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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욱 Apr 2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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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 없는 이야기들


섬집아기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들려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굴은 언뜻 보면 돌멩이처럼 생겼다. 나는 어찌 이리 굴을 좋아하는지. 말랑말랑한 생명체이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삶과 동떨어져 있는 자연물인 듯 자신을 은폐하고 있는 태도가 신비스러운 것인가? 아니 생이라는 것은 굴이 나를 자극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는 아니다. 딱딱한 어패류의 껍질은 어딘가 모르게 매력적인 요소가 있다. 한 편으로는 무생물적인 자신의 얼굴로 세상을 속이면서 따개비를 등껍질에 다닥다닥 붙이고 바위 뒤에 숨어있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독특한 방식이 있다.


인간은 이기적이다. 인간은 모든 대상을 인간의 시선으로만 바라본다. 자기중심적인 시선 앞에서 동물들은 동물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연민과 공감의 자기 투영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정육점에서 웃고 있는 돼지 요리사. 사실 웃고 있는 것은 인간의 얼굴인데, 동물의 이미지는 언제나 희생된다. 


존 버거의 <본다는 것의 의미>를 읽어 본 적이 있는가? 그는 자기 책에서 우리가 원초적으로 가장 어렸을 때 접하는 동물의 이미지는 인간의 편의에 의해 환상적으로 조직된 허상의 이미지의 불과하다고 말한다. 동물들은 동화책 속에서나 크래커에서, 벽화 안에서 언제나 활짝 웃고 있다. 대체 뭐가 그렇게 웃기다고 웃고 있는 건지. 마치 자기 몸속에 아무것도 남김없이 텅 비어있으면서 어린아이들의 행복을 인위적으로 유도하는 노예들 같이 수동적인 감정을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동물은 인간보다 더 따뜻하고 귀여워서 아이들은 쉽게 동물 캐릭터에 사랑을 품는다. 


왜? 결국 동물은 아이에게 완전히 외부적 존재이니까. 그러면서 인간과 같이 말도 하고 감정도 품는 것 같이 보이는. 그래서 아이가 본성적으로 품는 인간 혐오적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준다. 아이가 겪는 모든 투쟁과 다툼, 분노, 억압도 인간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 때 아이는 자신의 존재가 인간으로서의 종이라는 한계로부터 벗어나 생명적 보편자가 되길 꿈꾼다. 마치 동물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이야기보다 더 깊게 다가온다는 듯이. 나니아 연대기의 장롱 속 세계처럼 은밀하고 조용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나간다. 


그런 환상적 세계는 아이를 동물원에 가자고 떼쓰게 만들지만, 오히려 동물원에 갔을 때 비로소 아이는 무력하고 비참한 실재를 목격하게 된다. 우리에 갇혀서, 하루 종일 잠만 자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고 그마저도 늙어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동물들은, 마다가스카의 웃으며 노래하는 동물들이 아니다. 억지스러운 연극을 멈추고 무대 뒤편에서 쉬고 있는 동물들의 모습이 아이가 처음으로 마주치는 환상 이면의 실재의 모습이다. 생각보다 아무것도 아닌 것, 어정쩡하고 미지근한 것. “이게 전부인가?”라고 되새기게 되는 것.



굴은 애초에 미소를 짓고 있던 적이 없다. 굴은 오히려 가장 인간적이지 않은, 딱딱하고 차가운 돌멩이와 더 닮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굴을 좋아하게 된 것일까. 하지만 굴 에도 인간을 닮은 모습, 아니 인간화시킬 수 있는 요소가 존재하는데 그건 역설적이게도 가장 욕망의 근저에 있는 인간의 기관, 입이다. 굴은 끊임없이 부딪치는 에리식톤의 이빨처럼 모든 소화기관을 씹어먹은 채 먹을 것을 찾는 욕망의 마지막 끈처럼 비친다. 성장을 위한 것도, 맛을 보기 위한 것도 아닌 섭취를 위한 가장 원초적 섭취의 행위.


돌멩이를 닮은 굴, 갑각류, 어패류에 대한 이상한 애착은 도시에서 태어나 딱딱한 것들은 보드라운 것보다 더 자주 만지고 성장해온 나의 어린 시절의 무의식과 맞닿아 있을까? 플라스틱 장난감과 컴퓨터 키보드, 그런 것들. 살바도르 달리는 전화의 수화기를 랍스터로 바꿔놓았다. 눈이 먼 장님은 그것을 집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귀와 입에 가져다 댈 것이다. 촉각적으로 그 두 가지는 아무런 차이도 없으니까. 그러나 말을 거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인 랍스터가 아니라 죽어있는 수화기다. 


