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 우리는 미국이 한국전쟁 직후 조사단을 파견해 한국의 상황을 조사하고 미국의 전략적 판단에 의해 한국을 경제적으로는 수출주도형 국가, 사회적으로는 헌법으로 인권을 보장하는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시켜, 정치적, 이념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진영에 서게 하고 경제적으로는 군사비를 자력으로 충당하게 하는 목표를 세우고 실행해 왔음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1953년부터 1960년 이승만 집권 기간 동안 GDP의 무려 70%를 미국의 원조와 차관으로 충당해온 한국은 미국이 원하는 수출주도형 국가로 가기는 커녕 세금마저 잘 걷지 못하고 은행 시스템도 취약한 빈곤한 상태로 남아 있었고, 이승만은 미국의 원조로 자신의 호주머니 채우기에 바빴다. 그래서 미국의 AID(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는 한국을 쥐구멍(온갖 비리로 인해 원조금을 먹는 하마, 빵꾸)으로 인식하고 골치아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60년 경제 피폐와 멀어져만 가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학생운동 등이 일어나 이승만이 하야했고, 장면 정부가 잠시 들어섰으나 1961년 박정희가 쿠테타로 정권을 장악한다. 미국은 대통령 즉각 박정희에 대한 조사와 함께 직속 전담팀으로 하여금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한 권고안을 작성하고, 박정희와 딜을 한다. 그것은 한국이 인권을 헌법에 보장하고 민간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민주주의 국가가 되는 조건으로, 미국은 지속적인 경제 원조와 군사적 지원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승만 정권을 통해 한국이 부패 공화국이고 경제발전에 관심이 없어 보일 정도로 경제에 문외한인 것을 파악한 미국은 직접 수출주도형 국가 모델을 적용한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그것을 실행하라고 박정희를 압박한다. 박정희는 이승만이 경제 폭망으로 하야한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자신이 경제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었고, 그것은 또한 군부 독재라는 치부를 가려줄 좋은 소재이기도 했으므로 이를 전격 수락한다.
한국은 당시 국가 주도형 경제개발계획이건 그것이 아니건 국가 경제발전을 위한 중장기 계획을 세우고 실행할만한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미국 내 최고 경제 전문가들을 동원해 한국의 경제성장모델을 연구하고 이를 제시한다. 시기적으로 먼저 등장한 사람은 찰스 주니어 울프(Charles Jr Wolf, 1924-2016)를 들 수 있다.
그는 미국의 대표적 전략 씽크탱크 중 하나인 랜드사(RAND)의 국제경제 연구원이자 후버 재단의 수석연구원이었다. 그는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라 불리는 장면 내각의 개발계획 작성에 큰 도움을 주었다. 당시 장면 내각의 계획은 지난 글에서 미국 하원 보고서를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빈곤의 늪에 빠진 한국 경제를 정상화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소비재 위주의 경공업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는데, 이승만 정부의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이 장미빛 환상에만 치우쳐 있을 뿐 현실성이 없다고 비판하고, 한국이 가진 거의 유일한 자산인 노동력을 생산요소로 하여 산업의 기반을 쌓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조언하였다.
그는 한국 뿐 아니라 아시아 주요 국가들의 경제성장모델을 연구, 제안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는 각 국가의 상황에 맞는 모델을 제시하는데 일가견이 있었고, 이승만 정부의 경제 실패가 현실성 없는 계획이었음을 간파하고 노동력 기반의 산업 체제로 나아갈 것을 주문한 것이다. 아래 랜드사에서 발간한 그의 전기에서 일부분을 발췌해 싣는다.
he designs alternative development strategies for China’s Hainan Province in light of the development experiences of South Korea, Taiwan, and Hong Kong.
그는 한국, 대만, 홍콩의 경제개발 경험으로부터 중국 하이난성의 대체 개발 전략을 수립했다.
And, viewed from the perspective of a specialist in Asian affairs, Charlie’s wide-ranging analyses of issues from the two Koreas, to China, to Southeast Asia have enriched our understanding of processes of economic development and defense policy.
아시아 지역 전문가로서 그는 남북한, 중국, 동남아시아에 대한 광범위한 분석을 통해 우리에게 경제 개발 과정과 국방 정책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주었다.
