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김] 난 누구 여긴 어디
학교에서 교사라는 직함을 얻고 일한 지 기간제를 포함해 2년이 넘어가고 있다. 그간 학생들의 다채로움, 학교의 무채색, 나의 의지와 무의지를 경험했다. 학생들의 몸짓과 표정을 지그시 바라보면 가끔은 낯설고, 가끔은 익숙해짐이 신기하다. 처음의 긴장어린 눈빛, 공간과 사람에 익숙해지면서 나오는 그들만의 빛깔.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까지는 학생들의 정을 많이 받았다. 애정이 깃든 말과 장난 어린 행동들. 각자만의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가는 모습들. 이에 비해 학교는 지극히 흰색과 검정색과 회색뿐인 것만 같다. 학생은 미숙한 존재이기에 통제받아 마땅하다는 혐오적 시선, 너를 아끼기에 처벌하는 거야 식의 기이한 사고 패턴과 실천 방식들. 이러한 교사집단의 무력한 집단 사고 방식을 좀 먹듯 흡수하는 나. 더 쉽게 화를 내고, 올라오는 죄책감이나 회의감을 누르다가, 돌아볼 여유가 되면 이 곳을 떠나면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상상하곤 하는 요즘이다.
학생들을 학교가 아닌 곳에서 만나고 싶다. 수업 시간보다 쉬는 시간에 보내는 학생들과의 시간이 좋다. 더불어 나는 집단에 능한 사람이 아니다. 최대 4명 정도의 소수 관계에 편안함을 느낀다. 누구도 리더가 되지 않아도 되고, 모두가 서로의 빛깔을 알아보고 느낄 수 있는 정도의 거리가 좋다. 학교에서 10분 거리에 방을 구해 살고 있어 학교 밖에서 학생이었던 이들을 볼 일이 종종 있다. 한껏 꾸미고 놀러가는 학생이었던 이들을 보기도 하고, 내 집 앞에 연락을 주는 친구도 있다. 그렇게 우연히 또는 찾아와주어 만나는 학생이었던 이들과는 자연스러운 만남이 이어진다, 내가 마주한 친구와의 친밀한 정도를 보고 다른 학생이 느낄 소외감이나 학교 시스템 넌지시 요구하는 ‘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지금 서로가 느끼는 감정과 관계에 솔직해질 수 있다. 한편, 학교는 그럴 수 없다. 늘 다수의 집단 속에서 관계를 맺어야 한다. 학생 한 명 한 명을 보기에는 마음의 여유가 턱없이 부족하다. 출근해서 수업과 전체 생활 지도를 하고, 학생들이 교과 시간을 간 사이에는 틈틈이 각종 잡다한 업무-그 중에는 정말 이걸 학생들을 교육하라고 뽑았다는 ‘교사’가 해야하나 하는 일들이 있다. 예를 들면 스쿨버스 명단 관리, 과학실 공사 관리, 전산 시스템 관리, 청소 용품 구입 등.- 를 처리한다. 쉬는 시간에는 부진아 지도, 점심 시간에는 급식 지도. 학생 전체를 관리하다보면 금세 하교 시간이다. 학생들이 가고서 남은 2시간 남짓한 퇴근 전의 시간에는 다음 수업들을 준비하거나 앞서 끝내지 못한 잡다한 업무를 하다 끝난다. 학생’들’이 아니라 학생을 보기 위해서는 시간을 더 쪼개고 쪼개야 한다. 그러기엔 가지고 있는 기량이 충분치 못하다.
학교에서 교실의 모든 학생들이 규칙을 잘 지키고, 수업 시간에 집중해서 모든 활동을 제 시간에 끝내는 반을 ‘그림 같은 반’이라 한다. 한때는 나치같은 방식이 아닌 민주적인 방식으로도 그러한 반을 만들 수 있다는 환상도 가져보기도 했다. 민주적으로 함께 생활 규칙을 세우고, 학생들의 삶과 연결지어 과거, 현재, 미래를 이어나가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정해진 공간과 시간에부터 그들은 그들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하루를 보내야 한다. 통제가 디폴트인 공간에서 방식이 민주적이든, 강압적이든 박탈당함과 통제당함은 박탈당함과 통제당함일뿐이지 않을까.