<Lobster Telephone> Salvador Dali,  1936


이제는 정말 죽어있는 것들이 더 많은 말을 하는 세상이다. 장님은 꿈틀거리는 랍스터를 손에 들고 공허한 메아리를 칠 텐데, “여보세요, 여보세요?” 눈이 보이는 나는 수화기를 만지지 않은 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저건 예술작품이야!”라고. 전화기 앞에서 나는 ‘현재, 여기’에 실존하지 않는 누군가, 하지만 ‘현재, 어딘가’에 실존하는 자에게 말을 걸 수 있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전화를 하는 순간에는, 대화를 하는 순간에는 나는 여기에 없고자 한다. 책상에 앉아서 딱딱한 수화기를 들고 있는 나 자신을 망각하고자 한다. 마치 말하는 자로서 실존의 구속에서 벗어난 듯한 태도로 전화를 받고 있는 상대방에게 다가가려 한다. 오늘 있었던 일들을 달달달 말해주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고, 상대방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함께’라는 동물원 속 우리에 같인 환상을 머릿속에 다시 상기하고자 한다. 


하지만 눈이 먼 내가 들고 있는 것이 랍스터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지금 여기’에 서있다는 무력하고 재미없는 사실을 자각하고 말고, 한 가지 역설을 깨닫고 만다. “적어도 랍스터는 살아서 꿈틀거리는구나, 혼자 앉아서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려는 내가 너보다 더 비인간적인 것은 아닌가.” 살바도르 달리의 우스운 조각이 침묵의 언어로 나의 존재의 무기력함을 열어젖힌다. 예술작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어렵다. 그건 침묵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 것과 같으니까. 말없이 꿈틀거리는 랍스터의 침묵, 수화기가 아니라.


내가 듣는 것은 이제 바다의 자장가 소리뿐이다. 우리의 신체기관이 입으로 시작해서, 또 에리식톤과 같이 입만 남는 것이 끝이라면, 우리의 첫 번째 장소와 마지막 장소 또한 바다로 동일하겠지. 언젠가는 끊임없이 휩쓰는 파도가 나의 집까지 침범해서 내 몸을 남김없이 물속으로 휩쓸어가지 않을까? 나는 처마 밑에 누워서 망상에 빠져든다. 가느다랗게 피어오르던 의식의 끄트머리는 파도소리에 휩쓸려 어두운 잠으로 잠시 사라진다.



바람


    햇볕이 그때와 같이 대지를 달구는 때가 올 것이다. 잎의 희미한 붉은 색상이 다시 그때와 같이 타오르는 때가 올 것이다. 이름 모를 무성한 풀이 발목을 간지럽히고, 벌레 울음소리가 그때와 같이 숲을 가득 메울 것이다. 그러면 습기를 머금은 풀잎들 사이에 작은 이야기들이 머물기 시작하고, 강한 햇살에 바싹 익은 모래 알갱이들은 또 다른 저들만의 이야기들을 속삭이기 시작하겠지. 4월이란 언제나 그렇지 않았던가, 땅 속에 숨어있던 작은 가십거리들이 오랜만에 개학 때 보는 아이들의 작은 담소들처럼 피어오르지 않았는가. 독립되어 머무는 작은 이야기들은 풀잎들 사이에서, 모래밭 위에서, 젖은 돌멩이와 나무계단에서 속삭이다가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에 휩쓸려 내 귀에 들어온다.


의도치 않게 엿듣게 되는 작은 대화들은, 나를 그때와 같은 때로 되돌려 놓으면서 나 또한 그들에게 응답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아 나도 너희와 같은 공간에 있었던 적이 있었다고. 나도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아주 오래전이었지만, 다시 들으니 생각이 난다고, 바람은 모든 머물던 이야기들을 나에게 들려주고 나 또한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4월 바람은 그런 느낌이다. 그냥.



거울미로


    아주 작은 아기 퍼그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인천에 어느 골목의 동물병원 유리창 너머로, 태어난 지 몇 개월 채 되지 않아 보이는 생명체가 자신에게 너무 커다란 검은 눈동자 두 개로 똘망똘망하게 길을 걷고 있는 인간을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밑 칸엔 아기 고양이, 그 옆 칸엔 말티즈… 모두 하나같이 아기 들이었다. 


불과 몇 개월 전, 내가 겨울 눈을 맞고 있을 때만 해도 세상 빛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생명이 나와 같은 순간에 눈을 마주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게다가 커다란 관심으로 눈동자는 반짝반짝거린다. 내가 그렇게 재미있나. 


퍼그의 눈은 정말 순수한 시선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퍼그의 순수를 순수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아이의 눈동자를 통해서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강아지의 얼굴도 동시에 마주해야만 했으니까. 그리고 그 강아지의 눈엔 내가 비췄고 나의 눈동자는 더 먼 과거를 더듬고, 나는 거울미로에 갇힌 것처럼 고통스럽고도 경이로운 기억들을 이리저리 헤매어야만 했으니까. 나는 이제 너의 검은 눈동자에 비친 나의 모습이 너무 눈에 거슬려서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순수는 언제나 순수에서 멀어진 자가 거룩한 태도로 올려보아야만 하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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