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가 몰고 온 불안
봄이 다가온 지 2주가량이 이미 지났으나, 나는 아직 겨울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방 안에 갇혀있다. 한국 땅을 밟은 뒤로, 코로나 테스트를 위한 기관에서 격리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바깥을 나서 보지 못했다. 어느 때 보다도 날씨가 좋은 때 집에만 틀어박혀 있자니 우울감과 무기력이 나를 방해하기 시작해서, 책을 읽는 것도, 영화를 감상하는 것조차도 불가능했다.
요즘은 감상에 빠지기에 좋은 시기가 아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할 것 없이 적자행진이 이어지고 곧이어 파산과 구조조정 이야기가 뉴스로부터 들려온다. 벚꽃구경을 가는 것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완전히 진정되지 않은 요즘 민폐 행위가 되었다. 여행을 떠나기 가장 좋은 오늘, 사람들은 집으로부터 갇혀있는 신세가 되었다. 우울증은 코로나 블루라는 이름의 파생적 전염병으로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자가 격리자를 위한 물품에는 우울증을 이겨내기 위한 작은 안내책자도 동봉되어 있었는데 그 안에는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몇 가지 팁이 적혀 있었다: 취미활동 가지기, 사람들과 연락하기, 운동하기 등등… 그러나 불안과 걱정은 언제나 우리의 인식 세계 바깥의 추상적 대상으로부터 찾아오며, 그로부터 빠져나갈 구체적인 해결방안이란 결코 주어지지 않는 것 같다. ‘불확실성’의 쾌쾌하고 답답한 냄새는 우리를 또다시 불안으로 내몰기만 한다.
코로나가 야기한 변수들이 나에게 주어진 미래를 모두 불확실한 모양새로 뒤바꿔 놓았다. 추상적인 미래 앞에서 나는 앞으로를 나 자신의 주관적 감성과 결부시키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해 나는 미래를 ‘희망’하거나 ‘걱정’하는 순전히 감정적인 방식 이외에는 바라볼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희망하던 미래가 찾아오지 않았을 때 내가 느낄 실망감이나, 내가 걱정하던 미래가 찾아오지 않았을 때에도 쉽게 지워지지 않을 냉소주의적 태도에 있다. 희망이던 걱정이던, 불확실한 대상에 나의 강한 감정을 대입시키는 건, 그만큼의 대가를 요구하는 것 같다. 나는 미래를 보고 싶다. 하지만 순수한 미래란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불확실한 요소에 갇혀 판단력을 상실하는 것은 단지 나 혼자만의 걱정거리라기 보단 대다수가 공통적으로 나누고 있는 ‘현대적 정신질환’이다. 이런 불안함은 주체의 불안이 닿을 수 있는 명확한 대상이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절대 벗어날 수 없다. 그건 이를테면 미세먼지다. 만약 내가 장롱에서 오랜만에 꺼낸 코트에 먼지가 두텁게 쌓여있다면, 나는 그저 그것을 창문가로 가져가 털어내기만 하면 될 것이다. 가시적인 불안거리도 마찬가지다. “훌훌 털어내 버려!”라는 말처럼 나의 책임윤리가 작동하는 공간의 바깥 지점으로(창문) 불안적 대상을 비가시화시키는 것이 바로 털어버리는 행위다. 이를 테면 과거에 나에게 상처가 되었던 사건이 이제는 현재로부터 멀어지며 거리가 생긴다면, 나는 그것을 훌훌 털어낼 수 있는 것, 즉 비가시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확실한 대상으로부터의 불안은 미래로 부터 찾아오며, 미세먼지와 같이 그 본성 자체로 비가시적이다. 미세먼지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 바깥 지점에 위치해 있지만, 분명 그 어디엔가 존재해있다. 여기서 인식과 존재의 분리가 일어나며, 불안의 대상은 그것이 다른 대상들과의 차이를 비가시화시키며 다만 그들과의 차이가 생기고 있다는 개념으로만 존재론적 의미를 지니는, 들뢰즈적 언어로써 ‘미분적’인 방식으로 현전하고 무의식 아래로 침잠하며, 불안감을 증식시킨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대상으로부터 어떠한 능동적 태도도 취할 수 없다는 데서 느껴지는 무력감을 애써 무시하며 마스크를 쓴다. 미세 먼지로부터, 불안으로부터 그리고 코로나로부터 우리는 순전히 비가시적인 그들로부터 최후의 방어막으로 호흡기를 보호한다.
불확실성에 대항하는 마스크의 확실한 보호장치, 나의 신체와 가장 밀접하게 접촉되어 표정을 감추는 하얀 천은 각자도생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각자 알아서 자기 몸 잘 챙기는, 남들 걱정해 줄 여력이 없는 이들이 서로의 안일함을 공격하며 싸우기 시작한다. 급속도로 확산되는 외국의 코로나 확진자수를 알리는 뉴스는, 세계의 공통감을 통한 질병 극복 의지를 키우는 게 아니라, 타국에 대한 비난과, 국가주의만 증가시킨다. 각종 언론은 일본의 급격한 확산 사례가 고소하다는 듯, 한국의 ‘모범적’ 극복사례와 비교해 보도를 낸다. 하지만 코로나는 승부를 겨루는 스포츠가 아니다, 누군가 아프다고 나의 건강의 가치가 올라가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그저 질병에 대한 공포를 타국에 대한 적대감으로 전이시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로 하여금 가쁜 숨을 쉬게 하고 대화를 중단시키는 하얀색 면 마스크가 개인주의와 국가주의의 상징이 되어가는 것은 안타까운 점이다.
내가 가장 우려하는 점은 오늘날의 이례적인 코로나 사태가 끝나고 나면 이 사건이 마치 ‘냉소주의의 승리’와 같은 이름으로 기억되어 사회를 냉각시키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탈리아인들이 창문을 열고 노래를 부르고 프랑스인들이 박수를 치는 퍼포먼스를 보이는 것은, 그들을 개인의 고립으로 몰아넣는 코로나에 대항해 공동의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의 발현이었다. 우리는 서로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면 할수록 그들을 더 자세히 지켜볼 수 있어야 하고, 잃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 친구가 내게 해 준 말이 있다.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니까 그들의 눈을 더 자세히 보게 된다고. ‘아 이 사람 눈이 이렇게 생겼었구나!’를 새삼 느끼면서 살아간다고 말이다. 나는 우리 앞에 주어진 비가시적인 코로나가 야기하는 불안 속에서도, 마스크 위로 드러나 서로를 향하는 시선을 잃지 말고 오히려 더 깊이 바라볼 수 있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