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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욱 Jun 30. 2020

세 개의 나


세 개의 나

나는 이렇게 화면 안쪽으로 접혀 들어가며 평평하세 잠식되었다. 하늘은 있지만 땅은 없고 둥둥 떠있는 이상하게 뒤집힌 원뿔만 힘없이 응시하게 되었다. 화면 안쪽으로 억지로 빨려 들어가면서 나의 신체가 삼등분되어버렸다. 그것은 인간의 손가락이 나누어지듯, 나뭇가지가 틈새를 벌리며 자라나듯, 오래 만났던 친구와 이념 차이로 쪼개지고, 정당이 분열되는 것과 같이 시간에 의한 자연스러운 분리를 통해 이루어졌다. 우리는 낡고 무거운 깔때기가 자기의 무게를 부정하고 깃털처럼 대기에 둥둥 떠있으면서도 점점 자라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마지막으로 카메라를 향해 사진을 찍자고 합의했었던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이 사실 우연히 이루어졌다. 내가 그들과 아직도 한 몸이었다면 이런 소리는 감히 입에서 꺼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우연히라는 말만큼 부끄러운 말도 없으니까. 거짓말을 해서라도 나는 얕은 현재로부터 기나긴 과거를 쭉 늘이켜서 나를 주인공으로 한 신화를 자랑스럽게 타인들에게 들려줘 왔는데, 사실 그런 식의 자기 해명은 여기에서는 너무 당연한 것이어서 그 이유를 설명하기도 힘들고 남들 또한 그렇게 해왔지 않은가. 오히려 우연히라는 말을 꺼내는 것이 부끄럽고, 오늘날은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로 바뀌면서 부끄러워한다는 그 자체마저 부끄러워져서 나는 내가 부끄럽다는 사실조차 아주아주 깊은 곳으로부터 부정되면서 의식적으로 알아채지도 못했었던 것이다. 우리가 쪼개 지고 두 번째의 내가 셔터를 눌렀을 때, ‘아 맞다!’하고 머릿속에 떠올리게 된 것이다.

그래 아마도 우리는 필연성이라는 동력으로 작동하는 세상에서 도망쳐 나온 걸까? 그리고 그곳에서 떨어져 나오기 위해선 몸이 분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내가 부정을 저지른 것일까 아니면 내가 잠시남아 몸담았던 그곳이 부조리했던 것일까? 그곳 사람들은 100년 전에 카메라를 만들었다. 그 날카로운 기계를 통해 자기 자신을 사진 속에 담아내어 불멸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모두 죽어버리고 말았다. 몸만 흑과 백으로 남았다 뿐이지, 그들은 죽었다. 그들의 사진도 죽었다. 그들은 100년 전 사람의 옷을 입고 100년 전 사람의 머리스타일을 갖고 100년 전 사람처럼 웃어댔다. 우리가 깨달은 아주 잔인하고 충격적인 사실, 이미지 조차 우리에게 불멸성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싸이월드의 사진들은 이미 인스타그램의 사진보다 늙어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미지가 아니라 조금 더 추상적인 것을 찍기 시작했다. 시간 속의 평면적 이미지가 아니라 시간 자체를 사진 기안에 담아보자는 시도가 점차적으로 시작되었다. 신체와 시간은 분열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니 사실은 나조차도) 좁은 카메라 옵스큐라 안에 자신의 신체를 욱여넣어 한참 동안 그렇게 있다가 시간이 무엇인지 망각할 때 즈음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시간과 신체가 분리되고 시간은 존재에 영역에 속하게 될 것이라고, 뚜렷한 형체를 가져서 우리가 만질 수도 있고 먹을 수도 있다고 그렇게 믿었다. 

일련의 사건들을 다시 되짚어봤을 때, 오늘은 이러한 사진조차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시간의 틀에 영원히 갇혀있다.

나는 그들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 말을 하려는 지금 신체가 세 개가 되어서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으니 이제 어찌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혼란스럽다. ‘이제 어떡하지?’라고 하면 세 번째의 내가 ‘남들 하는 데로 해야지.’라고 말한다. 시선은 땅에 고정된 채로, 실존성으로 부터 벗어난 실존이야말로 진정한 실존이니까. 하며 말을 잇는다. ‘그들은 먼 미래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렇게 말해. 우리는 우주에 가게 될까? 영원히 살게 된다면 그렇게 할까? 윤리 없는 욕망의 시대가 도래할까? 이런 쓸데없는 질문을 계속해. 그럼 내가 대답하지. 남들 하면 하고 안 하면 안 하겠지라고. 그럼 걔네들은 웃고 말아. 근데 내가 틀린 거야? 사람들은 점점 더 멍청해지면서 자신의 실존성조차 장난감처럼 갖고 놀고 있는 거야. 마치 미래에는 자기들이 깊은 실존에 빠져서 선택하게 될 것처럼 무게 잡는데 지금 그들 스스로의 모습은 안중에도 없어. 그들이 아침에 옷을 입으며 <오, 내가 의복을 걸치는 이유는 사회가 규정한 법칙에 휘둘리는 무기력한 개인을 표상하는 가? 의복이 진정한 나의 개성과 정체성을 밖으로 드러내는 도구인가?>라고 하지 않잖아? 실존은 가슴속에 있는 것이 아니야. 요요 같은 거지 이제는. 손으로 조물조물하며 멀리 보냈다 당겼다 하며 재밌게 노는 그런 거.’

우리는 헤어졌고, 도착하면 카톡이나 보내라는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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