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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난민 Aug 28. 2019

주초위왕과 딸의 표창장

1519년의 조선과 2019년의 대한민국은 왜 하나도 다르지 않을까

요즘 나에겐 조선의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 받은 대한민국의 추상적 도덕주의에 대한 회한이 많은 날이다. 절대다수를 위한 사법개혁의 적임자 조국이 자녀 입학 문제로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다. 배신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당시 입시제도로 보면 불법도 아니고 별 관계 없는 사람들의 선의가 반영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의 전통에 따라 일이나 실리보다 남의 도덕적 우월성을 따지기 좋아하는 대한민국은 이 사안에 대해 과민한 반응을 보이며 또다시 정권의 도덕과 인기에 연결시키고 있다.


절대다수를 위한 사법개혁은 그럼 누가 적임자란 말인가? 아들은 충분히 미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음에도 해외국적자의 권리를 포기하는 각서까지 제출했고, 딸은 입학에 도움이 되고자 학교에서 마련한 제도에 기꺼이 참여하여 한 점이라도 더 받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이 사법개혁을 뒤집을만큼 중요하다고 많은 사람이 외치며 또다시 자기 일처럼 흥분하고, 문재인 정권이 나라를 말아먹고 있다고 광분하고 있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 대단한 정신문화이다.


추상적 도덕주의 VS 현실주의


추상적 가치에 매달리면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세계적 최빈국이자 최약소국이었던 조선은 성리학적 가치, 도덕만을 뒤쫓다 아예 나라를 팔면서 스스로 망했다. 16세기 영국을 이끌었던 엘리자베스 여왕이 살인과 도적질을 일삼던 해적이었던 드레이크를 제독으로 등용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영국을 일약 해상강국으로 도약시키며 영국의 위대한 역사를 써내려갔던 일을 21세기 한국에서 바랄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추상적 도덕주의를 숭배하고, 그걸 이용한 소수의 사람들은 손쉽게 디바이드앤룰을 이용해 현실적 이익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마치 한 점의 결함도 없는 순결무구한 신앙인을 바라는 것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조선시대 성리학을 추종하던 자들은 자신 또는 타인의 도덕성을 신앙인의 영역, 그것도 대형교회같은 현실적 신앙의 영역이 아니라 절벽 위에 세워진 수도원에서 매일 영혼의 순수함을 갈구하는 수도사 수준의 신앙인들 수준으로 따지고 들었다. 자신의 도덕성을 이렇게까지 추구하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노무현, 노회찬과 같은 길을 걷게 된다. 타인의 도덕성을 이렇게까지 추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도덕성을 따지는 것에 열광하면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손쉽게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러한 일들은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너무나 많이 이 땅에서 일어나 왔고, 그래서 항상 개혁이나 진보는 실패의 길을 걸었다. 노무현의 논두렁 시계, 노회찬이 드루킹측으로부터 받은 몇천만원이 과연 그렇게까지 비난받을만한 일이었을까? 아니, 애초에 팩트체크를 하면 그게 팩트는 맞았던 것인가? 게다가 이번 조국 사태는 특이한 점이 많다. 본인의 문제가 아닌 가족의 문제가 있는 것처럼 부각시켜 개인의 도덕성을 훼손하고자 하는 것인데, 대선후보도 아닌 장관후보자인 점을 감안하면 1달간 무려 47만건(네이버 기준)이라는 역대급 기사량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 그리고 조선의 위업을 이어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언제나처럼 그 기사에 들떠 모든 감정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다는 것이다.



1519년의 조광조(趙光祖) VS 2019년의 조국(曺國)


역사를 좀 아는 사람들은 조선과 대한민국의 데자뷰에 매번 놀라곤 하는데, 사실 같은 땅에서 같은 DNA를 물려받으며 살아온 사람들이 달라지면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조선시대 수없이 일어났던 사약과 사화 중 어려운 것은 차치하고 유명한 사건 하나만 봐도 2019년의 대한민국과 데자뷰가 일어나는 사건이 있다. 1519년, 지금으로부터 딱 500년 전, 조선의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죽은 사건이다.



