈을 깜빡해 눈물을 떨어뜨리지만 또 금새 눈물이 앞을 가린다. 아무리 이를 꽉 물고 울음을 참으려고 해도 한번 터진 울음은 쉽게 멈추질 않았다. 다리도 후들거리고 몸에 기운이 빠져 비틀거리다 길에 세워진 리어카에 자전거를 들이박고 자전거와 함께 그대로 넘어졌다. 무릎이 깨졌는지 옷에 피가 묻어 나오는 데 다리에는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가슴에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느껴져 장희는 가슴 언저리 옷자락을 쥐어 잡는다. 숨이 턱턱 막힌다. 얼른 일어설 생각을 못하고 그리 앉아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고 있는데 누군가 팔을 잡아 일으킨다. 다리에 묻은 피를 보고는 헉 놀라더니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묶는다. 옷을 털어주고는 자전거를 세워 잡는다. 도운이었다.

“많이 다쳤어. 집에 가서 약이라도 바르자.”

팔을 잡는 도운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는 장희는 도운을 째려봤다. 아직도 남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이렇게는 집까지 가기 힘들어. 소독도 하고 약도...”

“왜 왔어?”

도운의 말을 끊고 버럭 화를 낸다.

“아까 책방 앞에 니 자전거가 있기에...”

‘아! 아까 세워둔 자전거를 봤구나.’ 그렇다면 그 골목 안에 장희가 숨어있었다는 것을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보고도 그 여자를 데려다 주러 간 것이다. 도운의 마음은 변했고, 뒷북을 치는 듯한 자신의 행동이 들켰다고 생각하자 부끄럽다. 그 부끄러움을 덮기 위해 더 차갑게 모진 말을 내 뱉는다.

“같이 가 버리지 왜 왔냔 말이여.”

“오해가 있는 것 같군.”

사춘기 소녀 마냥 투정을 부리는 것 같은 장희의 말투에 그녀를 돌려 세운 도운은 가만히 장희를 바라본다. 그의 표정 끝에는 미소가 묻어난다.

“한 집에서 나오는 남녀를 봤는디 오해는 무신...”

“너 세영이 기억 안 나?”

“세영이?”

아. 익숙한 이름이다. 세영이는 도운의 사촌 동생 이름이었다. 장희랑 동갑이라 몇 번 같이 어울려 논 적도 있었다.

“그 여자가 세영이라고?”

“이번에 여기 학교 선생님으로 발령받은 모양이야. 작은 어머니께서 나 먹을 반찬 몇 가지 싸서 보내셨더군. 여기 근처에 집도 구할 거고. 젊은 여자 혼자 타지살이를 시킬려니 마음이 안 놓이시는지 여기로 보내셨더군.”

한참을 어리게 봤던 그 예쁜 뒷모습의 여자가 자신과 동갑내기 세영이라는 것을 안 순간 안도의 한숨과 함께 아까 유리창에 비춰봤던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생각나 괜히 속상하고 화가 난다.

그런 장희를 가만히 지켜보던 도운이 말한다.

“내가 가 버리면 너는 이러고 있을 거란 말이지?”

장희는 할 말이 없다. 어떤 변명도 지금은 할 수 없었다.

“나는 말이야, 니 마음을 잘 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니 상황이 이러니까 마음과는 달리 나에게 오지 못하는 거라고... 그런데도 가끔 니가 나한테 차갑게 굴 때면, 알면서도 마음이 아프더라. 정말로 니가 바라는 게 뭔지 내가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 그런데 너는 내가 흔들릴 때마다 어떤 식으로든 내가 다시 너에게 올 수 있게 신호를 주더라고. 그리고 오늘 나는 다시 니가 나한테 보내는 신호를 받았어. 그것도 아주 확실하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고, 흔들리는 여자가 있다면 가랑께. 내가 늘 가라고 혔잖어.”

장희가 퉁명하게 말하자 도운은 장희의 팔을 단단히 잡았다.

“그래. 갈게. 다른 여자한테 흔들리게 되면. 하지만 가더라도 너랑 마무리는 지어야겠어.”

