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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난민 Nov 28. 2019

구하라가 떠난 날, 양현석은 웃었다

사회적 타살과 사회적 특사가 공존한 날에 대한 기록

나는 TV를 보지 않는다. 연예인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런 내가 11월 24일 무심코 포탈에서 구하라 사망 소식을 접하고 가슴이 철렁했다. 다음날은 안마시던 술까지 마셨다. 많이 마셔서 아직도 속이 쓰리다. 구하라의 팬도 아니었던 내가 왜 이렇게 충격을 받고 있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다. 그냥 몹시 쓸쓸하고 씁쓸하고 안타깝고 화가 날 뿐이다. 그래서 며칠 동안 정신을 가다듬고 그녀의 흔적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그녀가 남긴 기록들, 그녀 관련된 기록들을 보며 슬픔을 금할 수 없었다. 먼저 4년여 전인 2015년 [하라 온앤오프: 더 가십]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힘들면 그만두면 되잖아. 힘들면 안 하면 되잖아. 힘들면 하지 마라는 말을 너무 가볍고 쉽게 이야기하는 분들이 계셔서 조금 슬픈 것 같아요. 힘들어도 힘든 척을 못 하고 힘들다고 이야기를 못 하는 게 저뿐만이 아니라 모든 아이돌분들이 힘들어하지 않을까 싶어요."


눈에 손을 댔다고 기사와 악플들이 뜨자 자신의 인스타에 올린 글. 한국에서 양심적이고 순진한 사람은 유명인이 되지도, SNS를 하지도 않고 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이때는 힘든 마음이었음에도 적극적으로 잘 대응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이성, 특히 후진 한남은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종종 그런 관계는 재앙이 되기도 한다. 그녀가 남친이라고 믿었던 인간과 있었던 일은 여기에 적지 않는다. 다만, 그녀의 남친이었던 최종범은 지난 8월 29일 다음과 같은 판결을 받았다.


"29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0단독 오덕식 부장판사는 상해, 협박, 강요, 성폭력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재물손괴 등 5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최종범에 대해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최종범은 대부분의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리벤지 포르노' 논란을 일으켰던 성관계 동영상 불법 촬영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내렸다."


피해자(구하라)가 촬영을 제지하지 않았기에 몰래 촬영한 것이 아니고, 피고인(최종범)이 이 동영상을 유포하거나 제보하지도 않았으며 금품을 요구하거나 성적 수치심을 갖게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었다. 더군다나 재판부는 판결문에 동영상을 찍은 장소, 횟수 등을 적나라하게 기재하였고, 당시 동거 중이었다는 토를 달았다. 조선의 위대한 도덕과 지성으로 무장한 판사의 판결 내용이 그랬다. 언제나 그렇듯 어이가 없어 미칠 것 같다.



믿었던 남친이 자신을 때리고 자신과의 성관계 장면이 담긴 동영상들을 유출하겠다고 협박했다. 방어하기 위해 손톱으로 팔을 할퀴고 저항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법원은 상해, 협박, 강요 등에 대해서는 죄를 인정하면서도 유독 여자로서 가장 민감한 성관계 동영상에 대해서는 죄가 없다고 한다. 게다가 소속사는 이런 상황에서 활동을 하라고 한다. 이 와중에 구하라는 일본에서의 활동 재개를 준비하고 있었다. 법원도 소속사도 완전히 미친거 아닐까? 아니다. 그들은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이며 절대 미치치 않았다.



구하라는 눈 조금 만졌다고 미친듯이 악플을 달아대는 대한민국에서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갖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비밀을 지켜주어도 모자랄 남친이 성관계 동영상을 갖고 때리며 협박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법원은 그 촬영이 구하라가 동의하에 찍은 것이라 죄가 없다고 한다. 판결문에 내가 언제 어디서 남친과 성관계를 했는지 다 적혀 있다. 게다가 활동을 재개하던 하지 않던 언제 어디서 그 동영상이 유출될지 모른다. 그러면 그녀가 잠도 못자며 쌓아온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그 영상을 볼 것이며 끝없는 악플이 달릴 것이다. 그런 일이 벌어졌음에도 여론이 식을때까지, 그녀의 마음이 에너지를 되찾을때까지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활동을 재개한다고?