찰스 울프가 아시아지역 경제개발전략 및 국방 분야 전문가로서 장면 내각 당시 1차 경제개발계획의 모델을 제시하였다면, 구체적으로 한국에 적합한 수출주도형 모델을 연구, 적용해 대한민국 경제발전에 실질적으로 큰 공로를 세운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얼마 아델만(Irma Adelman, 1930~2017)이다. 그녀는 존스홉킨스대 교수, 메릴랜드대 교수, 세계은행 선임연구위원 등을 역임했고 버클리대 교수로 재직했던 세계적인 경제학자로, 한국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 받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1972년 동탑산업훈장을 수여 받았다. 1971년 박정희가 직접 훈장을 수여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이름은 우리나라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필자도 그녀의 훈장 서훈에 대해서 해외 자료를 통해 알았을 정도로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인물이다.
그녀의 업적은 한국 경제의 어머니라고 해도 무방하다.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찰스 등의 도움으로 장면 내각이 준비했던 것을 박정희가 쿠테타로 집권한 후 일부 수정해 적용한 것이었다면, 한국의 드라마틱한 경제성장을 견인한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야말로 우리가 교육 받고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수출주도형 산업으로의 경제체질 개선이었기 때문이다.
버클리대학 홈페이지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Irma’s major policy contribution was her work in Korea, where she wrote a proposal for institutional reform and for a change in priorities. Among her recommendations were a shift toward export-led growth, a reduction of tariffs, and the doubling of interest rates to reduce inflation. This policy was incorporated into Korea’s Second Five-Year Plan and became an essential element of Korea’s upward economic growth swing. In 1972, Irma’s contribution was recognized by a presidential decoration, the Order of the Bronze Tower, from President Park Chung-hee.
얼마 교수의 정책은 한국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녀는 제도적 개선과 우선순위 변경을 위한 제안서를 작성했다. 그녀는 한국 정부에 수출주도 성장으로의 전환, 관세 감면, 인플레 방지를 위해 이자율을 두 배로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정책들은 한국의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적용되었고 한국경제가 크게 성장하는데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1972년 그녀의 공적이 한국 정부로부터 인정 받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동탑산업훈장을 수여 받았다.
The citation reads : With deep interest in the wellbeing of the Korean people, Mrs. Irma Adelman, Professor at Northwestern University, has devoted her efforts with superb competence to the economic develop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reby greatly contributed towards attaining the goals of economic self-sufficiency pursued by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Her valuable donation and service has gained for her the appreciation and admiration of the Korean people.
동탑산업훈장 수여 당시 한국 정부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들의 삶을 풍족하게 하는데 깊은 관심을 가진 얼마 아델만 여사는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놀라운 실력과 열정을 쏟아 부었고 이를 통해 한국 정부가 추구했던 자급자족 경제라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녀의 값진 기여와 노력으로 인해 한국인들로부터 깊은 감사와 존경을 받게 되었다."
1969년 발간된 그녀의 저서 '경제개발계획에 관한 실용적인 접근 - 한국의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무려 3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으로, 당시 한국 경제발전을 위해 사용된 경제학적, 사회학적 모델과 적용 방법 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들어 있다. 연구진은 당연히 대부분 하버드대 교수 등 미국 전문가들로, 얼마 교수가 주축이 되어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간간히 한국인들의 이름이 눈에 띄나 2차 경제개발계획 이전 한국 경제 상황에 관한 연구 등에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그녀는 이 책 머리말에서 한국의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참여하게 되어 영광이며, 그 경험은 자신의 학문적 소양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관점에서도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결국 한국의 경제 성장은 냉전시대 미국이 그린 세계 전략의 일부로, 지정학적으로는 에치슨 라인에 따라 소련의 팽창주의를 억제하는 동북아의 최전선이자 미국의 동북아 방어선인 일본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는 것이었고, 그를 위해 한국이 자체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어 군사비를 스스로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데 있었다. 1953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경제 시스템에 대한 조언과 막대한 원조는 그러나 부패로 얼룩진 이승만 정권에서 빛을 보지 못하였고,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하고 박정희가 군사쿠테타로 정권을 장악하자 미국은 미국이 리드하는 자유민주주의진영답게 한국을 민주주의국가로 만드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달아 아예 경제개발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고 이를 실행토록 한 것이다. 물론 막대한 경제, 군사 원조도 지속되었다.
그러나 코리아게이트 사건에서 알 수 있듯 박정희는 미국이 원했던 것처럼 자유민주주의 진영으로 대한민국이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독재를 위해 인권을 탄압했고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을 무참히 짓밟고 투옥하고 고문하고 죽였다. 미국은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박정희에 대해 약속한 대로 원조를 중단할 것을 선언했고, 수 차례 경고에도 말을 듣지 않자 주한미군 철수를 선언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한국인들이 맹신하는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실체이다. 대한민국과 한국인들은 미국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라는 큰 선물을 받았지만, 박정희는 그 나라와 국민을 자신의 독재를 위해 마음껏 희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