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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오라비행 Aug 16. 2019

[목요슬] 나랑 같이 살자

프러포즈 아님. by.정대백


20대가 되며 본격적으로 1인 가구가 되면서 했던 고민들 중 하나는 ’과연 내가 10년 이내에 누군가와 같이 살 게 될 것인가’이다. 20대 후반 결혼하지 않은 이성애자 여성으로서 이 질문은 ‘결혼 제도에 성공적으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인가’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삶에서 예고하지 않게 불어오는 ‘취업해야지’ ‘결혼해야지’ ‘돈 벌어야지’라는 무언의 태풍들을 겪으며 나름대로 벽돌집을 짓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사를 하게 되자 그 틈 사이로 어떤 의문이 실려왔다. 결혼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혼자 살 전셋집을 2년이나 계약해도 되는지, 냉장고와 침대, 세탁기, 에어컨들을 몇 년 동안 쓸 생각을 해야 하고 대체 몇 리터짜리를 사야 하는 건지와 같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가 있는 것도 아닌데(결혼은 뭐 하고 싶다고 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이런 질문들에 쉽게 진지해져서 인터넷 쇼핑몰을 띄워놓고 자주 머뭇거렸다.

결혼은 두 개인의 결합이 공식적임을 인정받는 사회적 제도라는 측면에서 결코 개인적인 낭만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부부가 되고 그들이 주민등록등본 상에서 하나의 가족이 될 때 그들은 국가가 신혼부부에게 제공하는 여러 혜택과 법적 안정성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물론 이 혜택들은 다음 세대를 재생산하도록 자연스럽게 유도된다.) 그러나 다양한 섹슈얼리티에 대한 존중 없이 여와 남의 결합만이 결혼 제도로 공식화되는 것의 불평등함을 지적하는 것까지 나아가지 않더라도 여와 남의 결합 속에서도 사회적 불평등은 여전히 잠재되어 있다. 결혼 제도에 편입하면 자연스럽게 떠맡게 되는 아내로서, 엄마로서, 며느리로서의 역할에는 여전히 여자가 애를 키워야지, 여자가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지, 여자가 부모들을 살뜰히 챙겨야지와 같이 개인이 깨기 힘든 사회적 시선들이 따라온다.


뿐만 아니라 결혼은 경제적 차원에서도 자본주의의 팽창과 결합되어 있다. 자본은 미디어를 통해 결혼식과 신혼집에 대한 환상을 끊임없이 생산한다. 인생에 한번뿐인 결혼식의 빛나는 신부, 그들 앞에 놓인 장밋빛 인생처럼 아름다운 신혼여행지, 아이가 태어날 것을 대비하여 적어도 방이 세 개는 있어야 하는 아파트. (30대 중반 남성들에게 SUV를 선호하는 이유를 물었을 때 나중에 가족이 생겼을 때 아이를 태우기 위해서라는 대답을 많이 들어보았다) 이 모든 것은 결혼 산업에서 만들어내는 상품들을 소비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존 버거는  ‘ Ways of Seeing’에서 우리가 비록 돈을 써 버려서 전보다 가난하게 되더라도 우리가 조금 더 사들인 바로 그것들이 다른 면에서 우리를 부유하게 해 줄 것이라고 얘기한다’라고 말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소비 행위가 그렇지 않겠냐만은 결혼처럼 낭만적이고 속물적인 아이템이 있을까


이렇게 되어버리자 질문은 더 커져버려 나는 언제일지 모르는 결혼 전의 ‘미혼’ 여성인가 결혼을 내 삶의 선택지로 두지 않을 ‘비혼’ 여성인가. 로 나아갔다. 사실 미혼 여성의 정체성이 불안한만큼 비혼 여성의 정체성 또한 두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트위터 사람들이 비혼이면 돈도 더 많아야 하고, 운동을 많이 해서 건강해야 하고, 액티브한 페미니스트여야 하고, 외로움에 무뎌지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듯 처음 비혼을 고민할 때에 나는 ‘외로움에 취약한 닝겐아, 비혼이라니 너 쓸쓸한 노년을 견딜 각오는 되어 있는 거냐?’는 아주 무서운 목소리를 자주 들었다. 그 속에서 이사를 했고, 번듯한 나만의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이들을 초대해서 맛있는 것을 먹고 교육과, 예술과, 영화와 음악과 현실의 고단함, 앞으로 되고 싶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시간들을 지나며 나이브해진 나는 삶은 어딘가에 욱여넣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렇게 사는 거 아냐?라고 말하게 되었다.

우리가 무엇이 되기로 선택하는 것은 언제나 사회적인 영향을 받고, 또 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선택에는 정치적, 윤리적 책임이 따른다. 그러나 스스로를 긍정하고자 하는 이 선택들이 비정상적인 정상성의 규범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마이너리티한 욕망들을 드러내는 것과 결부되어 있다면 그 자체로 대안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나의 짧은 8년의 주거를 되돌아봤을 때 그곳에 살 때 참 좋았지라고 떠올려지는 기억들은 (자발적으로 선택한) 누군가들과 함께 있을 때였다. 룸메이트, 하우스메이트, 동거인, 반려묘, 반려 식물 등.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나는 그래야 해서가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누군가와 함께 살고 싶다. 청소도 잘 못하고 화장실 불도 자주 켜놓지만  열심히 고쳐볼 생각이다. 운 좋게도 이런 글을 쓰고 있을 때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들이 몇 있다.

그 사람이 공유는 아닙니다만.... 나도 내가 같이 살만한 사람이 되고 싶다.


필요한 만큼의 프라이빗한 공간은 충분히 보장합시다.

집안일은 나누어서 하되 구성원들 중 한 명이 없더라도 집이 엉망이 되지 않도록 상대의 집안일 역시 신경 씁시다

서로가 걱정할 수 있으니 가능하면 귀가 시간을 알려주고 가끔은 같이 밥을 해서 먹읍시다.

집에서 잠만 자는 것이 아니라 재밌는 일들을 같이 합시다

각자의 반려동물과 반려식물을 아낍시다

상대가 못 견뎌하는 것들을 고치기 위해 노력합시다.

생활비를 미루지 말고 입금하고 가계부를 함께 씁시다.

미안한 마음으로 같이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대화를 통해 해결책을 만듭시다.

상대의 연애와 섹슈얼리티, 정치관, ~이즘을 존중합시다.

상대의 동의를 구하고 집에 손님을 초대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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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나면 계속 추가하겠습니다)


- 이상 구질구질한 예비 비혼 여성 1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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