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욱 Apr 08. 2020

에릭 로메르의 '반복적 우연'

우연은 가장 가볍게 떠올랐다가 가장 깊은 곳으로 침잠한다.

여름이야기


나는 불확실성에 불안해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연에 가슴 설레어하기도 한다. 따라서 불확실성에 덜덜 떠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자업자득이다. 내가 확실한 기반에 입각해서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불확실성은 오래된 친구의 얼굴로, 그러나 불쾌한 모습으로 내 곁에 언제나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내가 겪고 있는 고통과 불안에 나의 책임이 서려있다고 자책하게 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그러나 이러한 태도를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고 억울한 항변을 하게 된다. 나는 왜 어쩔 수 없이 불확신을 가지고, 희미한 횃불만으로 가까운 발치만 밝히며 긴 길을 걸어가야만 하는지, 나는 그 점을 설득시키고 싶다. 누구보다 나 스스로에게 말이다.


그것을 위해서 나는 우연과 운명, 두 가지 단어가 나에게 의미하는 바를 조금 정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운명이라는 단어의 정의는 일반적인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점괘나 사주팔자와 같이 사람이 살아가는 방향을 제시해주는 예지자로서의 운명에 나는 그 어떤 관심도 없다. 롤랑 바르트는 자신이 현미경 렌즈로 찍은 사진에는 그 어떤 관심도 없다고 밝히며 그 이유로 자신이 ‘현상학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그것은 실제의 눈으로 바라볼 수 없는 것을 기계를 통해 대신 보여주면서 마법적인 놀라움을 전해주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나라는 주체와 동떨어져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래를 예견한다는 운명은 우리의 인식범위가 미치지 못하는 바깥을 제시하며 ‘환상’을 말한다. 애초에 미래란 그 자체로서 불확실의 영역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그리든 환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나의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운명은 완전히 반대의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점괘로서의 운명이 현재로부터 미래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과거의 흔적이 아무렇게나 쌓이고 쌓이다가 그 축적물이 현재 지금의 나를 가리킬 때, 그때 나의 마음을 자극하는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나의 인식범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면에서 전적으로 현상학적이다. 이는 나를 이끄는 운명이 아니라, 나에게 다가오는 운명, 나를 움켜잡는 운명이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한 가지 예시를 들어야겠다. 내가 가는 곳마다 똑같은 음악이 들려온다면, 게다가 현재 유행하지도 않고 아주 오래전에 이미 한물간 음악이 지금 이곳에 계속해서 들려온다면, 처음 그 음악은 나를 그냥 지나칠 것이고, 두 번째로는 나를 살짝 자극할 것이고, 세 번째에는, 이런 일이 왜 생기는 것인지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고 더더욱이 계속된다면 나는 거기에 어떤 의미라도 있는 건 아닌지, 혼자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며 질문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다. 대체이건 뭘까? 어떤 의미일까? 하고 말이다. 


에릭 로메르는 영화 <여름 이야기>에서 이러한 현상을 사랑이 발생하는데 필요하다는 '연속적 우연'으로 부른다. 여기서 재생되는 음악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 과거로 부터온다. 하지만 그것이 우연을 통해 계속 반복될 때, 나는 거기에 의미를 대입하고자 하는 것이다. 가볍게 나를 찾아왔던 우연에 의해서 결국 나는 구속되고 만다. 의미를 계속 찾기 위해 끙끙댄다. 하지만 결국에 의미부여란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일까?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지, 정말 거기에 의미가 있긴 한 건지를 탐구하는 우리는 얼마나 무력한 것일까.


여기에서 나의 관점은 두 가지 다른 시선으로 분리된다. 내가 거기서 의미를 찾아낸다는 하나의 시선, 내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두 번째 시선. 의미를 찾아낸다고 믿는 것은 바위산에 돌을 굴려 올리는 시시프스, 그것이 의미부여일 뿐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은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바라보는 시시프스. 내가 현상을 바라보는 태도는 이처럼 한 번은 의지에 가득 차서 들끓다가도 한 번은 회의에 갇힌 채 내려보내는 것이다. 나는 우연과 의미라는 것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여전히 어떤 것을 잡아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두 가지는 하나처럼 보이면서도 서로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우연을 잡으면 의미와 멀어져야만 하고, 의미를 잡으면 우연을 부정해야 하는 것이다. 


