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동맹 파탄자 박정희의 실체 (1) - 미국과의 약속을 져버리고 인권 유린과 독재를 일삼은 박정희는 카터 미 대통령과 심각하게 대립하고, 카터는 주한 미군 철수를 선언한다. 박정희의 외교 참사로 한국은 국가존망의 위기에 봉착한다.
미국은 인권을 수호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하는 조건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설계하고 막대한 원조를 통해 한국을 지원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독재자로 군림하며 인권을 있는 대로 유린했다. 미국은 약속을 져버린 박정희를 신뢰하지 않았고, 카터 대통령은 독재를 위해 인권을 유린하는 한국에 더이상 미군이 주둔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박정희는 그런 카터 대통령에게 있는 그대로 반감을 드러냈고, 카터는 이에 대해 크게 언짢아했다. 카터가 박정희와의 만남을 동맹국 지도자와의 만남 중 가장 불쾌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대한민국 최대의 외교 참사는 아마도 카터 대통령이 주한 미군을 전격 철수하겠다고 발표한 1979년의 일이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어리석게도 1977년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카터와 심각한 대립각을 세웠고, 외교 무대에서 있을 수 없는, 그야말로 후진국 독재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며 대한민국의 존립조차 위태롭게 만들었다. 오늘은 2012년부터 공개되기 시작한 미국의 기밀문서들을 통해 당시 상황을 들여다 보고자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미국과 소련의 냉전 체제에서 미국은 일본, 서독을 수출주도형 국가로 발전시켜 경제 성장을 이루게 하고, 든든한 우방이자 경제력을 갖춰 국방비를 충당하며 지정학적 우위를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베트남전에서 사실상 패배한 미국은 그동안의 냉전 질서에 변화를 가져오는 전술상의 변화를 꾀하게 된다. 국지전에 직접 군을 투입해 자국 병사와 국민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유민주주의 진영을 미국 혼자 지켜내기에는 국내 여론의 악화는 물론 초강대국 위상에 큰 상처를 입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으로부터 Snake Park이라 불렸던 박정희는 우둔하게도 이러한 세계 질서의 변화와 미국의 전략 변화를 인식하지 못했다. 미국과 한국의 관계는 이미 멍청한 박정희에 의해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정권 연장과 그로 인한 쾌락에만 혈안이 되었던 박정희는 애초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설계하고 강력한 원조까지 곁들여 이를 실행하게 한 미국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미국은 한국 역시 일본, 서독과 같은 수출주도형 국가로 성장시켜 경제력을 키우고 이를 통해 국방비를 스스로 부담하게 하여 자유 민주주의 진영의 동맹국으로 우뚝 서길 바랬다. 이승만부터 박정희까지 대통령과 관료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수출주도형 국가 모델을 한국에 맞게 설계하고 이를 전수하며 미국은 단 하나의 조건을 달았다. 미국의 경제적 조언과 막대한 원조는 한국이 인권을 헌법에 명시하고 투표를 통해 권력을 선출하는 민주주의 국가가 될 때만 이루어질 것이다. 미국은 박정희가 쿠테타로 정권을 잡았을 때 신속하게 박정희에게 이 사실을 주지시켰고, 박정희 역시 이승만이 부패로 인한 경제 파탄으로 물러난 것을 잘 알았기에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인권을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도입하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미국 의회에 불법 로비를 하다 적발되는 외교 참사를 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코리아게이트 사건이다.
미국은 박정희가 독재자로 군림하는 한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일원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하기에 이른다.
위는 2012년 공개된 하버드 케네디 스쿨(John F. Kennedy School of Government)의 연구 논문이다. 이 논문에서 저자는 당시 상황을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Carter was determined to put greater emphasis on America's commitment to the protection of human rights, and he sharply criticized the apparent past policy of backing any dictator that promised to fight Communism.
- Persuading a President: Jimmy Carter and American Troops in Korea.
