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엔틴 타란티노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감상기
미디어 안에서의 폭력적 이미지는 현실에서의 실재적 폭력을 야기하는가? 혹은 폭력적인 욕망을 간접적인 방법으로 해소시킴으로써 윤리적 사회에 대한 안전장치로 작동하는가? 아니면 미디어와 현실 두 가지 각자 다른 세계에서의 폭력 간의 윤리적 인과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단순히 창작에 대한 검열과 억압으로만 기능하는 것이어서, 우리는 그 대답을 찾는 것을 유보해야만 하는 것일까?
미디어에서, 특히 영화 안에서 표현되는 폭력적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그것이 표현되는 방식과 구성과 밀접하게 연관 지어 생각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폭력적인 행위가 누구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인지, 서사의 구성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고, 관객이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캐릭터에 의해 야기되는 것인지, 혹은 다른 캐릭터에 의해서 그에게 가해지는 것인지가 중요하게 고려되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의 흐름을 유지하는 가장 중심축은 욕망이나 공감과 같은 감성적 영역이지, 도덕적 판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관객이 영화에 집중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중심인물의 감정에 대한 공감을 통해 이루어진다. 도덕적 판단은 그에 비해 유보적이다. 이를테면 한 인물이 끔찍한 방법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하더라도, 만약 그 행위가 이전에 그의 가족에게 행해진 살인에 대한 복수라면, 그것은 감정적 측면에서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어떤 쾌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설령 그러한 종류의 복수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다 해도 말이다.
폭력적 이미지 자체의 강도가 얼마나 강한지 약한지를 따지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어 보인다. 폭력적 이미지가 영화에 등장할 때 고려되어야 할 것은 폭력의 방향이다. 그것은 언제나 ‘약’에서 ‘강’으로 향하며 쾌감을 일으키거나, ‘강’에서 ‘약’으로 향하며 불쾌를 일으켜야 한다. 이것이 영화 안에서 폭력에 대한 유일한 윤리이다.
복수극과 누아르와 같은 범죄물의 작동방식이 바로 약에서 강으로 향하는 폭력에서 기인하는 쾌감이다. 중심인물이 대항하는 세력은 적어도 그를 위협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을 때 우리가 그것을 보며 재미있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밀양 집단 여중생 성폭행 사건을 바탕으로 구성된 <한공주>와 같은 영화는 강이 약에게 휘두르는 폭력을 묘사하며 강한 불쾌를 주는데, 이 경우 야기되는 괴로움과 고통스러운 관객의 감정은 사회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만약 이러한 폭력의 방향성이나, 쾌 혹은 불쾌의 위치가 뒤바뀐다면 그러한 영화는 분명 강한 비난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폭력과 관련해서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감독은 쿠엔틴 타란티노다. 그는 언제나 이러한 폭력의 방향성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극 안에서 그야말로 경쾌하고도 뒤틀린 방식으로 악당들을 괴롭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혈이 낭자한 표면적 이미지로 인해 ‘폭력을 조장하는 영화’를 제작한다는 오명을 쓰기도 한다. 이는 물론 타란티노의 영화를 조금만 더 깊은 층위에서 이해한다면 터무니없는 오해라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되지만, 타란티노 본인이 같은 비난에 계속해서 시달리는 것에 신물이 났는지 이번 영화는 아예 ‘폭력’을 수단으로만이 아니라 주제로도 확장해서 다루고 있다.
<원스 어폰 어 타임인 할리우드>는 미디어 안에서의 유희적 폭력으로 실제 했던 반윤리적 폭력, 즉 찰스 맨슨 패거리의 폴란스키가 살인사건을 상대로 승부를 걸고 결국엔 승리하는 구조의 이야기다. 한 편으로는 서사적이고 장르적이면서 동시에 다른 한 편으로는 60년대 후반의 할리우드와 스파게티 웨스턴, 히피문화의 몰락을 그리는 다큐멘터리적 재현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가상과 실재라는 두 가지 층위는 서로 독립되어있는 듯하면서도 교차하며 초현실적인 메시지를 들려준다.
