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님 달님> 비평
단 하나만, 단 한 번만이라도, 단 한순간 만을… 등등, 우리는 왜 이렇게 ‘한 번’이라는 것에 집착하는 것일까? 딱 한 개의 장난감을 더 사고 싶었던 어렸을 때의 욕망은 시간이 흐르고 더 넓어진 세상 앞에 온갖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단 한 개’를 요구하곤 한다. 나는 과거의 한 순간으로 딱 한 번만 돌아가면 될 텐데… 하면서 하나라는 가장 적은 수치가 불가능성에 대한 가능의 요구가 좌절되는 것이 마치 부당하다는 듯, 스스로 정당화를 시킨다. 마치 절대 불가능성의 바로 옆 가장 가까운 곳에 ‘하나’라는 겸손한 수치가 위치해서 둘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는 듯이 말하는 것 같다.
“내가 많은 걸 바래? 딱 하나면 된다고!” 하지만 이러한 문장이 내뱉어지는 순간은 대개 모순적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요구는 상상하는 주체의 채워질 수 없는 결핍의 틈으로부터 나타나는 욕망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라는 수치화된 양은 어디까지나 도덕적으로 스스로를 은폐시키는 허상일 뿐, 욕망 그 자체는 끊임없이 축소하며 사라지거나, 혹은 무한히 확장하는 두 가지 방향만 갖는다. 욕망의 요구는 결핍을 채우지 못하고 또 다른 요구를 부른다. 결국 ‘하나’에 대한 요구는 모든 것, 무한한 것에 대한 요구를 말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 적당히 욕망하는 자란 없으며, 또한 적당히 결핍된 자도 없는 것이다.
호랑이가 요구하는 ‘떡 하나’도 결국 그 처음부터 모든 떡에 관한 욕망과 다름없었다. 많은 설화에서와 같이 <해님달님>에서도 호랑이는 인간의 이성이 배제된 욕망과 감정의 대상물로 등장하는데, 특히 오누이의 어머니와의 조우에서는 순수한 두려움과 불안과 같은, 가족에 대한 위협의 존재로 현전 한다. 그런데 나에게 호랑이는 외부적 위협보다는 오히려 주체 내부에서 일으켜지는 불안과 두려움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것에 대한 근거가 앞서 제시되었던 욕망의 무한한 확장이다. 어머니와 호랑이와의 제안(혹은 협박) 속에서 수치와 언어가 그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무력화되는 이유는 그 두 존재의 마주침은 주체 내부에서의 두 감정의 충돌이기 때문이다. 외부로 표출되지 않는 내면적 감정의 마주침은 언제나 추상적이고 무한하고, 혹은 미분적인 형태로 반복하고 변형되며, 비이성적인 무작위성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오누이를 위해 달콤한 떡을 바구니에 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진정한 주체인 오누이에 대한 보호와 보살피는 마음으로 서사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상징, 혹은 사랑받고자 하는, 보호받고자 하는 욕망의 상징으로서, 그리고 그녀가 머리 위에 이고 있는 떡은 달콤한 욕망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와 호랑이와의 조우는 사랑이 지니고 있는 수치화될 수 없는 행복들이 불안으로부터의 요구의 응답할 때, 수치화된 제안의 허상에 속아 결국엔 무한해지는 두려움에 모든 행복을 빼앗겨 버리고 사랑 그 자체마저도 잡아 먹혀버리는 순간을 그리는 것이다. 욕망, 특히 사랑에 대한 욕망은 결코 불안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실재 안에서 실현될 수 없는 이미지를 욕망하는 인간은 스스로의 욕망에 부합하지 못하고 좌절되는 실재 앞에서 불안하며, 수치화되지 못하고 불확실하게 확장하는 무한한 욕망 앞에서 또한 불안하다. 어머니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이유는 바구니에 더 이상 떡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딱 하나’라는 요구에 응답했기 때문이며, 호랑이는 이빨을 끊임없이 부딪치는 에리식톤의 식탐으로서 사랑과 욕망이라는 달콤한 감정들을 집어삼킬 수 있었다.
