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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욱 Feb 01. 2021

해류병: 재난의 운동성

정유진, 코바야시 타이요 2인 전. 시청각 랩

레비 스트로스의 시선에서 엔지니어의 과학적 사고와 브리꼴라주의 신화적 사고는, 자연현상을 설명하려는 동일한 목적을 지닌다. 과학은 자연현상을 하나의 결과로써 환원하여 그것의 원인을 도출하고자 시도하는 한편, 신화적 사고는 우연적으로 혹은 경험적으로 잡다하게 주어진 것을 재종합하여 그 현상의 의도를 파악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신화를 유지하고 전수시키는 것, 즉 신빙성을 유발하는 것은 논리 혹은 물리적인 증명이라기보다는, 이 이야기가 전래되었다는 근원적 발화자의 파악 불가능한 좌표이다. 마치 어디로부터 흘러들어오고 흘러가는 과정에서 주체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주체는 단지 거대서사의 참여자로서 주어진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흔히 비가시적이거나 부조리한 현상에 관한 이해에서 언어는 과학보다 더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은나노, 원적외선, 게르마늄, 음이온 등, 과학의 이름으로 철저히 무장하고 있는 마이크로 단위의 기호들이 값비싼 상품들을 팔아치우는 것을 보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회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을 넘어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회라는 수식어가 이젠 디즈니 랜드의 미키의 얼굴처럼 활짝 웃어 보이는 듯하다.



신화의 사고는 합리적인 지점을 한참 벗어난 코로나 19의 전 세계적 대유행의 사태를 기점으로 담론의 중심으로 옮겨오고 있다. 바이러스의 전이 경로와 예방수칙은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가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원인과 결과라는 논리로 바라보기엔 사태는 너무나 가깝고도 어렵기 때문이다.


정유진 작가의 작품관은 이처럼 논리로 환원할 수 없는 재난의 도래가 주는 충격과 그런 사이의 틈에서 일어나는 비이성적인 판단들에 집중을 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을 해 보는데, 점쟁이 문어 파울의 움직임에 의지를 해석하고 파악하고 의미를 형성해가는 타자로서의 인간들이 어떻게 불가해한 영역을 손아귀 안에 잡아채어 금으로 된 문어 모형을 만드는지를 탐구하는 이유도 재난과 동떨어지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 아닐까 한다. 재난은 단지 감춰져 있던 믿음을 표면으로 가시화시킬 뿐이다.



코바야시 타이요의 작업에서 등장하는 '누레부츠'라는 이름의 불상은 이시노마키시 해안을 따라 걸으며 인물들과 전화통화를 하며 안부를 묻는다. 농담과 웃음기 섞인 대화는 어색함이 감도는 것 같기도 하면서 따듯하게 들려온다. 크로마키 합성으로 풍경이 그려진 형체를 한 불상의 실루엣은 존재와 부재의 중첩을 표현하는 듯하다. 


정유진 작가의 작업은 작가 본인의 맥북과 앉을 수 있는 설치작업, 그 속에 아크릴 판으로 덮인, 전 작업들의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카탈로그에는  '더미 데이터'를 재료 삼는 장례식이자 사무실 기능을 하는 설치작업이라고 적혀있는데, 정확히 더미 데이터가 어떤 방식을 통해 전시물의 형태로 구현되었는지는 맥락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돌의 텍스쳐와 좁은 틈으로 유추해봤을 땐 지진을 표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설치나 조각을 하는 작가들은 부족한 공간으로 인해, 전시 이후 작품을 폐기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장례식이라고 명명한 데에는, 죽음이라는 단절보다는, 사자와 내가 이제는 전과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제의적 대화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전시장을 처음 들어서면 정유진 작가의 공간을 채우는 설치 작업이 눈에 띄고 코바야시 타이요 작가의 영상 작업으로부터 일본어가 들려온다. 영상 속에서 인물들은 걸어가고 설치작업물속 조각은 아크릴 판안에 차분하게 정지해있다. 시간적인 부분과 공간적인 부분을 두 작가가 서로 분리하여 역할을 맡은 것이, 가까운 동시간대에 있으나 본인들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재난, 직접 경험하지 않은 타지의 재난이라는 카탈로그 속의 전시설명과 연결되는 것 같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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