반대파에 밀린 혁신정치가

조광조는 혁신적인 제반정책을 단행하면서 한편으로는 권신들의 시비를 분명히 가렸고, 남의 허물을 서슴지 않고 말했다. 그중 하나의 보기가 남곤(南袞)에 대한 공격이다. 남곤이 예조판서의 몸으로 왕릉을 돌보고 행사를 주관하는 일을 보러 자청하여 나갔다. 이때 벼슬아치들이 조정에 모여 훈구파의 누구를 논핵(잘못을 따지고 캐물음)하는 일을 벌이게 되어 있었는데, 남곤은 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조광조는 “재상의 용심이 어찌 이같이 요사스럽고 간특할 수가 있는가”고 맹렬히 공격했다.


수세에 몰리던 훈구파는 마침내 조광조를 몰아낼 무고(없는 일을 거짓으로 꾸며 남을 고발하거나 고소함)를 꾸몄다. 홍경주 · 남곤 · 심정 등은 경빈 박씨(敬嬪朴氏) 등의 후궁을 움직여 궁중의 나뭇잎에다 ‘주초위왕(走肖爲王)’[주초를 합하면 조(趙) 자가 됨. 곧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란 꿀물을 무수히 바르게 하여 벌레로 하여금 갉아먹게 하고, 궁녀들이 이 글자가 새겨진 나뭇잎을 모아 임금에게 바쳤다. 또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조직하여 조정을 문란하게 한다고 무고했다. 곧 공신들을 헐뜯어 몰아내고 권력을 잡으려 한다고 끊임없이 모략질을 해댄 것이다.


중종은 조광조를 투옥시켰다. 그러나 조광조는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변호로 처형이 면제되고 능성(綾城, 오늘날의 화순 능주)에 위리안치되었다. 신진사류들의 상소가 연일 이어져 조정 안팎이 시끄러웠다. 조광조는 유배지에 있으면서 다가올 운명을 알아차렸는지 불평 한마디 없이 조용히 지냈다. 훈구파의 끈질긴 공격으로 마침내 조광조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다음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45XX13000020



위 내용을 지금의 현실에 대입해 보자. 조국은 사법개혁의 적임자로 오래전부터 부각되어 왔으며, 조광조 역시 당시 개혁을 주도하려던 인물이었다. 조국은 SNS를 통해 주요 이슈 때마다 수구 보수들을 향해 날카로운 공격을 감행했고, 사법개혁 의지를 수차례 드러내었다. 현재의 훈구파인 자한당은 국회선진화법 위반으로 패스트트랙 수사를 받아야 함에도 출석하지 않고 있고, 공수처 설치를 포함한 검찰 개혁에 반대하고 있으며, 아베 사태로 친일파임이 더욱 짙게 드러나 수세에 몰리고 있어 형세를 전환할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한 때이다. 그래서 21세기판 주초위왕을 꾸미고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결과이다. 조광조는 실리와 현실정치에 취약한 당시의 신진사류와 개혁파(지금도 취약하긴 마찬가지지만)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훈구파의 의도대로 사약을 받고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조국은 개혁파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혼자 싸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500년 전에는 정치 참여자들 스스로 반대 여론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일부 국민들이 청와대 청원을 올리고 가짜뉴스 팩트체크를 하는 것 외에 민주당이나 정의당 등 현실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자들의 지원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한당에 질질 끌려다니며 전례 없는 법정 시한을 넘긴 2일 청문회에 합의하고 말았다. 그리고 500년 전 조광조 사건에 비해 더욱 초라한 것은 당사자의 딸의 표창장 하나에 온 나라가 나서서 열광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진보는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승리한 적이 없다. 그들은 매년 사약이나 고문으로 죽어 나갔지만 항상 분열하며 스스로 세력을 약화시켰다. 정권을 잡았다가도 훈구파니 노론이니 하는 보수세력을 그대로 둔 채 분열하며 싸우다 결국 모든 것을 다 보수세력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21세기에 들어와서야 가까스로 정권을 잡는데는 성공했지만, 추상적 도적주의와 분열로 현실 개혁은 거의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다. 정권을 잡은 것도 그들이 싸움을 잘 해서가 아니라 국민들이 진화한 까닭이다. 대한민국 진보는 적폐가 누구인지 특정하지도 않고, 말로만 적폐청산을 하겠다고 한다. 적폐가 누구인지 특정하지 않기에 그들과 기꺼이 동거하며 그들을 인정하고 같이 나아가자고 손을 벌린다. 적폐가 여론전을 펼치면 거기에 휩싸이기 싫어하며 꼬리를 내린다. 지금도 조국이 어떻게 되나 지켜보자는 자들이 많아 보인다. 그래서, 조국도 이대로 상황을 지켜보며 결과에 따라 개인의 영달을 위해 움직일 것인가? 조국이 나쁜 놈이 되어 물러나면 나는 그 사람과 상관 없다며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할 것인가?