설화 속에 등장하는 집은 단지 물리적으로만 주체를 보호해주는 장소가 아니다. 외부의 위험요소가 집 안으로 침투하려 해도 멋대로 문을 부술 수 없고 주체의 허락 없이는 발을 들일 수가 없다. 허락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라는 긍정과 ‘아니오’라는 부정으로 확실히 구분되는 이성적 판단이다. 앞서 이루어진 어머니와 호랑이와의 조우가 깊은 밤(시간대가 정확히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산속에서 어둡고 추상적이고, 명확하지 않은 감정의 장소로 나타난다면 반대로 오누이의 집은 완전한 이성의 공간인 것이다. 그들은 판단의 주체로서 외부 대상에 대해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고, 그들의 ‘아니오’ 앞에선 어떤 무서운 존재도 문지방을 넘을 수 없다. 아마도 이러한 서사적 장치는 부모들이 아이에게 욕망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초자아적 판단력을 심어 놓기 위한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호랑이는 이런 절대권력에 자신의 힘을 숨기고 변장이라는 책략을 사용한다. 불안이라는 자신의 본질을 감추고 사랑의 대상으로 자신을 위장하는데 오누이는 이런 속임수를 간파한다. 물론 이성적 판단으로 말이다.
오누이가 호랑이의 존재를 눈치챘을 때, 그들이 깨달은 것은 단지 불안함의 기습 만이 아니었다. 호랑이의 존재는 또한 사랑의 상실, 어머니의 상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불안과 공포는 이처럼 사랑과 행복이라는 달콤한 감정들의 상실과 함께 찾아온다. 이야기 내에서 오누이가 슬퍼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지만(오누이는 완전히 이성적 주체로서 행동하는 듯 보인다.) 그들이 뒷문을 통해 집에서 나간다는 것은, 더 이상 가장 안전하게 보호된 구역, 이성적으로 정돈된 공간에서 스스로 탈출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그것은 그들에게 가장 현명한 판단이었는데, 왜냐하면 어머니의 상실은 오누이가 지니고 있던 상태, 즉 기다림이라는 것을 벗어던지게 하고, 기다림이란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이기 때문에 수동적 상태에서 완전한 주체로의 전이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사랑 앞에서 기다림은 회귀를 전제하지만, 불안과 두려움 앞에서의 기다림은 무한한 공허만이 남는다. 알 수 없는 대상에게 ‘예’와 ‘아니오’라 자유로이 판단할 수 있는 집이라는 장소는 무한한 기다림 앞에서는 스스로의 기능을 잃고 만다. 안전한 장소는 내부적, 외부적 상태의 변화에 의해 감옥으로 변하기도 하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나갔어야만 한다.
오누이는 호랑이를 피해 나무 위로 달아나고 호랑이 역시 나무 위로 오르려 하는 순간 하늘에서 두 가지 동아줄이 내려온다. 여기서 나무는 아래로 지상, 위로 하늘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세계의 중간지점이다. 그들이 각자 붙잡는 동아줄에 따라서 어느 세계로 가게 되는지가 결정된다. 아시다시피 오누이는 하늘로 올라가서 해님달님이 되고 썩은 동아줄을 붙잡은 호랑이는 땅에 떨어져 죽고 만다. 그런데 나에게는 이 간단한 결말에 대해 손쉽게 놓을 수 없는 해석을 계속해서 떠올리게 된다.
오누이가 신(구원의 주체)이 내려준 밧줄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는 것, 그리고 해와 달이 된다는 것이 왠지 오누이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하나 남은 어머니는 죽었고, 그들 스스로 생존을 영위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리다. 그리고 많은 설화와 신화에서 등장인물이 자연물이 되는 것은 그들의 죽음 이후이다. 더구나 오누이가 하늘로 가기 전 오른 나무라는 공간은 현세와 내세 사이에 애매하게 존재하는 연옥을 상징하는 듯 보이고, 하늘에서 내려온 밧줄을 타고 올라간다는 행위 자체가 죽음을 내포하는 것 같이 들린다. 물론 모두 추측이지만 구전설화 앞에서 명징한 해석을 찾는 것도 무의미하기고 가능하지도 않기에, 정신분석학적인 시선에서 이 이야기가 문화적으로 어떻게 다가오고 이해될 수 있는지를 재미를 섞어서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는 시도 아닐까?
