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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오라비행 Sep 14. 2019

산에 다녀와서

정대백 혹은 목요슬

오늘은 원대리 자작나무 숲에 갔다 한 시간 정도 오르막길을 꾸준히 올라가야 하는 코스였다 오랜만에 하는 트레킹이라 발가락과 복숭아뼈 아래가 좀 욱신거리기는 하지만 길이 잘 만들어져 있어 편했다 본디 나무로만 빽빽하게 덮여있었을 산에 나무를 베고 길을 내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물론 더 많은 사람들과 차가 편하게 다닐 수 있지만 아무래도 포크레인으로 산을 할퀴어 주욱 긁어버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숲 탐방로라는 다소곳한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아주 널찍한 큰길을 걷는 것이 왠지 머쓱했다 산에 사는 동물들 나름대로 길을 만들며 살겠지만 인간의 길은 필요 이상으로 적나라하다



한참 걷다 개구리임이 분명한 어떤 흔적을 보았다 길을 지나다 거대한 것에 깔려 순간적으로 바닥에 눌어붙은 것 같았다 개구리는 그렇게 바닥에 영구 박제가 되었고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징그러워하며 혹은 킬킬대며 그것에 대해 모두들 한 마디씩 했다 나는 왠지 좀 애잔해졌는데 그도 그럴 것이 운전을 시작하면서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로드킬을 당하고 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에는 뉴스에 간혹 나오는 일이라 생각했지만 운전을 하다 보면 고양이는 물론이고 수많은 동물들의 사체를 일주일에 한두 번 꼴로 보는 것 같다 내장이 드러난 채로 쓰러져있기도 하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 곳곳에 널브러져 있다. 처음에는 구청에 전화를 걸어 치워 달라고 부탁했지만 이제는 나도 무감해져서 못 본 척 지나칠 때가 더 많다


어제 독서모임에서 대화의 주제가 인간의 죽음과 자본이었다 요양병원에서 일한 친구로부터 오래 아프고 죽은 사람들, 죽은 이후에도 병원비를 할부로 내야 하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자주 침묵했다. 지나가는 말이라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자본의 소유에 따라 우리가 각자 다른 크기의 존엄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구조 속에서 그 사람이 일을 그만둔 이유가 그런 어쩔 수 없는 것들을 견뎌내지 못한 것이라고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동물의 죽음은 대수롭지 않게 치부된다 우리들은 동물을 사랑하지만 주로 귀여운 동물들을 사랑하고 그렇지 않은 동물들이 귀여움을 뽐낼 때 더 사랑한다 그들의 죽음은 고기, 가죽, 털 등 인간을 위해서 행해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알 수 없다. 그들은 어디서 죽고 있지?


어디서에 대한 대답은 확신할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인간의 적나라함으로 죽고 있다. 인구는 줄지만 매년 늘어나는 이 나라의 신도시들과 관광지와 그곳에서 소비되는 엄청난 플라스틱 때문이라는 것을 무감하고 게으른 나마저도 느낀다


그럼에도 죄책감 없음을 어쩔 수 없음으로 포장하는 행위를 앞으로도 셀 수 없이 반복할 것이다. 너무 익숙해서 무의식적으로 그래 왔던 것처럼. 우리가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죽음을 빚져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적어도 거기에 죽음이 있다는 걸 모른 척하는 사람이 되지는 말아야지. 낯선 것들을 서늘하게 바라보아야지. 좋은 곳에 가면 나도 거기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게는 산과 바다가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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