도운이 그대로 놓은 자전거가 그 자리에 넘어져 나뒹군다. 도운은 절뚝거리는 장희를 잡아 끌다시피 집으로 향해 갔다. 이렇게 단호하고 거친 모습의 도운은 처음이었다. 장희는 뿌리칠 새도 없이 그를 따라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이제 됐다.”

상처를 덮은 거즈 위에 반창고를 붙이며 도운이 말했다. 조금 전에 거칠게 자신을 끌고 들어오던 사람과는 다른 원래의 도운이 돌아왔다.

장희는 도운 쪽은 쳐다보지 않고 방을 둘러본다. 작은 책상과 책장이 하나 있고, 천으로 된 회색 옷장이 놓여있다. 반대편으로는 서랍장 위에 이불이 단정하게 차곡차곡 개어져 있다. ‘사람이 단정하니 방도 깔끔하구나’ 생각하면서도 ‘지금 그런 것이 자기와 무슨 상관인가?’ 싶은 마음에 괜히 고개를 돌리며 눈을 내리깐다.

“잠시만. 마실 것이라도 가져 올게.”

도운이 나가고 이리저리 둘러보던 장희의 눈에 도운의 책상 위에 놓인 익숙한 종이가 보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확인한다. 동백꽃 무늬가 들어간 편지지. 예쁘지는 않지만 수줍은 듯 반듯반듯 쓰여있는 글자들. 장희의 글씨. 장희의 편지였다.

‘이 편지가 아직도.’

편지를 든다. 조금은 낡았지만, 책 사이에 넣어 소중히 간직한 듯 빳빳하게 펴져 있었다.

“집에 따뜻한 건 보리차밖에 없네. 우리 이거라도 마시자.”

도운이 들어오며 말했다. 장희가 들고 있는 편지를 보더니 ‘아, 그거.’ 하는 표정을 짓는다.

“아직도 이걸 가지고 있었어?”

“너한테 받은 첫 편지니까. 내 군복 안주머니에 항상 넣어뒀어. 많이 구겨져서 너를 만난 뒤로는 책 사이에 넣어 보관했지.”

“북한군에게 끌려갔었잖아.”

“그랬지.”

도운은 알듯말듯한 표정을 짓는다.

“어떻게 다시 찾은거야?”

“전장에서도, 포로로 잡혔을 때도 그 편지는 내 옷 안주머니에 항상 있었어.”

“감옥에 갇혔을 때도...”

장희가 혼자서 읖조리며 편지지를 만지작 거린다.

“너를 못보는 동안 그 편지가 나한테는 너였거든.”

장희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이 사람은 단 한 순간도 나를 버린 적이 없구나!’

갑자기 죄책감이 밀려온다.

‘내가 끝까지 도운을 믿었더라면, 돌아온다는 그의 말을 믿고 기다렸다면 지금 우리는 이런 모습으로 만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이 그렇게 미치자 또 다시 장희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왜 또 울어?”

도운이 수건을 가져다가 눈물을 닦아준다. 수건에서는 그의 냄새가 난다. 장작 타는 냄새 같기도 하고 박하향 같기도 한 그런 향. 그 수건을 받아들고 그 속에 얼굴을 파 묻는다. 이 수건 속에 파묻혀 그대로 사라지고 싶다. 장희는 고개를 들었다.

“오라버니”

“그래.”

“나는 오라버니한테 죄인이여.”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보는 도운을 똑바로 바라본다.

“오라버니가 이리 살아 돌아올 거라는 것을 눈꼽만치도 생각하지 못했어. 돌아올 거라는 오라버니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이제. 그라고는 오라버니를 잊고, 다른 가족을 만들어 볼 거라고 오라버니를 배신했어. 그래서 이렇게 벌을 받는 것 같아. 오라버니랑 나랑은 이제 끝났어. 내가 오라버니를 배신한 순간부터... 나한테는 또 다른 소중한 사람들이 생겼고, 그 죄를 갚을 기회가 생겼어. 나는 이제 더 이상 누군가를 배신할 수가 없어.”

