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각자의 ‘런웨이’에서 일하고 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19년 만에 다시 말을 걸어올 때

by 애카이브

뉴욕 곳곳에서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의 촬영 장면이 포착되고 있다. 한때 센세이셔널했던 미란다 프리슬리와 앤디 삭스의 이야기가, 무려 19년 만에 다시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이 영화는 화려한 패션 영화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뉴욕이라는 도시가 가진 환상의 결정체일지도 모른다.

놀랍게도 나에게 이 영화는 인생 영화 10편 중 하나다.

OCN에서 이 영화가 편성되기라도 하면, 평소엔 거의 켜지 않는 TV 앞에 묘하게 눅진히 앉아 끝까지 보게 된다.

왜 이렇게까지 이 영화를 좋아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니, 그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사회 초년생 시절의 앤디에게, 나 자신을 너무 쉽게 투영해 버렸기 때문이다.


명문대를 졸업한 앤드리아 삭스, 일명 앤디는 최고의 저널리스트를 꿈꾸며 뉴욕으로 상경한다. 그러나 그녀의 이력서에 답을 준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세계 최고의 패션 매거진, ‘런웨이’뿐이다. 원하던 ‘기자’가 아닌, 악명 높은 편집장 미란다 프리슬리의 비서로 채용된다는 조건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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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바라던 커리어의 궤도와는 전혀 다른 자리.

앤디는 그곳에 마음을 열지 않는다.

런웨이의 업무를, 패션을, 그리고 그 세계를 은근히 얕잡아본다.

최고의 패션지에서, 최고의 편집장을 보좌하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복장이 세련되지 않다는 사실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제 옷이 끔찍한가 보네요. 이해했어요.
그래도 전 패션계에서 평생 일할 생각은 없거든요.
제가 여기 취직했다고 해서 옷 입는 것까지 바꿀 필요는 없잖아요?”

요즘 취업 준비를 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직무로, 원하는 회사에 들어가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나 역시 그랬다.

광고 캠페인을 멋지게 기획하고,

광고주와 능숙하게 커뮤니케이션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업계에 들어왔지만

인턴으로 있었던 첫 회사에서 내가 맡은 일은

회의록 작성, 견적서 정리, 디지털 배너 시안 제작 같은,

어찌 보면 아주 사소해 보이는 업무들이었다.

처음에는 속상했다.

‘내가 생각하던 광고 일이 아니야’라며 울기도 했고,

어렵게 얻은 기회였음에도 그만둘까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주어지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며 온 힘을 다하지 않게 되었다.

그때의 나는, 영화 속 초반의 앤디와 꽤 닮아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성장했다고 느낀 순간이 찾아왔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왜 나에게 이 업무를 맡겼는지, 이 문서에는 어떤 정보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일을 조금 더 ‘잘’할 수 있을지 말이다.

그때 알게 되었다.

어느 회사에 다니느냐, 어떤 일을 하느냐보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을 하느냐가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회사 생활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늘 대단하거나 낭만적이지 않다.

사소한 하루들이 모여 대단한 결과를 만들지만,

매일매일은 반복적인 업무와 비효율적인 회의의 연속이다.

특히 일개 인턴으로서 회사와 팀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 업을, 이 회사를, 이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나에게 주어진 일을 ‘배움의 기회’라고 믿는 순간

비로소 나는 성장할 수 있었다.

회의록을 쓰며 AE가 광고주와 어떻게 소통하는지 배웠고,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떤 태도로 대응하는지를 지켜봤다.

견적서를 작성하며 하나의 TVCF에 어떤 비용 구조가 들어가는지 이해했고,

그 경험은 이후 기획서를 쓸 때 자연스럽게 예산 감각으로 이어졌다.

무슨 일을 하든, 분명히 배울 점은 있다는 믿음.

그 믿음에서 나의 변화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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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마지막, 앤디는 결국 런웨이를 떠난다.

그리고 다른 신문사 면접 자리에서,

편집장이 미란다에게 앤디에 대해 묻자

미란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녀는 나를 가장 실망시킨 비서예요.
그리고 그녀를 뽑지 않으면, 당신은 바보죠.”

이 장면이 말해주듯,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설령 그것이 우리가 가려는 길이 아니라고 느껴질지라도—

결코 허튼 일이 아니다.

모든 경험은 이어져 있고,

우리가 했던 선택과 노력은

어떤 형태로든 현재와 미래에 남는다.


그래서 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앤디들에게 감히 말하고 싶다.

지금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지금 서 있는 자리가 내가 꿈꾸던 무대가 아니더라도,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보라고.

우리는 모두 각자의 ‘런웨이’ 위에서 일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길은, 생각보다 훨씬 멀리까지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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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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