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습관처럼 항상 너무 어두운 것에 관해 쓴다. 그것은 내가 어두운 사람이어서가 아니라(나도 모르게 그런 사람일 수도 있으나) 어두운 것에 관해 쓰는 것이 즐겁기 때문일 뿐이며, 일종에 개인적인 글에서 장르적인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따라서 나의 부정적인 것들에 관해서 나열하고 소개하고 특정짓는 것은 나 이렇게 부정적인 사람이오 하고 과시하거나 자기혐오하려는 목적에서 기인하는 것도 아니고, 치유나 진단행위도 아닌 것으로 이 텍스트가 전개하기 위한 특정한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다. 픽션에 인물이 어떤 상황에 쳐해 어떠한 장르적 관계를 마주하는 지에 따라 문단이 넘어가는 것 처럼 나도 나의 글쓰기를 전개하기 위해 손의 움직임이 아닌 그 외적인 환상적인 체계가 필요하단 말이다. 그러한 체계가 나에겐 부정적인 것들이었고 그런 체계에 말미암아 습득된 글쓰기가 여기까지 지속되었다. 따라서 나의 글쓰기는 오컬트에 가까운 공포영화와 비슷한 것이겟고 그러한 점이 내가 그러한 세계만을 긍정하겠노라 말한다는 것은 아니다. 나도 밝은 텍스트를 좋아한다… 내가 어떤 세계를 열어젖힌다하여 기존에 존재했던 형식에 변화하는 것은 없다. 이러한 점을 한번 더 언표하는 이유는 텍스트가 필연적으로 단일한 주장을 밀어붙이는 속임수에 능하다는 점이고, 당신이 그렇듯이 나 또한 속아넘어가기 쉬워서 다소간 망설이면서 글을 시작하고 싶기 때문이다. 말과 달리 글은… 말을 더듬지도 않고 씹히지도 않고 작게 중얼거리지도 않아서 망설임을 표현하기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자기부정이라는 모순의 방식을 써서 단어를 내뱉어가는 것이다.
죽음에 관해서 써볼까? 저번 주엔 외조부의 장례식이 있었다. 나는 외손주였지만 어쨌든 손주이기에 삼베로 된 완장을 차고 있었다. 있었던 일들에 대해선 크게 묘사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건 어쨌거나 큰 의미가 없다. 장례에서 문제시 되는 것은 실제로 그 3일간의 시간동안 어떤 일이 있었냐라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동안 기억되는 이미지들이 순환되는 방식 뿐이다. 내 생각에 우리는 아직 사람이 죽는다는 사건을 어떻게 형식화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아직도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의례적인 장례행사도 무언가 미완성되었다는 불안과 엄습함이 가시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을 마주하지 못해서 완성되지 못한 마음들이 거기서 벌어지는 모든 ‘행해야만 하는 행위’들을 미완성으로 무너 뜨리고 마는 것이다. 술은 마시되 너무 취할 때 까지 마시면 안되고 조문객은 오래 있되 너무 오래있으면 안되는, 제사 지내야 하는 시간에 누군가가 지각을 해서 다 같이 기다리는, 조문객 방문시 장손은 조문객을 맞아야 하지만 다른 조문객과의 만남으로 약간 늦게 도착하게 되는 시간의 지연과 행위의 명확하지 않은 끝맺음들이 계속해서 명확한 언표를 미루는데, 이는 마치 향의 연기가 멈추지 않는 것과 같이 사건을 맺지 않으면서 우리의 판단을, 그러니까 이 죽음이라는 사건의 판단을 미루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장례의 시간에서 계속 터져나오는 이러한 구멍들이 오히려 사건의 일부로서 지나간다는 감각을 부정할 수 없었다.
죽음을 각자의 방식으로 정의하고자 하는 임의적인 형식의 충돌 또한 존재한다. 우리는 장례지도사의 말을 따른다. 그는 최대한 정중하고 예우를 갖춰 우리가 가야할 곳, 행해야할 의례에 대해 소개한다. 그는 이 공동체에서 유일하게 고인과의 관계 바깥에 있는 자로서 그러나 이 사건을 의례로 행할 수 있는 자로서 우리에게 길을 제시한다. 처음 내딪는 어느 국가, 도시라도 문지기가 존재하고 초월적인 사건의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외할머니와 작은 외할머니는 영정 앞에서 곡을 하셨다. 곡은 의례화된 울음으로 일종의 리듬과 운율, 클리셰를 지니고 있다. 형식의 엄격성은 다르지만 할머니께서는 어느정도 형식을 갖춘 곡을 하기도 어르신들께도 곡을 권하였다. ‘곡을 할땐 해야 돼!’하며 말이다. 우리는 그러한 오래된 형식들에 대해서 터득하지 못해서 일상적인 언어들을 빌려서 메시지를 전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말이 실제로 전해질지 전해지지 못할지 기대하지 못한채로 일상의 언어들을 내뱉는다. ‘잘 지내세요’ ‘편안하세요’하는 안부의 말들은 우리가 내일을 대하는 방식을 터득하면서 서로에게 불러주던 말들이다. 단어들은 또 다른 내일을 호출하면서 고인의 자리를 만들어 주는 듯 했다.
나는 슬픔을 잘 표출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누군가 슬픔에 잠겨있을때 챙겨주고 부족함을 메워주는 방식의 행위가 더 맞다. 그런 의미에서 공동체 안에서 발화하는 슬픔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승화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서 오히려 나는 감정의 주체보다 그 감정, 타인의 감정에 의해 추동되는 행위의 의무를 의식하며 당위성을 찾는다. 한국 뿐 아니라 외국도 마찬가지겠지만 가족의 죽음은 살아있는 자들의 미래를 위한 낙과로서 책임관계를 설정하는 듯 하다. 또 다시 우리는 몸의 존재이면서도 동시의 언어적 존재라는 것을 느끼고 언어 관계로 엮여있는 생을 초월한 시간 앞에서 나는 계속 연결되는 미래를 마주한다. 가족들은 각자의 신앙의 체계로 미래를 바라보았고 나는 기억의 빛을 통해서 그것을 들여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