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유학생의 미술 교양수업 '그림 읽는 법'
미술에 대한 언급은 많아졌지만 아직 이야기되는 것들은 극히 일부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면 쿠사마 야요이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쿠사마 야요이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명품과 콜라보하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가. 혹은 정신병으로 땡땡이를 무한히 그리는 작가를 떠올리셨다면 맞습니다. 그녀의 이야기가 정말 유명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단번에 이런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게 되었죠. 하지만 쿠사마 야요이가 뉴욕에서 활동했을 당시 아방가르드한 예술가였다는 사실은 잘 조명되지 않는 것 같아요.
일본에서 태어난 쿠사마 야요이는 아방가르드 미술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해외로 나가기로 결심합니다. 도착한 곳은 뉴욕, 그녀의 나이 27살이었죠. 사실 떠나기까지 마냥 쉽지는 않았는데요. 지금 생각해봐도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홀로 서야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두렵기도 했겠죠.
누군가에게 조언을 청하고 싶었던 쿠사마 야요이는 당시 가장 유명한 여성 화가였던 조지아 오키프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지만 오키프는 용기를 전하는 진솔한 답장을 보내왔다고 해요. 그 덕에 쿠사마 야요이는 뉴욕으로 떠나 작가로서 새로운 세계로 날아오를 수 있었습니다.
동양에서 온 젊은 여성 작가. 쿠사마 야요이가 뉴욕에서 펼친 예술 세계는 매력적인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196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평가할 정도로요. 하지만 당시에는 성차별과 인종차별로 많은 기회를 받진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를 주목했던 뛰어난 안목을 지닌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바로 당시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던 작가들이었죠. 그런데 쿠사마 야요이에게 이것이 꼭 좋은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아이디어를 뺏어가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앤디 워홀도 그 중 한 명입니다.
앤디 워홀이 전시에 찾아와 ‘멋지다, 야요이! 너무 좋은데’라고 했어요. 그리고 얼마 뒤, 자신의 전시에서 소 이미지로 벽을 뒤덮었더군요. 그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앤디는 내가 한 것을 그대로 베껴서 전시했지요.
(쿠사마 야요이가) 1961년 제작한 〈글자들의 축적〉은 자신의 이름이나 특정 단어가 쓰인 스티커를 쌓아나가듯 반복하여 붙인 콜라주 작품입니다. 이후 쿠사마는 좀 더 본격적으로 반복 패턴 작업을 하기 시작하는데, 이즈음인 1962년부터 앤디 워홀도 실크스크린을 이용한 반복 패턴 작업을 시작합니다.
앤디 워홀의 유명 작품인 〈녹색 코카콜라 병〉을 볼까요? 하나의 모티브를 반복해서 배열하는 아이디어가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과 똑같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인 1962년에 〈캠벨 수프 캔〉을 발표합니다. 친구이자 라이벌인 쿠사마가 집착해서 써왔던 반복적인 패턴이 겹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었을까요?
_ 『그림 읽는 법』 중에서
그밖에도 클라스 올든버그, 루카스 사라마스까지. 자신의 아이디어를 빼앗은 작가들이 보다 더 주목을 받는 것을 보며 쿠사마 야요이는 좌절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쭉 작품활동을 했고, 1989년 뉴욕 인터내셔널 현대미술 센터에서의 회고전을 시작으로 세계적인 작가가 될 수 있었죠. 아마 지금은 대중들에게 앤디 워홀만큼 유명한 작가가 되지 않았나 싶네요.
책 『그림 읽는 법』의 저자 김진은 이를 보고 ‘진짜’는 인정 받기 마련이라며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그 말을 다시 저자에게 돌려줘도 될 것 같아요. 누구나 미술을 말하는 시대에 이런 통찰력 있는, 많이 말해지지 않은 깊은 이야기를 꺼내는 책도 ‘진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요.
파리 유학생의 미술 교양수업
책 『그림 읽는 법』의 저자는 프랑스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한 유학생입니다. 그때 듣고 모은 이야기를 처음엔 유튜브 채널 ‘예술산책’으로, 이번에는 차분한 종이책으로 전하게 되었습니다. 파리1대학 교양미술 수업이라는 부제처럼 수준 높은 강의를 청강하는 느낌입니다. 아마 이런 강의가 있었다면 미술을 흥미롭고 생생하게 배울 수 있었을 텐데요.
이 책에는 예술의 중심지 파리 미술대학 강의실에서 현재 가장 뜨겁게 다루고 있는 주제들이 담겨 있습니다. 가볍기만 한 내용보다는 주제마다 조금은 더 깊은 지식을 나누고자 했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학술적이거나 난해한 이야기는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모든 열정과 노력을 쏟았던 미술 수업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_ 『그림 읽는 법』 중에서
책은 저자의 열정만큼 미술이 가진 좋은 질문들을 소개합니다. 각 화가의 이야기와 작품 의미 뿐 아니라 그림을 읽으며 같이 곱씹어 볼 주제도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에드바르 뭉크로는 예술은 구원이 될 수 있을지, 한 판 메이헤렌에선 위조도 예술이 될 수 있을지 이야기합니다. 요한 하인리히 퓌슬리에서는 이런 얘기도 할 수 있겠네요.
'우리는 왜 공포스러운 그림을 보고 즐거움을 느낄까요?'
현대미술 애호가로서 특히 좋았던 부분은 현대미술에 대한 편견과 오해에 맞서 다양한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것입니다. 현대미술을 다루는 콘텐츠에는 꼭 비싼 가격이나 점만 찍은 작품이라는 평가, 예술은 사기이고 부자들의 탈세 수단이라는 반응이 잇따라 오곤 하는데요. 저자는 왜 현대미술이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부터 차근차근 짚습니다.
그중 ‘예술은 사기’라고 말했던 백남준을 소개하는 챕터를 볼까요? 백남준은 어떤 의미로 '예술이 사기'라고 말한 것일까요? 사실 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누군가를 속여서 돈을 버는 ‘사기’와는 다른 의미로 해석됩니다.
(백남준의 인터뷰) 전위예술은 한 마디로 신화를 파는 예술이지요.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의 실험이기도 합니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가 힘들지요. 어느 시대든 예술가의 속도가 자동차로 달리는 것이라면 대중의 속도는 느린 버스로 가는 정도입니다. 원래 예술이란 반이 사기입니다. 속이고 속는 거지요. 사기 중에서도 고등 사기입니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입니다.
_ 『그림 읽는 법』 중에서
저자는 이를 쉽게 풀어 설명합니다. 대중은 예술가의 새로운 실험에 충격에 빠지고, 의도를 고민하다 마침내 어떤 철학적 메시지를 알아차리거나 이해할 수 없게 됐을 때, ‘사기’를 당한 것처럼 얼떨떨함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즉, 충격과 혼란을 거쳐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감동을 느끼게 한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책을 읽다보면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던 현대미술에 대한 오해가 한꺼풀 벗겨지게 됩니다.
정답이 존재하지 않아 더욱 난해한 현대미술의 세계.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어쩌면 현대미술은 어렵고 이상하다는 선입견을 내려두었을 때, 매력적으로 보이는 세계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세계가 궁금하다면, 파리와 한국, 오해와 진실을 거침없이 횡단하고, 미술 곳곳을 거닐며 이야기를 다듬은 이 책과 동행해보시길 바랍니다.
* 아트인사이트 문화초대로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