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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난민 Jul 09. 2019

코리아게이트의 진실

박정희 외교의 결정판 코리아게이트와 프레이저 보고서


박정희와 이승만은 전설의 국부인가, 매국 독재자인가? 2019년이 된 지금에라도 그들의 실체를 철저히 밝힐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들을 신화적 영웅으로 만든 이들이 누구인지도 밝혀 내야 한다.


대한민국 보수가 어떻게 역사를 왜곡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인 미 하원 보고서가 있다. 몇 년 전 세간에 알려지긴 했지만, 필자는 여기서 원문에 충실하게 팩트체크를 해보려고 한다. 이 보고서의 원문은 아래 미국 아카이브 홈페이지에 전문이 게재되어 있다.

https://archive.org/details/investigationofk00unit


이 보고서의 원제목은 Investigation of Korean-American relations: report of the Subcommittee on International Organizations of the Committee on International Relations, U.S. House of Representatives 이다. 간략히 한국-미국 관계에 관한 조사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이 보고서는 1978년 작성되었는데, 이 해는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정점으로 치달을 때였다.



코리아게이트(Koreagate) 사건은 1970년 시작되 1978년 끝난 박정희 정부 희대의 미국 의회 로비 사건으로, 박정희의 지시로 중앙정보부와 박동선이 중심이 되어 통일교 교주 문선명 등이 미 하원의원 30여명과 접촉해 뇌물을 건넨 사건이다. 이 사건에 연루된 미 하원의원 10명이 기소, 7명이 사임하고 3명이 공소시효가 끝난 전대미문의 엄청난 사건이었다.

코리아게이트 - 박정희의 로비로 미 하원의원 7명이 사임한 엄청난 정치 스캔들

이 사건의 중심에는 당연히 박정희가 있었다. 1968년 당선된 닉슨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미 행정부는 박정희 정부의 인권 탄압과 통치 방식에 큰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이를 개선하지 않을 경우 주한미군 철수와 원조를 중단한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를 개선할 생각이 없었다. 박정희는 인권과 민주주의를 탄압해야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미국 대통령의 강력한 경고를 무시하고, 미국 의회를 통해 자신의 정권을 연장하려고 시도했다. 박동선은 박정희의 지시를 받고 미 의회에 로비를 시작하였으나 바로 적발되었고, 미국은 한국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감안해 미 대사를 통해 정중하게 위법적인 로비 활동을 멈출 것을 수 차례 권고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듣지 않았다.



박정희는 오히려 중앙정보부에 지시해 통일교 교주인 문선명과 함께 KCFF(Korean Cultural Freedom Foundation)이라는 비영리단체를 조직, 미 의회에 적극적인 로비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박정희에 대해 미국은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는 단계까지 갈 수 밖에 없었다. 코리아게이트 사건 당시 세계정세는 매우 급박했다. 1968년 소련의 체코 침공, 베트남 전쟁, 1973년 칠레, 우루과이의 쿠테타, 1976년 아르헨티나 쿠테타와 6일 전쟁, 아프리카 각지에서의 내전 등 냉전이 정점으로 치닫는 시기였다. 소련의 팽창주의와 미국의 자유주의수호 이념이 부딪히며 일어난 이런 세계적인 사태에서, 미국 입장에서는 냉전의 보루이자 일본을 지키는 역할을 해야 할 한국의 대통령이 사회불안을 야기하고 인권을 탄압하며 미국 대통령의 지시를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 하원은 이 코리아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재조명해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한국에 프레이저 보고서로 소개된 이 보고서는 원래 제목이 한미 관계에 관한 조사 보고서이다. 소련과의 냉전을 이겨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전쟁과 책략을 구사하던 미국에게 한국은 계륵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국을 미국 원조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경제체제로 변신시키려 노력한 미국은 박정희 정권 하에서 주한미군 철수와 원조 중단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고려할 수 밖에 없었다.