카터 대통령은 인권 보호에 대한 미국의 약속을 더욱 강조하기로 결심했고, (자유민주주의 진영에 서서) 공산주의와 싸우겠다고 약속한 독재자를 지지했던 과거 미국의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 논문은 아래에서 필자가 인용할 미국 국방부, 외교부 문서 등을 분석해 작성한 것으로, 당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미국은 쿠테타로 집권한 박정희를 바로 쳐내지 않고 분명하게 기회를 주었다. 미국은 박정희에게 한국이 자유민주주의 진영에 서서 경제를 발전시키고 공산주의의 남하를 막으라고 했고, 인권 보장과 민주주의 도입을 조건으로 막대한 원조와 경제정책 설계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는 공산주의 버금가는 독재의 길을 걸었고 인권을 유린했으며 민주주의 정신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미국이 설계하고 원조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쌓은 부를 횡령하고 역으로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그 돈으로 미국 의회에 로비를 펼치다 적발되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한 미국 내에서는 박정희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다. 1976년 터진 코리아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미국 국회의원이 7명이나 옷을 벗었고, 1977년 당선된 카터 대통령은 이러한 사실을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미국으로서는 더이상 한국에 경제적 조언과 원조 뿐만 아니라 주한미군을 주둔하기 어려웠다. 냉전 시대를 누그러뜨려 긴장을 완화시키려는 전략도 있었지만, 위 문서에 나온 대로 인권을 유린하는 독재자에게 더이상 미국이 원조를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국제사회는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독재자를 군대까지 주둔시키며 보호하는 미국을 비난했고, 그런 비난 여론은 미국 내에서도 높았기 때문이다.
케네디로부터 시작된 한국에의 원조에 대해 미국은 더이상 찬성할 수 없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당선된 카터는 당연히 자신의 공약으로 독재자의 국가를 더이상 보호하지 않겠다고 선언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코리아게이트라는 초대형 외교참사로 인해 심각하게 틀어진 한미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단계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리사욕을 국익보다 중하게 여긴 박정희는 초강대국 미국 대통령에게 다시 한 번 엄청난 외교 참사를 범하게 된다. 본인이 직접 카터 대통령에게 일장 연설을 하며 무려 30분 동안 일방적으로 강압적인 발언을 한 것이다. 서울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에게 말이다.
Carter made no secret of his deep misgivings about Park’s suppression of his political opposition. When the two met for a summit in June 1979, Park attempted to turn the tables, lecturing Carter rhetorically: “If dozens of Soviet divisions were deployed in Baltimore, the U.S. Government could not permit its people to enjoy the same freedoms they do now.”
카터 대통령은 박 대통령의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했다. 1979년 6월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박 대통령은 "만약 볼티모어에 수십 개의 소련 사단이 배치된다면 미국 국민들은 더이상 지금과 같은 자유를 누리지 못할 것이다"라고 카터 미 대통령에게 강의하면서 상황을 바꾸려고 하였다.
<출처 : Memorandum of Conversation, President Jimmy Carter, South Korean President Park Chung Hee, et al, June 30, 1979, Secret>
정말 할 말이 없다. 박정희는 카터에게 주한 미군이 철수하면 소련군이 미국 본토에 침공하게 될 것이라고 연설한 것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박근혜의 우둔함과 멍청함은 바로 박정희에게 나온 것이 아닐까. 그렇게 위협하면 미국이 주한 미군을 주둔하고 자신의 정권을 인정할 것이라고 정말 진심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1979년 7월 5일자로 작성된 백악관 문건에는 당시 서울에서 있었던 한미 정상회담 대화록이 담겨져 있다. 정말 보기 민망할 정도로 참혹하다. 카터가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외교참사라고 표현하기도 어려운, 그야말로 대한민국 보수 지도자의 참상 그 자체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열망하며 찬양하는 박정희의 실체가 이런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미군 철수를 보류한 것일까? 또 다른 문서를 살펴 보자.