- 학교를 교도소로, 교사를 교도관으로, 학생을 수감자로 바꿔 읽어본다면,
교도소에서 교도관이라는 직함을 얻고 일한 지 기간제를 포함해 2년이 넘아가고 있다. 그간 수감자들의 다채로움, 교도소의 무채색, 나의 의지와 무의지를 경험했다. 수감자들의 몸짓과 표정을 지그시 바라보면 가끔은 낯설고, 가끔은 익숙해짐이 신기하다. 처음의 긴장어린 눈빛, 공간과 사람에 익숙해지면서 나오는 그들만의 빛깔.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까지는 수감자들의 정을 많이 받았다. 애정이 깃든 말과 장난 어린 행동들. 각자만의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가는 모습들. 이에 비해 교도소는 지극히 흰색과 검정색과 회색뿐인 것만 같다. 감옥수는 미숙한 존재이기에 통제받아 마땅하다는 혐오적 시선, 너를 아끼기에 처벌하는 거야 식의 기이한 사고 패턴과 실천 방식들. 이러한 교도관 집단의 무력한 집단 사고 방식을 좀 먹듯 흡수하는 나. 더 쉽게 화를 내고, 올라오는 죄책감이나 회의감을 누르다가, 돌아볼 여유가 되면 이 곳을 떠나면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상상하곤 하는 요즘이다.
수감자들을 교도소가 아닌 곳에서 만나고 싶다. 활동 시간보다 휴식 시간에 보내는 수감자들과의 시간이 좋다. 더불어 나는 집단에 능한 사람이 아니다. 최대 4명 정도의 소수 관계에 편안함을 느낀다. 누구도 리더가 되지 않아도 되고, 모두가 서로의 빛깔을 알아보고 느낄 수 있는 정도의 거리가 좋다. 교도소에서 10분 거리에 방을 구해 살고 있어 교도소 밖에서 수감자였던 이들을 볼 일이 종종 있다. 한껏 꾸미고 놀러가는 수감자였던 이들을 보기도 하고, 내 집 앞에 연락을 주는 친구도 있다. 그렇게 우연히 또는 찾아와주어 만나는 수감자였던 이들과는 자연스러운 만남이 이어진다, 내가 마주한 친구와의 친밀한 정도를 보고 다른 수감자가 느낄 소외감이나 교도소 시스템 넌지시 요구하는 ‘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지금 서로가 느끼는 감정과 관계에 솔직해질 수 있다. 한편, 교도소는 그럴 수 없다. 늘 다수의 집단 속에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수감자 한 명 한 명을 보기에는 마음의 여유가 턱없이 부족하다. 출근해서 전체 생활 지도를 하고, 수감자들이 노동 활동을 간 사이에는 틈틈이 각종 잡다한 업무를 처리한다. 휴식 시간에는 순찰 지도, 점심 시간에는 급식 지도. 학생 전체를 관리하다보면 금세 시간이다. 수감자’들’이 아니라 수감자를 보기 위해서는 시간을 더 쪼개고 쪼개야 한다. 그러기엔 가지고 있는 기량이 충분치 못하다.
교도소에서 작업장의 모든 수감자들이 규칙을 잘 지키고, 주어진 시간에 집중해서 모든 활동을 제 시간에 끝내는 반을 ‘그림 같은 반’이라 한다. 한때는 나치같은 방식이 아닌 민주적인 방식으로도 그러한 반을 만들 수 있다는 환상도 가져보기도 했다. 민주적으로 함께 생활 규칙을 세우고, 수감자들의 삶과 연결지어 과거, 현재, 미래를 이어나가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정해진 공간과 시간에부터 그들은 그들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하루를 보내야 한다. 통제가 디폴트인 공간에서 방식이 민주적이든, 강압적이든 박탈당함과 통제당함은 박탈당함과 통제당함일뿐이지 않을까.
-감회
학교와 감옥의 교차는 클리셰다. 학교가 ‘그럴 거’라는 걸 알면서도, 와보니 정말 그러해 더없이 무력해지나보다. 예전부터 글로 풀어보고 싶었으나 주제 자체가 진부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현장에서 학생과 수감자들을 진정으로 존중하며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이 있다는 걸 알기에 계속 망설였다. 동시에 요즘 마음이 계속 뜨는 게 갈등론적 시각에서 비롯한 학교 및 사회 전반 시스템의 부조리함이나 이를 바꾸고자 하는 개혁 의지와 같은 거창한 이유 때문도 아니기에. 그저 누군가를 억압하는 내 모습이 싫고, 작은 규모의 사람들과 즐거운 일을 하고 싶다.이기에.
깊지 않은 학교에 대한 단상이었다. 수감자였을 때는 외로운 지 모르게 외로웠고, 교도관인 지금은 외로운 걸 아니 더 외로운 요즘이다. 수능시험과 임용고시를 운 좋게 한 번에 잘 봤다. 정말 운이 좋았다. 수능을 보고 올라섰던 대학의 자리는 허무했다. 임용고시를 보고 올라선 이 자리는 안정적이고 외롭다. 마음만 먹으면 나갈 수 있는 문이 있긴 한데, 다들 그 문을 나서는 건 위험한 일이라고 한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 지. 갈피를 못 잡는 마음이 이리저리 휘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