케네디 대통령의 지시로 설립된 AID(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는 원조와 차관 형식으로 여러 나라의 존립과 개발을 도왔는데, 한국전쟁 이후 한국은 미국의 원조와 차관 없이는 버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위 표에서 보듯 1953년부터 1961년까지 정부 재정의 무려 74%가 미국의 원조였고, 1962년부터 66년까지 37%를 차지했다. 1962년 미국의 설계로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미국이 전 세계적으로 써야 하는 비용이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한국에 대한 원조액을 줄이고 경제적으로 자생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는 미국의 의도였고, 이는 미 하원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 국민의 열성과 재능으로 인해 미국의 목표치를 달성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미국은 한국을 자유진영으로 끌고 가는 것이 당연히 유리하지만 박정희와 함께 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자신들의 희생과 원조로 살아남은 나라의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의 지시를 무시하고 오히려 미 의회에 돈을 뿌려 정권을 유지하려 하니, 미국 입장에서는 한미 관계를 원점부터 재조명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무려 468쪽에 달하는 이 방대한 보고서는 그래서 1945년부터 시작된 대한민국과 미국의 관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각 정권을 조명하고 중앙정보부의 탄생, 유신체제, 군사분야, 코리아게이트 사건의 실체 등 대한민국 사회 전체를 망라하고 있다.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가 1년에 걸쳐 작성한 이 보고서는 이승만, 박정희가 감춘 대한민국 근대사를 객관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미 의회는 이 자료를 2013년 디지털화하여 자신들의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해 IT 기술의 축복을 통해 모든 사람이 이 보고서 원문을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이 글을 통해 미국 하원이 작성한 한미 관계 보고서의 중요 부분을 원문 그대로 실을 예정이다. 오늘은 지금까지 기술한 이 보고서 작성의 배경과 함께 경제분야의 앞부분만 살펴보기로 한다.



Following the war, President Eisenhower sent a mission to study the future U.S. role in Korean economic recovery...As a result, between 1953 and 1962, U.S. assistance to Korea averaged more than $200 million per year, with a peak of $368.8 million in 1957. Postwar assistance was directed primarily toward relief, with the objective of rebuilding the infrastructure of the Korean economy and developing a sound economic system which would permit the United States to reduce aid in the future. <p. 160>

2차 세계대전 이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한국 경제 복구를 위해 필요한 미국의 향후 역할을 연구하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했다...그 결과, 1953년부터 1962년까지 미국은 한국에 매년 평균 2억 달러 이상을 원조했고, 1957년 3억7천만달러로 정점을 찍었다. 이러한 전후 지원은 구호와 한국 경제의 인프라를 재건하여 향후 건전한 경제체제를 만들어 미국의 지원액을 감소시키는데 목적이 있었다.


경제분야의 앞부분에 등장하는 이 문장으로부터 미국의 한국에 대한 미래 전략을 알 수 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한국에 있어서의 미국의 역할을 글로벌 전략이라는 큰 그림 안에서 그리기 시작했고, 향후 한국이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미국의 지원액을 감소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야 세계 도처에서 벌어질 소련과의 냉전 구도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Consequently, the Koreans gave little consideration to the economic development of South Korea as such, beyond basic reconstruction of dsimage from the Korean war. Rhee's primary interest was in getting the most U.S. assistance possible, and he was not above exaggerating Korea's poverty to do so. Widespread economic corruption under his administration eroded the effectiveness of U.S. assistance, and Korea became known as the "rat hole of AID": dollars poured in with few visible results. Growing dissatisfaction with the slow pace of economic progress was a factor in the student demonstrations and the overthrow of Rhee in 1960. <p. 160>


결과적으로, 한국인들은 한국전쟁의 피해를 재건하는 정도 이상의 경제 발전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승만의 가장 큰 관심사는 미국의 원조를 가능한 많이 받는 것이었고, 그를 위해 한국의 가난을 과장하기도 했다. 이승만 정권의 부패는 사회 전반에 퍼져 있었고 미국의 원조는 효과를 내지 못했다. 이로 인해 한국은 AID의 쥐구멍(빵꾸, 밑빠진 독)이라고 알려지게 되었고, 쏟아 부은 막대한 원조액에 비해 결과는 미미했다. 경제 침체는 1960년 이승만을 하야시킨 학생운동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 이 문서는 종이로 된 보고서를 디지털화한 것이므로 오타나 탈자가 매우 많다. 그러나 여기서는 원문 그대로 옮기니 양해 바란다.