이러한 영화의 구조를 좀 더 면밀히 분석하고 파악하기 위해선, 양 극의 세계의 속하는 두 가지 차원의 인물들을 서로 분리시켜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가상적, 장르적 서사의 주요 인물로 활약하는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 있고 그의 스턴트이자 조수 클리프 부스(브래드 피트)가 있다. 릭 달튼이 출연한 영화들은 대체로 타란티노가 감독했었던 작품들을 떠올리게 한다. 화염방사기로 나치를 조지는 장면은 바스터즈를 연상시키고 서부극은 <헤이트 풀 에잇>이나 장고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점을 바탕으로 릭 달튼은 타란티노가 영화로서 묘사하는 중심인물들의 총합, 혹은 그 중심점을 말하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관객들이 이 인물을 통해 쾌감을 느낄 것인가?’라는 고민이 투영된, 어쩌면 가장 서사의 중심에 서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의미심장한 점도 있다. 릭 달튼은 어린 여자배우 옆에 앉아 조심스레 책을 읽으며 예전과 같지 못한 자신의 명성에 눈물 흘리고, 별로 내키지 않는 이탈리안 웨스턴 무비의 출연 제의에 고민한다. 결국 노력을 해서 연기력을 향상하고 감독으로부터 칭찬세례를 받는 등, 감독의 전 작품들에 등장했던 중심인물들과 비교하면 굉장히 선하고 도덕적이며, 영화가 전체적으로 동화적인 색채를 띄게 되는데 기여한다. 한 물간 할리우드 배우라는 설정은 타란티노가 60년대에 한 끝 날리고 사라진 많은 유명 스타들에 대한 조심스러운 존경의 표시일까?
이러한 가상적 서사 반대편에 실제 일어난 사건에 기반한 이야기가 진행된다. 폴란스키 가족과 히피 패거리들은 영화 초중반부 즘부터 조심스럽게 등장한다. 나는 이 영화가 <바스터즈>나 <킬 빌> 혹은 <데스 프루프>와 마찬가지로 악당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라고 여겨진다. 나치처럼 사회로부터 강력하게 지탄받거나 사무라이처럼 매력적이거나, 스턴트맨 마이크처럼 미치광이의 캐릭터와 같이 강한 특징과 개성을 가진 악당이 영화의 중심부에 서있고, 주인공은 그들의 악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거나, 복수를 하면서 극이 진행되는 게 기존의 타란티노의 영화들이 보여준 특징이었는데, 이번 영화도 동일한 시선에서 폴란스키가 보다는 히피들이 영화에 등장하는 의미와 상징이 더 커 보인다. 애초에 타란티노가 이번 영화에 폴란스키가 살인사건을 등장시킨 이유도 어떻게 보면 그들에 대한 위로나 존경 이전에 히피문화를 악당으로 설정하는 것이 먼저 목표로서 선행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이번 영화에서 히피들은 그다지 매력적이거나 강하게 나오지 않지만,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미디어의 폭력’과 직접적으로 맞닿는 역사를 가진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히피들이 극 후반부에 릭 달튼의 저택을 습격하기 전에 내뱉는 대사인데, 어딘가 익숙하게 들리지 않는가? 나에게 이 대사는 타란티노가 직접적으로 수도 없이 들어왔던 폭력성에 대한 비판을 그저 인용한 것처럼 보인다. ‘사람을 죽이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바로 타란티노를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다. 한 문장에 두 번이나 반복되는 ‘죽이다’라는 동사의 첫 번째는 가상적 살인, 즉 타란티노 스스로의 오명, 혹은 악행을 상징한다. 두 번째로 등장하는 ‘죽이자’는 실제에서의 실천적 살인, 역사적으로 몰락해버린 평화주의자 히피들의 전언이다.
히피는 사랑과 평화 그리고 자유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반문화운동과 반전운동을 사회적 현상이었으나, 운동의 성격은 독특하게도 정치적으로 빠지지 않고 되려 반정치적이지만 생활양식과 문화와 결합하며 성장했다. 그리고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그들의 문화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이키델릭 음악과 스타들의 옷차림과 같은 미디어였다. 히피는 중심적인 철학과 사상이 있다기보다는, 그들이 그 당시에 받아들이고 계승했던 미디어로 비치는 문화코드를 일상에 접목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초래된 모순은 그들이 기성세대의 물질주의적 사고를 비판하고 반자본, 반노동운동을 시도하면서도 이러한 정신을 미래에 지속시킬 수 있는 기반은 전혀 마련되어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히피의 쾌락주의는 궁핍 속에서 점점 더 범죄와 연계되기 시작했고 로만 폴란스키가 살인사건은 극단적인 예시지만 이미 60년대 후반, 그들은 이미 마약과 폭력 안에서 타락하거나, 철이 들어 또 다른 기성세대의 교체를 유지한다. 타란티노는 이 처럼 미디어의 자유분방함에 유혹되어 시작된 운동이 끝에 가서 자신을 ‘이토록 만든’ 대중매체에 원망을 가지는 히피의 태도에 어떤 모순점을 발견한 것 같다. 그리고 동시에, 어디까지나 대중매체는 대중들에게 유희의 대상일 뿐, 윤리적 모델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책임까지 짊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예시로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클리프다. 그는 스턴트맨이면서도 극 중에서 한 번도 스턴트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왜 기사나 심부름꾼이 아닌 스턴트맨으로 설정되어 있는가? 이것이 영화를 읽는 포인트다.
