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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오라비행 Aug 03. 2019

현재 주거지

목요슬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온 지 이제 육 개월 정도 되었다. 이 곳은 내가 혼자 살아온 집들 중에서 가장 넓고 또 채광이 아주 좋다. 테라스는 없지만 작은 다용도실이 있고 넉넉한 싱크대가 있어 요리를 하는 중간에 설거지를 할 필요가 없다. 얼마 전 알게 된 사실이지만 거실 창문 바깥으로 설치된 에어컨 거치대에는 화분을 올려둘 수 있다. 습한 날씨가 조금 지나가면 몇 가지 식물을 더 들일 생각이다. 거실에는 4x3의 책장이 벽 한 면을 차지한다. 책장 안만큼 책장 위를 주기적으로 바꾸는 편. 이제 한여름이 시작되었기에 바닥에는 러그 대신에 대자리를 깔 것이다.

전세방에 살게 되면서 알게 된 것들이 생겼다. 우선, 그간의 월세방들은 잠시 얹혀살 것이라는 이유로, 혹은. 비싼 월세에 대한 대가로 주어지는 옵션들 덕분에 짐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아닌가?) 놀랍게도 투룸 전세의 경우에는 옵션이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옵션이 있는 집도 있지만 보증금이 억으로 뛴다) 직업 특성상 몇 년 후에는 옮겨 살아야 하는데 어떤 곳으로 가게 될지 모른 상태에서 이 집으로 오는 것이 옳은가는 고민을 가장 많이 했다. 요새는 도배와 장판도 보통 주인집이 아니라 세입자가 해서 들어오더라. 기차 레일처럼 벌어진 데코타일을 덮고 목련 500송이의 포인트 벽지를 없애기 위해 꽤 많은 돈이 나갔다. 뿐만 아니라 은행 전세대출의 경우 전세금 승인이 나면 내 통장이 아니라 바로 주인집 통장으로 들어간다. 돈은 내가 빌렸는데 내 통장에 스쳐 지나가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내 소득을 증빙하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서류가 필요한 줄 미처 몰랐다. 두 달가량 이사 준비를 하며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인생은 실전이구나... 나는 JohnMan이구나’

물론 이제 겨우 대출금 백오십만 원을 갚은 나는 온전한 나의 자본으로 이 공간의 0.015퍼센트 정도를 대여(소유가 아님)하고 있는 셈이지만 나는 이 공간에서 특별한 안정감을 느낀다. 이사 전날 밤까지 엎어버리고 적당히 괜찮았던 풀옵션 월세방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도 분명 있었다. 그럼에도 나를 무사히 이사까지 끌고 간 것은 바로 독신여성 프로토타입이다. 취한 채로 가구들을 주문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빈티지한 냉장고, 소파, 크고 흰 원형 테이블 뭐 그런 것들이 집안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여기가 당연히 완벽한 집은 아니다. 몰딩이나 화장실, 간접 조명은 모텔 시공사가 집을 지은 건가 싶을 정도로 투머치이기도 하고. 특히 보라색의 간접 조명 세 개는 우리 집에 놀러 오면 꼭 봐야 하는 명물로 다들 경악을 금치 못한다.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가리기 위해 인터넷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본인의 공간을 정성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벽을 부수고, 칠하고, 뭔가를 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서 고생하며 자신이 머무르는 공간에 본인의 취향과 철학을 담고 있는 사람들. 완벽히는 아니지만 몇 년에 걸쳐서 집을 짓는 사람들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기도 했다.

주말에 소파에 누워서 음악을 듣고 있으면 가끔 무서워진다.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살았는데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아진 것 같아서. 이렇게 많은 대출금을 갚기 위해서 일을 그만두지 못하게 될까 봐. 안락한 삶에 익숙해져서 다들 이렇게 산다고 믿게 될까 봐. 이렇게 그럴듯한 공간까지 가졌는데 내 삶은 불행해질까 봐. 이번 달은 야근이 정말 많았다. 일찍 퇴근하면 여덟 시, 늦게 퇴근하면 열 시. 작년에도 미워한 상사를 올해도 열심히 미워하고 있다. 어떻게든 뾰족한 마음을 달랠 곳은 내가 만들어놓은 이 공간밖에 없었다. 써놓고 나니 조금은 외롭지만 그래도 사실이다.


#목요슬 #아오라x비행공간 #아오라비행 #여기서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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