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라는 끝이 있어 찬란히 빛나는 삶이 있기에
죽음은 항상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싶은 존재였다. 물끄러미. 그 존재는 형체는 없지만 날 따라다니고 있었다. 생명으로 가득 찬 육체가 움직이는 몸짓에 죽음의 시선이 슬쩍 스치는 듯한 날들이 있었다. 무언가를 두려워할 때, 누군가의 죽음 앞에 섰을 때, 내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어렸을 때부터 나는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하곤 했다.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에 대해서 말이다. 엄마는 종종 자신이 죽고 난 뒤를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죽는다'는 가정 자체가 너무도 무서웠지만, 곧 익숙해졌다. 감정에서 빠져나와 현실적인 생각들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은 누구나 죽고 또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그러게.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는데. 눈 앞의 사소한 것들에 괴로워할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나에게도 죽음은 항상 멀리 있었다. 건너 건너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얘기를 듣기도 했지만 스쳐 지나가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던 작년, 죽음은 처음으로 나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짧은 시간에 겪은 두 번의 죽음은 결코 스쳐 지나가는 것이 될 수 없었다. 죽음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으면서 사실은 하나도 몰랐다. 보아온 것과 내 것은 달랐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에 나는 죽음에 관련한 전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잘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하는 전시였기에 진행하는 내내 알고 있던 죽음과 모르고 있던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은 내게 온 죽음을 돌아보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작가로 참여하는 친구들의 작품을 보면서, 또 방문한 관람객들이 남기고 간 흔적들을 보면서 흔히 들을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생각들을 만나며 나를 정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을 그린 화가들, 순간 속 영원을 담다(박인조 저)'가 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죽음과 마주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그때의 기억이 났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림은 솔직하고, 생생하기 때문이다. 당장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두렵기만 하다. 하지만 작품에서 극적인 모습으로 묻어 나오는 죽음의 흔적들을 따라 우리는 누군가의 앞에 놓인 죽음을 바라볼 수 있다. 이 흔적은 이내 나의 발끝까지 도달하게 된다.
대 피터르 브뤼헐의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은 이카로스 신화에 대한 이야기다. 이카로스는 밀랍으로 깃털을 엮어 만든 날개로 하늘 높이 날다가 태양빛에 밀랍이 녹아 추락하는 인물이다. 제목은 분명 이카로스에 대한 작품인데 이카로스는 보이지 않는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시골 풍경 뿐이다.
왼쪽 빨간 상의를 입고 있는 농부는 말을 이용해 밭을 갈고 있다. 그 뒤로 보이는 양치기는 어쩐지 하늘을 쳐다보고 있고 그의 오른쪽으로 배가 보인다. 선원들은 돛대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열심히 일을 한다. 찬찬히 이카로스를 찾기 위해 넓은 바다를 살피다 보면 오른쪽 구석의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물가에 쪼그려 앉아 있는 그는 낚시를 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앞. 그곳이 바로 우리가 찾던 곳이다. 하늘에서 떨어져 두 다리를 버둥거리며 잠겨가는 이카로스가 여기 있다.
브뤼헐은 풍경화를 바탕으로 풍자와 해학을 담아내는 화가였다. 이전까지 아무도 관심이 없던 풍경화를 하나의 장르로 개척한 화가이기도 하다. 이 작품 역시 곳곳에 풍자적인 요소가 가득하다. 밭을 갈고 있는 말은 눈가리개를 하고 있고 말 앞의 덤불 사이에는 죽은 것처럼 보이는 남성의 머리가 불쑥 나와있다. 물에 빠진 이카로스 앞에서 낚시를 하는 남성을 부리부리한 눈의 새가 지켜보고 있다. 보고도 보려고 하지 않는 남성을 조용히 탓하는 듯하다.
이카로스의 죽음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관심이 없다. 펄펄 날리는 깃털들의 잔해와 물결의 파동으로 다른 소음들 속에 죽음은 조용히 묻힌다. 세상은 한 없이 느긋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눈 앞의 삶, 자신의 이익을 좇으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타인의 죽음은 잠시의 동정도 주어지지 않는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던 시기, 히에로니무스 보슈는 인간의 죄악을 소재로 한 독특하고 기괴한 그림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가 그린 '바보들의 배'는 죽음으로 향하는지도 모르고(돛대에 해골이 걸려있다.) 쾌락과 유희에 젖어 있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듯하다.