그리고 그녀의 절친이었던 사랑스러운 설리가 세상을 떠났다. 내가 이틀 전 출장을 다녀오다 본 뉴스에 나온 이 우는 장면은 설리 사망 당시 그녀의 라이브였다. 구하라도 불과 몇 달 전 자살 시도를 했었던 상황. 그녀의 심리는 이때 이미 최악을 지나고도 훨씬 더 고통스러운 곳에 가 있었을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도 한 번 하면 진이 빠진다는 라이브 콘서트 투어를 그녀는 11월 14일부터 19일까지 일본에서 치뤄 냈다.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낸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녀의 직업은 카메라 앞에서, 팬들 앞에서 한없이 밝고 이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음이 행복으로 가득 차 있어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가 떠나기 불과 며칠 전까지 그녀는 무대 위에 있었다. 악플과 믿었던 사람으로부터의 배신에 시달리며, 언제 자신의 동영상이 돌아다닐지도 모르는 불안감 속에서, 절친이 세상을 떠난 슬픔을 안고, 팬들 앞에서 밝고 이쁜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녀의 인스타에 남겨진 마지막 기록, 잘자. 그녀 자신에게 했을지도 모를 이 말을 남기고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내가 그녀의 죽음에 그토록 충격을 받은 것은 대한민국에서 흙수저로 태어나 열심히 자신의 삶을 일궈갔던 한 젊은 여성이 사회적 타살을 당했기 때문이 아닐까. 항상 밝고 이쁜 모습만 기억했던 잘 모르는 사람이 겪은 고통이 내가 겪어온 것들과 그렇게 다르지는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에서 감성난민으로 살아가는 나로선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큰 사건이었던 것이다.




구하라의 사망 소식이 뉴스를 뒤덮고 있던 11월 25일, 마치 이런 이슈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양현석은 검찰로부터 성접대 관련해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는 뉴스가 조그맣게 보도되었다. 지난 6월 양현석이 이미 이런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자신 있게 기자들에게 문자를 보낸 후 무려 5개월 만이다.

기자들은 상습도박, 협박, 배임 혐의가 남았다며 마치 모든 죄를 덮어준 것이 아닌 것처럼 운을 띄우고 있지만 과연 그럴까? 스스로 기자에게 무혐의를 예언할 정도면 경찰, 검찰에 대한 작업이 이미 끝났다는 것이다. 특히 기소권과 수사권 등 모든 수사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검찰에 손만 잘 쓰면 모든 죄가 사라지는 것이 법치국가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로비와 접대로 권력과 가깝게 지내온 양아치는 웃었고, 권력을 이용해 큰 돈을 벌며 스스로 자신이 빛이요 진리라고 생각하는 대한민국 엘리트의 상징인 법조인은 또 다른 양아치의 형량을 스스로 깎아 주는 대신 한 여성을 비극으로 내몰았다. 그 법조인들과 양아치들은 그렇게 자신들이 죽게 만든 하라 관련 압도적인 기사량을 이용해 전략적으로 절묘한 타이밍이라며 일부 핵심 쟁점에 대해 슬그머니 무혐의 처분을 내렸을 것이다.


반면 조선의 열정적인 마녀사냥에 힘들어하던 마음 여린 설리와 하라는 누구보다 열심히 절박하게 살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의 다수에 의해 절벽에 내몰린채 세상을 떠나야만 했다. 아무도 그녀들을 지켜주지도, 도와주지도 못했고,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요즘 것들은 의지가 약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며 그녀들을 비웃고 손가락질할 것이다. 언젠가 하라의 동영상이 유출되면 좋다고 빛의 속도로 감상 후 감상평을 나눌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은 그런 나라이다.


나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술을 먹어 봤자 분이 풀리지도, 슬픔이 가시지도 않고 몸만 힘들 뿐이지만, 이번 겨울엔 웬지 몇 잔의 술을 더 마시고 싶다. 나는 아무런 연도 없는 설리와 하라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스스로 더 큰 충격을 받을까봐 빈소를 찾지도 못했다. 그래도 술이라도 마시며 그녀들의 명복을 빌어주고 싶다. 앞으로 이런 사고를 얼마나 더 보아야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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