“니가 잘못한 것이 아니야. 전쟁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니가 그런 결정들을 한 것은 너와 연희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내 결정에 책임을 져야 혀.”

장희가 말을 끊자 도운이 화를 낸다.

“그 책임을 내가 지겠다고. 니가 그런 결정을 한 것은 내가 너를 놔두고 서울로, 전쟁터로 갔기 때문이고, 내가 연락을 안했기 때문이고, 내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야. 니가 이대로 불행하면 나는 살 수가 없어.”

“오라버니 탓이 아니잖여. 전쟁 때문이지.”

장희의 눈에 다시 눈물이 흐른다.

“전쟁이 우리를 이리 만든 것이제, 오라버니 탓이 아니여. 그라제. 내 탓도 아니여. 우리는 잘못한 것이 없응께. 근데 왜 이런 벌을 받고 있냔 말이시. 우리가...”

도운이 장희를 확 당겨 끌어 안는다.

“이제 스스로에게 벌 주는 거 끝내자. 전쟁은 끝났고 우리는 어렵게 만났어. 나는 너를 안 보고는 못살 것 같아. 그런 시간들은 한 번이면 충분해.”

장희는 그 품안이 너무나 따뜻하고 포근해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벗어나야만 하는 이유가 장희 머리 속에 차고 넘쳤다. 태양이 한가득 도운의 집 창문으로 따뜻하게 내려온다.

“오라버니.”

장희는 가만히 도운을 밀어내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 보았다.

“나는 사랑이 태양같아. 어떤 사람은 밤이 괴로워 긴 밤 내내 밝은 태양만 기다리며 꿈꾸지. 근데 있잖아, 또 어떤 사람은 너무 힘들고 지쳐 지금이 태양이 있는 낮인지 없는 밤인지 구분도 없이 살거든. 지친다는 건 그런 거야. 외로울 틈도, 괴로울 틈도 없는 거지. 오빠는 그 고달픔 속에서도 태양을 꿈꾸고 기다렸지만, 난 그 고달픔에 지쳐 태양이, 사랑이, 오빠가 있다는 걸 완전히 잊고 살았어. 난 태양을 볼 자격이 없어.”

그리 말하는 장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도운은 두 손으로 장희의 얼굴을 감싸고는 손손가락으로 가만히 눈물을 닦아냈다.

“아무리 긴 밤이라도 결국 끝나고 아침이 오게 돼 있어. 태양이 이렇게 머리 바로 위에 떠 있는데 언제든 고개만 들면 볼 수 있는데 그렇게 고개 숙인 채 자신을 어둠 속에 가둬두고 살면 니 인생이 너무 슬프지 않을까?”

도운이 장희를 바라보는 눈 끝에 눈물이 고인다.

“괜찮아요, 난. 내겐 벌써 너무 소중한 별들이 생겼거든. 이 별들 때문에 내 인생이 온통 밤이라도 괜찮아.”

“괜찮은 거랑 행복한 건 다른 거야. 내가 이대로 널 두고 간다면 그래도 난 살아지겠지. 하지만 포로로 있던 그 시간보다 난 행복하지 못할 거야. 그 때는 최소한 살아남으면 널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은 있었으니까.”

도운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린다. 그 눈물을 보는 장희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목이 메여온다.

“바보같이. 내가 뭣이라고. 뭣이라고 이런디야. 바보네, 바보여. 세상 젤 가는 바보.”

장희가 울자 도운은 품에서 장희의 어깨를 잡고 밀어내며 장희의 얼굴을 바라본다.

“내가 처음에 너 봤을 때 했던 말 기억 안 나?”

아무 말 없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장희를 보며 도운이 계속 말한다.

“나는 한 번도 너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바보가 맞네.”

장희의 울던 얼굴에 피식 웃음이 퍼진다. 어깨를 쥔 도훈의 손에서 빠져나가려는 장희를 도운이 다시 꼭 안는다.

“내가 보기에는 너도 바보 같은데...”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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