이것이 대한민국 국부 이승만의 실체이다. 이 보고서에서 자세히 언급되는 부분도 있지만, 이 한 문장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막대한 원조금은 이승만과 그 정권 실세 뿐만 아니라 공무원 및 관련된 자들의 수입원이었다. 사익을 국익보다 훨씬 중요하게 여기는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한국 지배계급의 종특이 여기서도 십분 발휘된 것이다.



At the time of the military coup in 1961, the legacy of Rhee's ineffective policies — a legacy which the short-lived Chang Myon administration had been unable to overcome — was an extremely poor and weak economy. Earnings from exports of goods in 1960 were about $33 million, which meant that funds for investment were scarce. Per capita GNP was only $90.' With tax collection inefficient. Government revenues and investments were therefore minimal. Maintaining the large defense establishment was a constant drain on resources. Double-digit inflation and low interest rates at savings institutions provided little incentive to save, and the banking system was weak. (p. 161)

1961년 군사 쿠테타 당시 이승만이 남긴 유산은 비효율적인 정책으로 인한 극심한 가난과 약한 경제 시스템 뿐이었고, 단명한 장면 정권이 극복하기에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1960년 수출로 인한 소득은 3,300만 달러였고 이는 미국의 막대한 원조금이 투자되지 않았다는 반증이었다. 1인당 GNP는 단지 90달러에 불과했다. 세금 징수 체제도 비효율적이었고 세수가 부족하니 당연히 정부 재정과 투자도 최소화되었다. 국방비에 많은 돈을 쏟아 부어 자원의 쏠림이 심각했다. 두자리수 인플레와 낮은 이자율로 인해 은행 시스템마저 취약했다.



이승만이 왜 물러났는가. 미국 하원 보고서는 GDP의 무려 70% 이상을 차지하는 막대한 미국의 원조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이 경제 발전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세금도 제대로 걷어들이지 않았으며, 단지 미국의 원조만 뜯어내 자신들의 부를 채웠다고 말하고 있다. 이로 인해 국가 경제는 빈곤 상태였고 국민들의 불만은 높아졌다. 국방비 지출이 많았다면 당연히 거기서도 해먹은게 많았을 것이다.



When Park Chung Hee came to power in 1961, a U.S. presidential task force reviewed the Korean economic and political situation and established a series of recommendations and immediate and long-term goals. The White House agreed that the United States would be "prepared to deal on a friendly and cooperative basis with the new regime" and provide the "$28 million in remaining defense support funds [supporting assistance]" plus "higher levels of assistance to support a National Defense Plan," but only if the "Korean Government enters into and carries out firm and specific commitments for reform." The reforms included fiscal and monetary actions, restructuring the rate systems of the power and transportation industries, and commencing production in already existing factories."

Development assistance, as opposed to the above supporting assistance, would be provided in the future if the Koreans achieved long-range social planning, return to civilian rule, constitutional freedoms for individuals, and anticorruption programs, among other goals. Thus supporting assistance was to be available immediately, assuming certain economic reforms were undertaken. While social and political reforms were called for, the development assistance tied to those reforms was a promise for the future. From the inception of AID in 1961, a tension existed between two major goals of the agency's economic aissistance programs. On one hand, AID's primary goal was to assist the very rapid development of an export-led economy which would then be able to support a large military budget. On the other hand, AID wanted to assure that the growth would proceed in a socially equitable way and in a democratic political environment. (p. 165)