오누이는 하늘에서 해와 달이 된다. 해와 달은 모두 빛을 내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결말 이전에 모든 이야기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펼쳐진 걸까? 적어도 상징적으로는 그런 식의 해석도 가능할 것 같다. 왜냐하면 앞에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불명확성, 비가시성, 불안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호랑이가 어머니에게 요구하는 떡의 수량은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머니는 하나하나 떡을 호랑이에게 건네면서 바구니가 점점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겠지만 몇 개가 남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적어도 아무것도 남지 않아 자기 자신이 희생될 때까지 떡의 양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무한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욕망이란 그 두 가지 중 하나의 형태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누이의 집 앞에서 호랑이는 비가시성을 이용해 스스로를 변장한다. 그 어떤 것도 명확하지 못하고 불분명하다.
반면 빛을 내는 자로서의 해와 달은 모든 존재를 개채화시키고 구별하며, 수치화시키는 이성적 시선을 가진다. 서로 은폐되어있던 차이를 드러내게 하고, 명료한 시선으로 의심스러운 것들을 어둠으로부터 몰아내는 것이 해와 달이 된 오누이가 하늘에서 맡게 된 새로운 직무인 것이다.
그들은 가장 먼 곳까지 빛을 비추며 분칠 한 손이 어머니의 것이 아니라 호랑이임을 분명히 자각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불안으로부터의 벗어남이다. 그러나 하늘로 승천한 오누이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인지 삶의 연속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땅으로 추락한 호랑이 역시 죽지 않은 것일 수 있다. 나는 호랑이와 오누이의 관계는 단순한 죽음과 삶의 대립이 아니라, 육체와 정신의 대립, 은닉하는 것과 비은닉 하는 것의 대립, 실존과 이성의 대립, 어둠과 빛의 대립, 가장 간단하게 말해서 세계와 대지의 대립이라고 말하고 싶다.
“세계와 대지의 대립은 하나의 투쟁이다.”
세계는 언어를 통해, 혹은 현존재를 통해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있도록 개시한다면 대지는 그것들은 반대로 은닉한다. 세계와 대지의 투쟁은 은닉과 비은닉의 투쟁이며, 상호 공존하며 영원한 반복을 계속한다. 무엇이 옳다고, 무엇이 그르다고 쉽게 단정 지어 말할 수도 없다. 호랑이는 대지위에서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다. 스스로가 불안과 만족과 사랑이라는 상반된 감정의 뒤섞임을 위장 속에서 소화시키며 어둠이라는 천막 안에 존재를 은폐시키며, 혹은 동일화시키며 살아갈 것이다. 명확히 나누어지지 못한 불명확한 감정들은 썩은 동아줄을 선택한 죗값으로 하늘에 세계에 당도하지 못하는 벌을 받고 실존에 역역에 갇히게 될 것이다. 해와 달의 빛이 차마 머물지 못하는 그림자 뒤로 다시금 나타날 것이며, 분칠을 멈추지 않고 스스로가 누구인지도 잊을 만큼 정교한 위장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오누이는 해와 달의 모습으로 모든 걸 바라보면서도 아무것도 만지지 못할 것이며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만나지도 못한다. 가장 명확한 정신을 획득한 형벌은 실재하는 것과의 단절이다.
바라보는 것과 스스로 실존하는 것은 이토록 공존하기 어려운 상반된 태도와 같아서, 사랑하고자 하는 자는 호랑이가 되어서 어머니를 잡아먹고 그녀로 분칠한 우스꽝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보기 싫어 어둠으로 도망치고, 이성적 시야를 지닌 자는 언제나 먼 거리를 좁히지 못하며 한심스러운 반복을 계속한다. 세계와 대지의 투쟁은 죽음에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고 현존재를 증명하고자 할 것이다. 내가 보고 있는 문 뒤에 숨어있는 것이 어머니인지 호랑이인지, 그 불확실성 속에서 나는 문을 열고 잡아먹히든, 혹은 의심할 수 있는 빛을 밝히든, 선택해야 하지만, 선택한다고 해서 한 가지 세계에 속하지도 못하는 것이어서… 갈팡질팡 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