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나의 글은 직간접적으로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모든 인간이 스스로의 죽음에 대해서 깊이 그리고 끊임없이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이데거 혹은 후대의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어떤 계기로든 자기 자신의 죽음을 의식한 자는 여기 현재라는 단편적인 상에서 벗어나 삶 전체를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 작은 가치에 매몰되어 있다고 생길 때 찾아오는 실존적 불안이 자기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일깨우는 촉매가 될 수 있다.
죽음에 대해 각자 개인이 가지는 태도는 삶을 대하는 문화적 토대를 형성하고 견고히 해왔다. 이는 단지 실존적 태도가 개인의 범위에서 멈추지 않고 사회 구성의 기본적인 요소로 확장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적인 예로 서구의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설명하는 현세는 내세의 보상을 위한 준비단계처럼 나타난다. 사후세계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상벌로 주어지면서 인간의 행동에 윤리적 규범을 제시하는 동시의 삶의 의미를 준다. 여기서 인간은 실존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한 발자국 멀어지면서 타자와 주체의 연대적 관계 형성을 위한 지침서를 갖는다.
니체는 기독교의 내세적 세계관에 반대하는 영원회귀 사상을 내놓는다. 절대적 일자로서의 개인의 삶은 그 어떠한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 의미는 형성하는 것은 삶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이며 목적이다. 하나의 원인이자 목적으로서의 삶, 그래서 우리가 특정한 행동을 하는 것의 가치가 그 순간 절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니체는 설명한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큰 모순은 말하는 주체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죽음에 대해서 절대로 알거나 느낄 수가 없다. 다만 타인의 죽음을 통해서 그것을 짐작해볼 뿐이지만 타인의 죽음은 주체의 죽음과는 너무나 모습이 다르다. 주체의 죽음은 의식이든 신체이든 주체성을 가진 나의 모든 구성요소가 사라지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불가피하고 그러므로 영원한 것은 없다. 나보다 조금 더 오래 존재할 어떤 것이 있어도 나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것이란 점에서 존재의 영역에 포함시키기 어렵다. 현존재를 중심으로 형상되는 존재 연관의 세계에서 현존재의 죽음은 존재자들의 지향점을 모두 어지럽히며 결국 세계 자체의 죽음과 다르지 않다.
무의미한 철학은 무의미하다. 즉, 현재에 와서 존재 자체에 대해서 그것의 의미로부터 벗어난 순수성을 탐구하는 것이 당최 가능한지도 모를뿐더러, 설령 가능하다 해도 오류를 피할 수 없다.
인간이 절대 닿을 수 없는 행성의 기후를 분석하는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행성을 인간의 생태계, 즉 지구와 비교하면서 분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존재론이든 인식론이든 형이상학이든 세계를 바라보는 데에 있어서 나를 배제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그런 의미에서 나의 사유가 끝맺는 지점인 주체의 죽음이 어떻게 보면 존재 영역의 마지막 정류장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영원한 것이란 나의 죽음 끝을 함께하는 존재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영원함에 대한 열망이란 죽음에 대한 불안함과 공포로부터 기인하여 동반자를 찾으려는 인간의 습성인 것일까? 이를 테면 왕이 자신의 무덤에 첩과 아이들, 신하들을 같이 묻으라고 명하는 것과 같이, 고독에 대한 두려움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글쎄, 이러한 해석이 나의 궁금증을 시원하게 해결해 주지 않는다. 영원에 대한 믿음은 주체의 죽음처럼, 즉 실존이라는 것처럼 명증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무신론적 사회에서 영원이라는 말의 의미는 죽었다. 이념이든 실체든 감정이든, 영원이 없다는 것은 너무 자명하게 증명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존재의 필멸 성이 모든 존재의 영원에 대한 담보를 무너뜨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원을 믿는다. 내 생각에 그것은 믿음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기호라고 부르는 게 나을 것 같다. 한 편으로는 영원이라는 게 없다고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이 있다고 믿는 중첩적인 상태에 있는 것이다. 기독교를 믿지 않고 산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크리스마스를 챙기고 선물을 사들고 가는 이들처럼 말이다. 영원이라는 낡은 개념이 과학적인 사고로 똘똘 뭉친 현대인의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기에는 너무 어설프지만 동시에 그 달콤함을 표상할 수 있는 상태에 두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꿈과 같은 모습으로 우리의 의식세계 근저에 자신의 모습을 바꾸고 숨기면서 머무른다.
세상에는 많은 사물들이 있다. 그 사물들은 단위로 환산하며 의식한다. 길이, 무게, 깊이 등등…
단위는 비교를 가능하게 한다. 하나의 사물이 있으면 그것보다 긴 사물이 있고 더 짧은 사물이 있다. 큰 것이 있는가 하면 작은 것이 있다. 이러한 상대성에 대한 이해를 한 뒤에 비로소 인간은 무한한 것에 대한 상상도 가능하게 된다. 작은 것이 있고 큰 것이 있다면, 내가 포착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것도 물론 있을 것이고 그 반대도 있을 것이다. 확장과 축소되는 사물의 이미지들은 인간의 가시적, 인식론적 세계를 벗어나면서도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심어준다.
영원 역시 시간의 상대성에 대한 의식 뒤에 생겨난다. 여기서 말하는 상대성이란 일반적인 의미의 상대성이 아니라. 사물이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정도의 차이를 말한다. 사과는 나무보다 상대적으로 빨리 썩는다. 사과와 나무가 나란히 놓여있고 사과가 썩는 동안 비교적 느린 속도로 부패하는 나무를 본다면 우리는 나무가 영원한 것처럼 인식할 것이다.
아마도 주체가 자신의 삶에서 겪는 시간의 흐름의 가장 자명한 비교대상은 자기 자신일 것이다. 자기 자신의 변화 속도와 비교에 자연 대상물들의 시간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그가 세계에 살아가면서 시간을 이해하는 방법이다. 인간은 어릴 때와 나이가 들 때의 성장 속도의 변화가 크다. 어린아이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면서 상대적으로 느린 속도로 변화하는 세계를 단단하고 영원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가 머릿속에 기억되면서 성장된 어른의 의식 속에도 영원에 대한 잠재적인 열망이 남아있는 것이다.
세상은 지속적으로 변화해가고 관계나 타자 또한 그렇다. 나의 짧은 생안에서 겪은 급격한 시간의 변화는 그 상대성을 통해서 단위가 부조리할 정도로 늘어나면서 영원의 개념을 믿게 만들었다. 정신분석학에서의 아버지 어머니 개념, 베르그송의 잠재성 개념은 이렇듯 역동적이고 포착 불가능한 현재와 비교해 단단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유년시절의 시간을 빌려오면서 정적인 현재에 머무르고자 하는 욕망을 그린 것일지도 모른다. 영원을 믿는 이유는 우리가 불만족스러운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아패로도 계속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 실존 방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