대한민국 보수는 다른 나라에 영혼을 판 자들이다


한국은 21세기 들어서야 가까스로, 단재 신채호의 의견을 따르자면 묘청의 난부터 시작된 1천년의 사대주의를 벗어나 자주적 외교를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의 지배자 계급은 영혼을 다른 나라에 팔고 스스로 그 나라의 속국임을 자처하며 국방과 외교를 그들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조선땅에서 나오는 모든 자원과 사람을 독차지하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나중에 다시 다루겠지만, 조선시대 명나라를 떠받들던 자들은 조선의 왕은 왕이 아니라 명의 신하라고 주장했고, 그 주장에 반대하는 자주적인 생각을 가진 자들을 철저히 처단했다. 성리학만을 받을고 명을 임금으로 섬기어야 한다며 모든 사상의 씨를 말리고 자주적 정책에 반대하며 소중화, 사대주의를 외쳤다. 그래서 그들은 쉽게 일본에 나라를 팔 수 있었다. 어차피 다른 나라에 영혼을 판 자들이라 그 대상을 명, 청에서 일본으로 바꾼 것일 뿐이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익이었다.


그 결과 절대다수의 백성은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굶어 죽기 일쑤였으며, 아내와 딸이 이쁘면 양반에게 빼앗기고 위조된 문서와 거짓 자백으로 죄인이 되었으며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도 글을 모르고 법을 몰라 양반들에게 빼앗겨 버렸다. 그럼에도 나라에 위기가 닥치면 백성들의 피로 나라를 지켰지만, 그들이 피 흘리며 지켰던 그 나라조차 부귀영화를 누리던 상위 1%가 일본에 헐값에 팔아버리고 말았다. 조선을 판 대가로 일본에 가서 작위를 받은 72인 중 대부분이 조선 후기 300년을 일당독재한 노론에 속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21세기의 대한민국을 지금도 지배하고 있다. 필자가 대충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100억에 가까운 홍보비가 조국 관련 뉴스에 쏟아지고 있고, 그 뉴스들은 그냥 찌라시 수준이며, 그걸로 자신들의 막대한 이익, 조선시대의 수억배에 달하는 이익을 지키고자 하며, 그 시도는 이미 절반 이상 성공했다. 그리고 반일, 한반도 평화체제 등 주요 이슈들에 관한 뉴스는 사라졌고, 논의조차 되고 있지 않다. 물론 조국 사태 전까지도 정책적 논의 : 여론몰이 = 1 : 99의 형세였지만 말이다.



2019년 8월은 쓸쓸하다


2019년이 되어서야 일본에 대해 정권과 국민이 함께 저항하고 중국의 부당한 대우에 함께 분노하는 시대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개혁은 너무나 멀리 있다는 느낌이 든다. 프랑스의 1793년은 뜨거웠고, 당시 3부회의의 왼쪽에 앉았다는 이유로 좌파로 불린 일반 시민들은 왕정을 무너뜨리고 국민 개인의 인권에 대한 존엄성을 외치며 귀족과 종교 사제들이 독차지하고 있던 땅을 빼앗아 모든 백성에게 나눠주는데까지 단 2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당시 왕정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한 주변국들이 군대를 파병해 전쟁을 일으켰음에도 민간 위용군이 맞서 싸우며 나라를 지켰다. 그러한 외세의 침략이 없었다면 프랑스 혁명은 훨씬 빨리 안착되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오늘날 민주주의와 인간의 존엄성이 많은 나라에서 지켜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한국에서는 빈부 격차와 부의 세습, 사회적 불평등이 잘못 되었다고 외치며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나섰음에도, 모든 것은 법적 테두리 안에서 적법하고 조용히 이루어졌고 정권 교체도 헌법의 틀 안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을 촛불시위를 내가 혁명이라 부를 수 없는 이유는 그 결과 어떠한 법적 제도적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 개혁을 완수해야 할 세력이 유약하고 그 개혁을 저지하려는 세력이 실물경제와 사람들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으며 개혁을 지지하고 재촉해야 할 시민들이 추상적 도덕 지상주의에 빠져 갈팡질팡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혁명이라 부른다면 만일 미래에 어떤 법적 제도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나면 그것을 부를만한 단어가 사라지거나, 1차 혁명 2차 혁명이라는 식으로 불러야 할 텐데, 그러기엔 이루어진 진보가 없어 보인다. 단지, 깨어있는 시민들이 많아졌다는 것 하나가 위안이 될 뿐이다.


