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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슬비 Jun 14. 2020

기록하지 않아도 내가 널 전부 기억할 테니까

나는 기억력이 아주 좋다. 그래서 기록을 하지 않아도 많은 것을 기억한다. 그래도 일기를 돌아보면 그때의 감정, 느낌, 생각들이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감정이라는 건 왜곡되기 마련이라, 아무리 기억력이 좋아도 그때의 감정은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과 매우 다르더라. <죽지 않고 살아내줘서 고마워>를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아니 내 삶에 아주 강렬한 기억이 되어주셨던 교수님이 계시다. 교수님이라고 하면 권위적이고 거리감이 있을 것 같지만 내게는 엄마 같은 분이셨다. 엄마를 제외하고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고,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인생의 멘토였다. 또 다른 엄마 그 자체였던 교수님이었다. “교수님, 우리 평생 친구 해요.” 이 말이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 우울증이 극심한 내가 위험한 시도를 하고, 교수님은 그것에 상처 받아 나를 떠나셨다. 교수님 마음이 이해가지 않는 게 아니다. 단순히 이렇게 말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우리 사이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교수님을 미워할 수도, 원망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나는 나를 원망할 수도 없다. 자책할 수 없다. 내가 그러지 않았으면 우리는 여전히 웃고 울었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프기 때문이다. 친한 동생이 말했다. “언니와 교수님 관계 정말 멋졌는데…….” 정말 멋진 관계였다.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그게 교수님의 일방적인 희생이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고 나서는 달라 보였다. 멋져 보이는 관계 가운데에 나는 교수님이 마냥 좋았고, 교수님은 내 우울을 감당하기 어려우셨을 테다. 이건 그렇다고 나를 탓할 수 없다는 생각을 계속한다. 나도 차마 나에게 뭐라 할 수 없다. 마음껏 울지 못하면서 살아왔던 나를 탓할 수 없다. 그나마 교수님께 나의 눈물을 보였던 나를 탓하기가 어렵다. 교수님과 나의 불안정한 관계도 내가 온전히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너무 미안하다. 내 병으로 사람들이 떠나간다. 나는 내 병으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가끔은 내 존재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만 같고, 가끔은 내 존재 자체로 아픔을 주는 것 같다. 그래서 생각한다. 사람들이 내 곁에 있을 때 더 소중히 여겨야지, 그때의 감정을 기록해야지. 물론 기록하지 않아도 나는 그들을 기억한다. 하지만 너무 소중해서, 나는 사람이 너무 소중하고 소중해서 기록을 해야겠다. “기록하지 않아도 내가 널 전부 기억할 테니까.” 소중했던 사람과 보낸 시간은 많은데, 그 모두가 내 기억 속에만 있다. 물론 <죽지 않고 살아내줘서 고마워>에 담겨있지만, 그건 극히 일부다. 교수님과 단 둘이 찍은 사진 한 장 없다. 기록하지 못했지만, 소중하고 소중해서 내가 전부 기억할 것이다. 마치 엄마 잃은 아이처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엄마가 아닌데 엄마처럼 생각했던 게 잘못이었을까. 이 소중한 관계는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내가 건강할 때 만났더라면 괜찮았을까. 내가 준 상처는 내 탓일까. 내가 어떤 것도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던 건지, 그렇게 소중했던 관계에서 이제 남아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나는 조금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소중했던 기억을 아주 예쁘게 간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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