우연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따라서 한 치의 흔적도 없이 고갈된 연못처럼 ‘무’ 그 상태이거나 끊임없이 샘솟는 파도처럼 무한하거나, 그 두 가지 중에 양자택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우연을 다루는 태도에 있어서 정도란 없다. “이 정도는 의미 있는 우연이고, 이 정도는 무의미한 우연이다.”와 같은 절충적 태도를 결코 취할 수 없다. 조금의 우연도 그것이 의미를 가지면 무의미하다고 여겨졌던 모든 사건과 시간들을 삼켜버린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하나의 의미를 향하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의미 있는 삶이란 우연적 삶, 자각하는 삶이란 필연적 삶, 그것뿐인 것일까?


지금까지의 설명으로 우연을 마치 추상적으로 부유하기만 하는 대상으로 편협하게 착각할 위험이 있으나, 사실은 그 반대에 가깝다. 우연은 무작위 하게 일어나지만 동시에 가장 강하고 튼튼하게 자리 잡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연은 실제적 사건들의 연속에 기초하고 그것들은 의미가 부여되었든, 의미가 상실되었든, 실제적이라는 사실(음악이 들려왔다는 사실)만은 변치 않으며, 이러한 사실이 허무하고 연속적인 삶에 어떤 특정한 질서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삶을 다채롭게 하지만 동시에 허망하고 추상적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감정이다. 감정은 언제나 모든 것을 감싸려 들다가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한다. 이런 ‘흔적 없음’은 그것이 나에게 도달하기 이전부터 이미 나를 불안하게 하고 겁먹게 하고 때론 슬프게 한다. 나는 감정이 가진 그러한 이중적 태도 때문에 호의적으로 다가오는 감정에도 마음 아파한다. “나에게 주어진 기쁨에 내가 기뻐해도 될까?”, “내가 지금 마냥 슬퍼한다면, 나중에 슬프지 않을 때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이런 불합리하고도 복잡한 고민들은 내가 느끼는 감정에(그것은 가장 자유로워야만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엄격하게 회초리를 휘둘러대면서 통제하려 든다. 결국 나의 감정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서로 바꿔가며 변장한다. 나는 감정을 통제하는 데 있어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감정의 소용돌이 안에서 진정 내가 느끼는 순수한 감정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리는 지경에 빠진다. 이렇게 깊은 혼란 속에서 우리가 붙잡는 것은 실제적인 어떤 것, 우연적인 사건의 연속이다. 내가 나 자신을 하나도 다루지 못한다는 무기력에서 구원하는 것은 외부로부터 기인하는 객관적인 사건이며, 그것은 감정과 같이 복잡하지도, 휘발적이지도 않는 튼튼한 기둥이 된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와 보낸 시간 속에 벌어졌던 사건들, 나의 어떠한 의지도 개입되지 않은 외부적 우연들에 내 모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무기력한 존재에 불과하다고? 그럼 나에게 벌어지는 이 일들은 뭔데?” 하면서 내 추상적인 운명을 대변하는 객관적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감정은 멀리서 왔다가 멀리로 사라지지만, 우연은 멀리서 왔다가 가슴 가장 가까운 곳으로 깊숙이 자리 잡는다. 그리고 거기에서 의미가 피어난다. 확실한 모습으로 의미는 나를 위로한다. 


하지만 때때로 족쇄가 된다. 한 번 의미를 형성한 우연의 연속들은 절대로 다시 무의미의 모습으로 후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의미라도 나는 그것을 다시 무의미의 영역으로 방생할 수가 없다. 우연이 처음에 튼튼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았던 것처럼, 그것은 튼튼하게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다. 우연이 깊숙한 곳으로 침잠한다는 표현을 쓴 것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누군가와 함께한 우연에서 의미를 부여할 때 나는 장난스러운 아이의 모습이지만, 그것이 상대방에게 무의미란 것을 깨달았을 때, 나도 그와 같이 무의미로 다시 되돌아 가기란 불가능하다. 그때 의미는 비참한 모습으로 잔여 한다.


이것이 결국 우연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조심스러운 태도이다. 그러나 우리는 흔적 없이 사라질까 무서운 감정에 쫓겨 또다시 우연에 의미부여를 하고… 자 이것이 불확실성에 두려워하면서도 계속해서 우연에 가슴 설레는 역설적인 내 태도에 대한 항변이었다.


내부에서 복잡하게 휘몰아치며 변장하는 감정들과, 외부로부터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우연의 연속들, 그 두 가지가 맞닿는 지점에 운명이란 것이 있고, 의미가 있다. 나는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먼저 나를 찾아오는 것이 의미이다. 의미를 마주하는 게 때로는 가슴 떨리고, 때로는 아프더라도, 나는 다시 한번 그것을 보듬어 안고 싶다. 설령 그것이 아주 짧은 녹색광선일지라도.

작가의 이전글 미래를 보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