배의 중간에 탁자를 놓고 수도사와 수녀는 큰 소리로 무언가 소리치는 것처럼 보인다. 신의 이름을 빌려 타락을 일삼던 중세 교회를 비판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수녀가 들고 있는 만돌린처럼 보이는 악기와 책상 위의 버찌 열매는 정욕을 뜻한다. 그 뒤의 사람들은 앞다투어 매달린 동그란 무언가를 먹기 위해 탐욕으로 혈안이 되어 있다.
배의 곳곳에 술이 나뒹군다. 왼쪽 하단의 한 수녀는 다른 남성과 싸우고 있으며 그림 중앙의 나무를 오르는 사람은 날카로운 칼로 음식을 쟁취하고자 한다. 이끄는 이 없이 배는 유유히 죽음으로의 항해를 시작한다. 작은 배를 가득 채워 엉켜 있는 사람들, 바보들의 배는 기괴한 인간 사회의 생리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보슈의 난해하지만 환상적인 그림은 한번 보면 잊기 어려울 정도로 강렬하다. 그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 벌어졌던 폭력과 부패, 범죄 등으로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가감 없이 담아낸다. 보슈의 그림 속 인간들은 끔찍한 꿈속에 나올 법한 악마처럼 그려져 있다. 결국 이 모든 탐욕의 결말은 종말과도 같은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화가들은 죽음에 관해 다양한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신화 속 죽음부터 전쟁, 내 곁에 성큼 다가온 나의 죽음까지. 죽음의 허망함으로 가득 차 모든 것은 헛되다는 바니타스라는 작품들마저 존재한다.
미술의 탄생으로 일컬어지는 동굴벽화에도 죽음이 그려졌다. 죽음은 미술의 탄생부터 함께 했고, 늘 화가들의 뮤즈였다. 고통과 공포, 혹은 호기심과 아름다운 낭만으로 화가들은 각기 다른 죽음을 그려냈다. 결핵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을 아름답다고 그릴 정도였으니. 정말 다양한 관점이지 않은가.
책에서 소개하는 모든 화가가 이렇게 우울하고 비판적인 그림만 그린 것은 아니다. 그중 이 두 작품을 언급한 것은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 우리가 그림을 통해 죽음을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를 잘 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브뤼헐과 보슈의 그림은 끔찍하지만 죽음 앞에 선 우리의 태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몇 백년 전의 그림인데도 말이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보다 눈앞의 이익이 중요하고, 어떤 죽음으로 흘러가고 있는지보다 현재의 욕구에 충실하다. 죽음은 항상 남의 것이며 스쳐 지나가기만 한다.
미디어에서는 매일 같이 수많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높아져만 가는 자살률, 최근에는 바이러스로 죽어가는 전 세계의 사람들이 숫자의 형식으로 통보된다. 오늘은 몇 명, 오늘은 몇 명. 잠깐 귓가를 스치고 사라진다. 가끔은 이런 현실이 굉장히 비참하게 느껴진다. 나와 관계없는 모든 이들의 죽음에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죽음에 무신경하게 구는 것도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우리가 할 일은 아니지 않을까.
죽음은 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고 당장 현재가 중요하다고 해서 찾아오지 않는 것도 아니다. 타나토스(죽음)은 늘 우리 곁에서 에로스(삶)가 쥐고 있는 다른 한 쪽 손을 쥐고 있으니 말이다.
죽음이라는 끝이 있어 찬란히 빛나는 삶이 존재할 수 있기에 우리는 죽음을 마주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다. 그렇다면 오늘은 화가들과 도란히 앉아 죽음과 대화를 나누어 보는 것은 어떨까. 두려움만은 아닌 다채로운 감정으로 작품들이 대신 죽음에 말을 걸어줄테니.
이 글은 아트인사이트에서 도서를 받고 기고한 글입니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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