A key factor in rethinking Carter's push to withdraw U.S. forces from South Korea was the production of new intelligence assessments of North Korea's military power.
카터가 주한미군 철수에 대해 재고하게 된 핵심 요인은 북한 군사력에 대한 정보국의 새로운 평가 보고서 때문이었다.
<출처 : Memorandum for the Secretary of Defense from Russell Murray, Assistant Secretary of Defense, Program Analysis & Evaluation, Subject: PRM-45, June 6, 1979, Top Secret>
당시 머레이 국방장관에게 보고된 기밀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박정희로 인해 주한미군 철수를 결심했지만 최종적으로 미국의 국익과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이념으로 인해 이를 포기하고 만다. 당시 북한의 군사력은 한국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는 분석 보고서가 제출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동북아 완충지대 역할을 해야 할 한국이 곧바로 공산화될 수도 있다. 이것은 태평양 방위선인 일본이 곧바로 공산진영과 노출되는, 미국으로서는 최악의 사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박정희는 자신의 외교 참사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세상물정 모르고 오만하기 짝이 없던 박정희는 미국이 주한미군 철수 연기를 발표하자 모든 것이 자신의 능력 때문이라고 착각하고 미국에 생떼를 부린다. 아래를 살펴보자.
Following a tense and contentious summit meeting with Park in June 1979, the U.S. announced that further withdrawals would be put on hold until 1981. For his part, Park agreed to pursue increased military spending and to take steps to release political prisoners, though he continued to press the U.S. not to criticize publicly his actions against the political opposition, arguing that if given sufficient “running room” he would try to avoid “extreme” actions.
미국은 1979년 6월 박정희와 긴장감과 논쟁으로 점철된 정상회담을 가진 이후 1981년까지 주한미군의 추가 철수를 보류한다고 발표했다. 박정희는 군방비 증액과 정치범 석방에 합의했지만, 미국이 박정희가 하고 있는 야당 탄압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지 말라고 압박했다. 박정희는 자신을 압박하지 않으면 자신도 극단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출처 : Cable, Mike Armacost to Deputy Secretary of Defense Claytor, Subject: Report to President of Secret Discussions in Korea, October 20, 1979 Secret>
이 문서는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한 비밀 문서로, 박정희의 지능과 성품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 중 하나이다. 박정희는 미국이 원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인권 수호 대신 이미 잡아서 고문 중이던 일부 정치범을 풀어주고 국방비를 증액하는 대신 공개적으로 자신의 야당 탄압을 비난하지 말 것을 주장한다. 이런 양아치같은 독재자를 미국은 어떻게 다룰지 고민하게 된다. 주한미군은 필요하니 놔둬야 하지만 이런 말도 안통하는 독재자를 미국은 같이 끌고 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지켜본 김재규를 비롯한 박정희의 핵심 측근들은 엄청난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미국 대통령에게 30분간 일방적으로 연설을 하고 대드는 한국 대통령과 그를 지켜보는 미국 대통령과 참모들. 미국 문서에는 점잖게 연설이라고 되어 있지만, 소련군이 미국에 침공할 것이라는 것은 그냥 말도 안되는 공갈협박에 불과하다. 미국은 마음만 먹으면 대안을 찾을 수 있다. 그런 긴장감이 청와대에 감돌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사건이 일어난지 약 4개월 후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미국이 지원하고 싶어 했던 야당 인사들과 협의되지도, 미국과의 협의도 없이 김재규는 박정희를 사살해 버리고 자신도 전두환에 의해 신속하게 처형된다. 이런 정황을 볼 때 박정희 시해 뒤에 미국이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미국은 비리 공화국을 이끌었던 이승만도, 무식한 양아치 독재자 박정희도 그대로 뒀었다. 그것도 수십 년간 말이다.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되 큰 전략의 틀에서 대한민국을 선도하고 싶었던 미국의 고충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