1961년 박정희가 집권하자 미국 대통령 직속 전담반은 한국 경제와 정치적 상황을 조사하고 단기 및 중장기 목표 달성을 위한 권고안을 작성했다. 백악관은 미국이 새 정권에 대해 우호적이고 협력적인 기반 위에서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2천8백만 달러의 국방보조금에 더해 국방 계획에 대해 높은 수준의 지원을 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단, 이를 위해서는 한국 정부가 경제개혁에 대해 확고하고 구체적인 약속과 의무를 다 해야 한다고 조건을 달았다. 경제개혁은 재정 및 화폐, 발전과 수송 산업의 재건, 기존 공장에서의 생산 개시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위에 기술한 지원 정책과 별도로 미국은 한국이 장기적인 사회 계획 수립 및 실천, 민정(민간인에 의한 정치)의 복구, 개인의 인권을 헌법으로 보장, 부패 방지 프로그램 등의 조치를 취하면 장래 추가로 경제개발에 대한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따라서 경제 개혁이 실행에 옮겨지면 미국의 경제 지원은 즉시 이루어질 것이다. 미국은 한국 정부에 사회적, 정치적 개혁을 주문했고, 그 개혁들이 이루어지는 조건으로 경제개발 지원을 약속한 것이다. 1961년 AID는 한국 경제발전 지원 프로그램에 있어서 두 가지 중요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 하나는 수출주도형 경제를 통해 매우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루어 막대한 국방예산을 지원한다. 두 번째는 AID는 이러한 성장이 사회적으로 공평하고 민주적인 정치 환경에서 진행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싶었다.



미국은 박정희가 집권하자마자 그의 성향과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을 분석하고, 빠른 시간 내에 박정희에게 권고안을 제시했다. 그것은 한국이 헌법으로 인권을 보장하고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민주주의 국가가 되는 조건으로, 이승만이 실패했던 경제 발전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이 부패와 경제 파탄으로 하야하는 것을 지켜본 박정희는 경제 발전이야말로 자신의 정권 유지에 핵심적인 요소임을 알고 있었다고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따라서 박정희로서는 당연히 미국이 제시한 수출주도형 산업국가로의 개혁, 민주주의 국가로의 개혁을 받아들여야 했고, 군인 출신으로 쿠테타로 집권한 박정희로서는 미국의 제안을 당연히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패권국이자 국제질서의 설계자로서 한국을 민주주의 국가화하고 동시에 수출주도형 국가로 만들어 빈곤에서 벗어나 국방비를 스스로 감당하는 냉전의 보루가 되길 원했다. 미국의 설계 하에 국가 주도형 계획 경제 시스템이 한국에 심어졌고, 한국인의 근면, 성실함과 뛰어난 두뇌로 미국의 계획은 결국 성공하게 된다.


미국은 박정희가 집권하자마자 민주주의와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정책을 설계해주고 이를 실행하도록 하였으나 박정희는 정권 유지를 위해 인권을 탄압하고 민주주의 시스템을 훼손했다. 미국의 수 차례 경고에도 박정희는 정권 유지에 혈안이 되어 인권 탄압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와 경제원조 철회를 통보한다.


이 문단에서 알 수 있듯 미국의 경제 개발 지원은 단지 돈으로 그친 것이 아니었다. 이승만 정권의 부패로 인해 자신들의 막대한 지원금이 개인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 미국은 아예 한국의 경제개발 시스템을 설계하고 민주주의 국가로 나아갈 것을 조건으로 달아 이를 거의 강제로 실행시킨 것이다. 미국은 일본과 당시 서독을 전후 부활시킨 경험을 갖고 있었고, 일본과 독일의 경제성장 모델 역시 수출주도형 국가였다. 헌법으로 인권을 보장하고 민간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민주주의국가의 실현을 전제로 한국 경제를 발전시켜 자유진영의 한 축으로 세우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미국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박정희는 정권 유지를 위해 인권을 유린했고, 유력한 정치인을 납치, 감금, 폭행, 고문하는 등 여전히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일제 식민지시대의 방식을 고수했다. 박정희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 경제원조 중단이라는, 계약서에 명시된 행동을 한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여기에 대해서도 미국 의회를 돈으로 매수해 자신의 정권을 연장시키려는 술책을 부렸고, 그로 인해 미국은 박정희를 전혀 신뢰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추후 박정희 정권의 기반을 흔들리게 하고, 결국 국가의 명운을 위태롭게 하여 부하에게 암살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리고 우매한 한국 국민들은 이승만과 박정희를 여전히 국부이자 신으로 추앙하고 있다. IT 시대에 접어들어서야 그들이 감춘 진실이 드러나고 있지만 그들의 편견은 여전히 압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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