타란티노 영화의 주인공으로 스턴트맨이 등장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2007년에 로드리게즈와 각본을 쓴 <그라인드 하우스>에서 감독한 <데쓰 프루프>에서 커트 러셀이 연기한 ‘스턴트맨 마이크’가 있었다. 그는 극 중에서 한물간 오래된 영화에 출연했던 스턴트맨이다. 바에서 젊은 이들에게 자신이 출연했던 영화들을 불러주지만 아무도 그 영화가 뭔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장면은 릭 달튼을 떠올린다. 그는 ‘데쓰 프루프”라 불리는 스턴트 개조용 차량에 탑승한다. 그 차량은 오직 운전석만 보호가 되어있어 아무리 거칠게 운전하더라도 운전석은 죽음으로부터 안전하지만 조수석에 있는 인물은 사망한다. 그는 이 차를 운전하면서 여자들을 죽이는 게 취미인 변태 살인마로 등장한다.
여기서 ‘데쓰 프루프’라는 단어 자체가 스턴트맨에 대한 타란티노의 직접적인 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데쓰 프루프는 방수를 워터 프루프 라 부르 듯 죽음을 막아준다는 뜻이다. 조금 더 넓게 해석하자면 죽음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뜻이다. 스턴트맨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현실의 모방, 즉 미메시스다. 사랑과 싸움, 복수와 같은 다양한 감정의 층위를 가상공간으로 옮겨 놓으면서 그것을 재현하는 것은 배우다. 실제 세계에 거주하는 실제 사람이 있다면 배우는 그 행동을 따라 하고 모방하고 재현하고 변형하면서, 나름대로 제2의 세계를 구축한다. 하지만 배우가 모방할 수 없는 단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배우가 슬픈 연기를 하려 눈물을 흘려도 그는 정말로 슬픈 게 아닐 수 있고, 그가 내뱉는 대사들도 사실 그 인간의 철학과 아무 관련 없을 수 있지만, 죽음 위협은 배우에게도 동일한 죽음 위협으로 적용된다. 이때 배우는 자신과 실제 사람과의 동일한 무력감을 느끼고 물러갈 때, 그 자리를 대신하며 나타나는 게 스턴트 맨이다. 그는 정말 현실에서도 죽을 수 있는 장면을 연출하면서, 배우의 죽음 위협을 극복시키고 더 나아가서 실제 사람, 즉 관객의 죽음 위협까지 극복시킨다.
배우가 유일하게 연기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지점을 연기하는 것이 스턴트맨이고 그는 현실에서 해소될 수 없는 죽음 욕망을 가상적으로 해소시킨다. 그리고 여기서 죽음의 의미는 타란티노의 폭력의 의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 주체의 죽음이라는 폭력은 현실의 모방을 야기시킬 수가 없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적용되는 것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턴트맨의 위치는 현실을 넘어서는 존재다. 그것은 신적인 존재이며 죽음 위협을 넘어서는 유령이다.
이러한 신적인 존재를 타란티노가 스턴트맨에게 부여했다는 해석이 전혀 비약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데스 프루프>에서 스턴트맨 마이크는 이러한 스턴트맨 특유의 ‘절대 죽지 않는다’는 설정을 등에 업고 관객에게 신적인 공포감과 악마적 공포감을 선사한다. 반대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의 클리프는 이러한 신적인 힘을 지닌 채 역사적 인물을 죽음으로부터 구제하는 구원자의 위치에 있다. 그는 스턴트맨이기 때문에 가상과 실제의 층을 넘어서서 히피와 폴란스키가의 이야기에 개입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닌다. 스턴트를 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자동차를 타고 절벽을 뛰어넘는 행위는 가상의 죽음을 넘어 실재의 죽음 위협조차 초월하는 신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스턴트맨에 대한 위치 승격은 아마 타란티노 감독과 친하게 지낸 스턴트 출신 배우들에 대한 애정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브래드 피트 특유의 의리 넘치는 캐릭터와 매우 강한 묘사, 신비스럽고도 비밀에 감춰진 과거, 그리고 무엇보다 히피들을 처음 대면했을 때 엘에스디에 취한 채로 “너네 진짜야?”라고 묻는 대사는 클리프를 더욱 초현실적 인물로 보이게 한다. 그는 마지막에 처리할 건 다 처리한 채로 이야기의 마무리를 릭 달튼에게 떠 넘긴다. 릭 달튼의 화염방사기는 ‘현실의 폭력을 무찌르는 가상의 폭력”의 가장 강력한 메타포로 작용한다.
타란티노도 영화를 많이 찍다 보니까, 할 말이 많아진 것일까? 이번 영화는 그의 전작들에 비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가장 깊고 또 어둡다. 가장 현실의 레퍼런스가 많이 가미된 작품이면서도 <펄프 픽션> 못지않게 초현실적이고 모호한 요소가 가미되어있는 점이 재미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는 전혀 타란티노로부터 기대하지 못했던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고 그 선물이 나름 나쁘지 않았던… 그런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