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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욱 Jan 15. 2021

창작하는 것보다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다.

디자이너 생존기 4




1.

처음 회사(인하우스)에서 유일한 디자이너로서 근무를 시작하면서 가장 빈번히 지적받았던 사항 중 하나는, 본격적으로 디자인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충분한 레퍼런스 서칭을 거치지 않는 성급한 태도였다. 나는 디자인 작업의 기존 골격을 만들기 위해서 프로젝트의 목적과 방향성을 정한 뒤 거기서부터 아이디어를 나 혼자의 창작력으로부터 구하는 것에는 익숙했지만, 레퍼런스를 찾는 과정을 거치진 않았다. 아무래도 20대 초반의 젊은 디자이너의 근거 없는 열정은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레퍼런스를 찾는 것은 창의력이 없는 사람이나 하는 거야! 그건 남의 작품을 카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남들과 다른 차이와 개성을 만들 줄 알아야 해!"


2.

꼭 상업 디자인에 국한되어서 뿐만 아니라,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작업물을 뽑아내는 스튜디오들 역시 기성에 존재해 온 디자인 언어들을 습득하고 해석하며, 그 언어를 해체하고 파괴하는 데에는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인 다는 것을 깨달은 건 입사한 지 1달 차쯤 되었을 때였다. 레퍼런스 서칭을 충분히 거치지 않은 나의 작업물들은 너무 미숙해 보였고, 소비자들은 새롭고 독창적인 디자인 광고보다는 편안하게 이끌어주는 시각 메시지에 더 편안하게 수긍한다는 사실을 점차적으로 깨달았다. 디자인이 관조하는 대상에게 자극과 놀라움, 재미를 주는 것과, 편안한 말로 설득한다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고 디자인이 추구하는 근본적인 가치는 후자에 더 가깝기 때문에, '특별함'에 목메는 디자인은 마치 대화 상대가 어떤 것을 요구하고 있고 원하는지에 귀 기울이지 못하고 자기의 이야기만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독단적이고 피곤하다.


3.

이렇게 전수되어온 디자인 언어를 파악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생각했었던 것보다 그리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매우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선택된 듯한 색상들은 사실 사진의 톤과, 분위기, 그리고 서체의 굵기에 따른 가독성 등 많은 요소들을 고려하며 선택되어야만 했다. 사진 보정은 자연스럽게 하기 위한 인위적인 효과가 매우 많이 들어갔고, 촌스러운 것과 낯선 것 사이에 종이 한 장의 두께처럼 끼워져 있는 적절함을 찾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너무나 어렵게 다가왔다. 눈은 조화를 너무 익숙한 것으로 파악하고, 손은 조화를 만드는 데 힘겨워한다. 이처럼 눈에 익숙해 보이는 조화를 찾아내고 제작하는 것이 디자인 언어를 습득하는 것과 같다. 말이 구전되며 변형되고 시대에 맞게 새로운 말이 생기기도 하듯, 언어란 오랜 시간을 거쳐 진화한다. 모국어를 구사하기란 쉽지만 학문으로서 국어를 공부하고 이론을 습득하는 것은 정 반대로 어렵듯, 디자인 또한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이미지들의 표면이 아닌 구조를 파악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4.

레퍼런스는 언제나 너무 완벽하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재료는 언제나 척박하다...  사실 레퍼런스를 많이 조사하면서 느끼게 되는 사실은 기획과 디자인이 완전히 분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정말 잘 된 디자인 작업물을 보면 어디까지가 기획이고 어디부터가 디자인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이미지 중심적인 기획의 놀라움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테면 상세페이지를 구성하는데 제품의 특성을 강조할 때에도, 일부러 시각화하기 유리한 요소들을 추려서 정리하고 사진으로 표현하는 식이다. 그러나 대개의 디자이너들은 이렇게 원활하게 기획자와 소통하기 힘들 것이며 문장으로 정리된 기획서를 받을 터이다. 그래서 레퍼런스를 보면 사실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아니 나도 저런 게 예쁜 사진이랑, 카피가 있으면 이런 디자인 뽑지!"라고 말이다. 


제품 특징 시각화의 끝판왕이라고 생각하는 FLEX TAPE의 광고. 덕테이프의 접착력을 강조하기 위해 쇼호스트가 전기톱을 들고 배를 두 동강 낸 뒤 테이프로 붙인 채 호수를 질주한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 자신에게 되묻는다. "만약 뛰어난 디자이너라면 나와 같은 식으로 생각하고 포기했을까?"라고 한다면 아닌 거 같다. 완벽하게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문제 해결 방법을 생각하는 것도 디자이너의 역량을 결정하는 요소 중 하나다. 제3의 안을 내서라도, 디자인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매우 매우 어렵고 굉장히 스트레스받기는 하지만 말이다...


5.

요즘은 그래도 일에 적응이 되어가는 듯하다. 레퍼런스를 찾으면서 어떤 스타일이 유행하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분석하는 과정을 거친다. 레퍼런스 참조가 단순 카피가 되지 않으려면, 항상 어떤 부분을 차용할 것이고 다른 부분에 차별화를 둘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레퍼런스 서칭이란 언제나 '언어 파악'이라는 명분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지, 어떤 디자이너가 하나의 전략으로서 내세운 특별한 요소를 차용하는 건 위험하다. 상대방의 말을 들으면서 언어를 습득하고 구사하게 되는 것과 같이 디자인에서도 디자이너들 간의 존중과 이해가 수반되어야 디자인 언어의 질을 높이는 한편 천편일률적인 디자인에서 개성 강한 디자이너들의 출현을 야기할 것이다. (사실 두 가지는 동시에 일어나고, 현재 진행형이다.) 아무튼 선임이 없는 나에게 있어서 지금은 레퍼런스가 선임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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