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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오라비행 Aug 03. 2019

스무살 초반대의 공간

목요슬


대학 기숙사 : 1, 2학년 의무 기숙사 제도가 있는 학교를 다녔다. 다 큰 성인들이 밤 11시에 점호를 받고 학기 중 평일에 3번만 외박이 허용되는 학교였다. 기숙사에 살면서 벌점을 21점 이상 받으면 3, 4학년 때 다시 기숙사에서 살면서 봉사활동, 특강 듣기, 환경정화활동 등 이상한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졸업이 되는 시스템이라 매 학기마다 20점으로 벌점을 마감하기 위해 노력했다. 매일 밤 11시가 다가오면 여자 기숙사 앞은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커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들은 손깍지를 끼고 서로를 당기면서 웃으며 눈을 맞추고 껴안고 때로는 가벼운 키스를 나눈다. 그러다 10시 58분쯤 되면 드디어 작별인사를 마치고 신데렐라처럼 본인의 기숙사로 뛰어간다. 12시는 벌점 2점을 받고 기숙사 출입문이 열리는 마지노선이었는데 이 이후에는 비공식적으로 문을 따고 들어오던지 아니면 아침 6시까지 기다려야 했다. 야식을 시키면 개구멍을 찾거나 창문으로 랜선을 내려서 받아먹었다. 3인실이나 2인실 건물은 공용화장실과 샤워실을 사용했다. 샤워실에는 개인 칸막이가 없었다. 아침에 나체로 샤워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옷을 입고 머리를 감으러 오는 것이 그렇게 민망할 수가 없었다. 돈이 안 들어서 좋긴 했지만 갑갑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출입문은 잠겨있고(사실 그걸 따고 나간다고 해도 주변에 갈 데가 없었다) 갈 데라고는 옥상밖에 없어 자주 옥상으로 올라갔는데 그마저도 답답해 지붕 위에 앉거나 누워있을 때가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미친 짓이지만 경사진 지붕 위에 걸터앉아 별도 보고, 맥주도 마시고, 기타도 쳤다. 기숙사에 대한 유일한 좋은 기억이다.


학점교류를 가서 엄청난 서울의 집값을 피하기 위해 그 대학의 기숙사에 사는 방법을 발견했다. 아파트 건물처럼 생긴 기숙사는 셰어하우스처럼 각 호실마다 방 3개가 있고 그 방은 2인 1실로 나머지 거실, 욕실은 다른 하우스메이트들과 공용으로 썼다. 방은 아주 심플했는데 기억나는 건  높이가 애매한 1.5층 침대가 있어서 술 먹고 올라가기 힘들었다는 것. 기숙사의 분위기도 자연스러워서 따로 통금시간도 없었고 배달음식도 자유롭게 시켜먹었다. 예전 학교 기숙사처럼 올라갈 지붕은 없었지만 가끔 밤늦게 조용히 나가 벤치에서 앉아있다 왔다. 같이 온 친구들은 기숙사에 살지 않아서 그 공간에는 아는 사람이 룸메이트 말고는 한 명도 없었다. 외로웠고 그즈음 이별을 했어서 날마다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면서 울고 울고 울었다. 같이 학점교류 왔던 친구가 가끔 생존을 확인하러 왔다가 조용히 돌아갔다. 동시에 술을 매일 마셨는데 (역시 종합대는 캠퍼스 어디든 1학기에는 주점이 열렸다) 술 취해서 자는 것, 우는 것 말고 기숙사에서 한 게 없다. 공부도 물론 안 했고...(수업은 좋아했다) 당연히 공간에 대한 애정은 1도 없었다. 조용히 한 학기 살다가 나왔음.

밴쿠버 다운타운 거실 셰어 : 방 1개와 거실로 구성된 작은 아파트에 총 3명이 살았다. 달에 30만 원 가까이를 주고 매니저 언니와 거실의 반을 나누어서 생활했다. 그 당시 워킹홀리데이를 온 한국인들은 높은 렌트비 때문에 다들 그렇게 작은 집에서 3명 혹은 4명과 살았다. 혼성 셰어하우스도 있었고, 어떤 집은 8명까지 같이 사는 곳도 보았다. 다운타운과 가까운 적당한 거리에 있는 주택가였다. 1달도 채 되지 않아 캐나다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매료되었다. 강가를 따라 조깅을 하고, 공원에서 바비큐를 하고, 반려동물을 산책시키고 뭐 그런 게 특별한 휴가라던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멋짐이 아니라 그냥 일상적인 것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일하러 가는 것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서=친구도 없어서 하루에 두 시간씩 산책을 했다. 개 공원을 보고 놀라고, 술은 편의점이 아니라 리큐어 스토어에만 판다는 사실에 또 놀라고, 홈리스인데 엄청 큰 개랑 같이 길거리에서 사는 것에 놀라고, 계속 계속 놀랐다. 같이 살았던 매니저 언니는 스타벅스에서 일하는 사람이어서 항상 맛있는 원두를 가져왔다. 카펫이 깔려있고 책상 창문에는 블라인드가 쳐져있던 아늑한 집. 내가 생선을 굽다가 화재경보기를 울리게 한 집. 건물 1층에 빨래방이 있던 집. 건조기를 처음 써본 집. 이케아 스탠드를 항상 켜놨던 집, 그래서 처음으로 주황색 불빛으로만 살아본 집.


버나비 룸 셰어 : 긴 여행 후 집값이 좀 더 싼 외곽에 새로 집을 구했다. 이층 집에서 1층 안방을 렌트했다. 너른 침대, 테이블 하나가 다였지만 사랑에 빠져있었던 터라 아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다운타운에서도 메트로로 이십여분을 타고 나와야 하는 곳이라 그런지 굉장히 조용했고 8시면 아주 깜깜해졌다. 미국 영화에서 봤던 그런 작은 village 였다. 쉴 때는 공원에 가서 바비큐를 하거나 원반 던지기를 하면서 여유롭게 놀았다. 사실 집에 대한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데 별 특징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고, 그때  우리의 배경 정도로만 존재해서이기도 하다. 뒷마당에서 비가 내리는 걸 함께 지켜본, 처음으로 해본다던 까르보나라, 전자레인지가 아닌 오븐은 처음 다뤄본, 캐나다 버드와이저,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대학교 캠퍼스에서의 낮잠 피크닉, 새로운 직장에 함께 레쥬메를 보냈던, 해장하러 자주 갔던 쌀국수집. 월급을 받고 삼겹살에 소주를 먹었는데 100불이 나온 날. 심심하면 집 앞 1불 샵을 구경하며 키득대던. 때로 트레인을 타고 다운타운에 춤추러 가던. 둘만 있으면 어디든 사랑 필터가 씌워져서 아름답게 보였다. 심지어 집주인이 누구였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이후 시간들에서 나는 어디에 사는지만큼 중요한 것이 누구와 사는지라는 걸 깨달았다.

#aoraxbiheng #아오라x비행공간 #여기서살거야 #목요슬 #일주일에하나씩 #어디서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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