사법개혁은 중요한 테마이며 지금까지 한국이 해온 스타일로 볼 때 이것이 이루어져야 다음 단추가 꿰메질 수 있다. 공수처와 개헌 등 중요 과제와 공약들이 빠른 시간 내에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 사법개혁의 적임자가 조국이라면 그 사람을 일단 등용시켜서 빨리 그 일이 이루어지게 해야 절대다수에게 이익이 될 것이다. 그 개인의 헛점이나 자녀의 과오가 있다면 법적 절차에 따라 냉정하게 판단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문재인의 아들이 그랬고 이재명이 그랬고 유은혜가 그랬고 유시민이 그랬던 것처럼 이 나라의 모든 적폐가 마치 조국 한 명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식의 여론에 온 나라가 휘둘리고 있고, 반일이니 극일이니 하는 것들도 아예 보이지조차 않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일본 극우가 이런 한반도의 상황을 보며 얼마나 무시하고 조롱하고 있을까? 냄비 근성이 이렇게 쉽게 발동되니 역시 조센징이야 문재인 정권 무너뜨리기도 쉽겠구나 하고 즐거워하고 있을 것이다.


피아를 구분하고 적폐를 구분하고 지금 절대다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지 않은가? 실력이 좋다면 등용하는 것이고 개인사 가족사는 그 다음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16세기 엘리자베스 여왕을 21세기 한국에 소환할 수도 없다. 지금 조국이라는 사람의 개인사에 무슨 나라를 망치고 팔아먹을만한 흠결이 있는 것이 아니고, 가족사로 인해 사법개혁의 적임자 자격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고등학생때 적법한 절차에 따라 논문을 쓴 것이 대역죄인가? 설사 그것이 대역죄여도 그것을 처벌할 수 있는 법을 만들라고 국회에 요구하면 될 것이고, 그것을 물으려면 하루 빨리 공수처라도 설치하여 국회와 고위공직자 자녀들에 대해 전수조사를 하면 될 일이다. 지금까지 개혁을 가로막고 나라를 팔아먹을 자들에게 어떤 비리가 있고 어떤 불법이 있고 어떤 대역죄가 있는지도 똑같이 물어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세종대왕과 이순신을 지금 소환술로 살려내 그들에게 모든 국정을 맡길게 아니라면 지금 있는 사람 중에 빠른 시간 내에 절대다수에게 유리한 개혁을 이루어낼 사람을 국민들이 먼저 보호하고 전장에 내보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한 점의 도덕적 결함도 용납하지 못한다고 떠들어대며 정권 전체를 불신하고 분노한다고 해서 도대체 얻어지는 이익이 무엇이란 말인가?


대한민국 진보는 유약하고 그래서 개혁은 빨리 이루어지지 못한다. 지금처럼 작은 일 하나에도 몸서리를 칠 정도로 분개하고 시끄러워진다면 그들은 지지율 하락이 무서워 더욱 몸을 사리고 자신의 자녀들이 사회 주도계급으로 성장하지 못하게 하층민으로 살도록 해야 할 것이며 그 빈 자리는 친일파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줄곧 해왔던 것 그대로, 상위계층으로서 학계와 부를 장악하는 것을 재촉하게 될 것이다. 지금 사회를 누가 장악하고 있고 사회의 부를 누가 독차지하고 있으며 누가 학계와 언론을 장악하고 있는지를 정녕 모르는가? 그들에게 가야 할 분노를 언론 제목장사 몇 번에 개혁 의지를 갖고 있는 적임자에게 쏟아부어서 돌아오는 이익이 무엇인가? 그렇다면 조국보다 더 실력 있고 개혁에 적합한 자를 먼저 추천이라도 한 후에 분노하는 것은 어떠한가?



1519년의 데자뷰, 1793년의 발끝에도 못미치는 개혁, 논두렁 시계의 무한반복...그래서 2019년 8월은 허망하다. 한 가지 작은 희망이 있다면, 무서운 속도로 성장해 스스로 뉴스를 팩트체크하는 시민들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진보를 원한다면 민주당이니 정의당이니 신당이니 나누기 전에 개혁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앞으로 나가는 것에 찬성을 하고 힘을 실어주는 것이 맞지 않은가. 그리고 그 열렬한 도덕적 흠결 따기지 에너지는 아베를 향해 발사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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