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통하지 않는 둘 이상의 언어 사용자 사이에서 그들이 사용하는 말을 이해하여 그 뜻을 전해주는 행위.
말은, 내 의도대로 ‘내보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말은, 상대가 그것을 이해했을 때에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전 세계에는 약 7,100개 이상의 언어가 존재한다고 한다.
그중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약 8천만 명.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약 8천만 명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같은 언어를 구사한다고 해서 같은 뜻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문장을 듣고도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미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드라마 <이 사랑 통역 되나요?>는 말한다.
“이 지구에는 인구수만큼의 언어가 존재한다”라고.
그렇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언어로 말한다.
‘좋아한다’는 말 대신
“여행 갔다가, 네가 생각나서 사 왔어.”라고 말하고,
‘사랑한다’는 말 대신
“너는 왜 맨날 이런 식이야.”라고 말하기도 하고,
‘더 오래 같이 있고 싶다’는 말 대신
“우리 집에서 라면 먹고 갈래?”라고 말하기도 한다.
표현은 돌려 말해지고,
감정은 포장되고,
진심은 자주 은유 속에 숨는다.
그런 의미에서 통역사는
수천, 수만 개의 언어를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다.
단순히 단어를 바꾸는 사람이 아니라
뉘앙스를 읽고, 침묵을 해석하고,
말과 말 사이의 공기를 옮기는 사람.
그래서 통역이라는 일은 신기하면서도 매력적이고,
동시에 무섭다.
통역사가 전하는 한 문장이
두 사람을 잇는 전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통역사의 다른 의도가 개입되는 순간,
두 사람은 그것을 ‘진실’로 믿게 된다.
<이 사랑 통역 되나요?> 속 주호진은 차무희와 히로의 말을 통역한다.
때로는 히로의 말을 생략해 차무희에게 ‘덜 상처가 될 말’로 바꾸어 전하고,
때로는 차무희의 말을 일부러 오역해 히로에게 골탕을 먹이기도 한다.
히로의 사랑 고백을 먼저 알아듣고
그 말을 어떻게 옮길지 혼자 고민하는 장면에서는,
통역이라는 일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느끼게 된다.
내가 말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보다
내 말을 먼저 듣고, 먼저 이해하는 사람.
그리고 그 말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시 만들어 건네는 사람.
그게 내가 이 드라마를 보며 느낀 ‘통역가’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같은 한국어를 쓰는 우리끼리는
정말 통역이 필요 없을까?
친구와 사소한 말 한마디로 멀어진 적은 없는지.
부모님께, 연인에게,
내 마음과는 다르게 나온 말로 상처를 준 적은 없는지.
우리는 같은 언어를 쓰지만,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 자주 엇갈린다.
누군가는 “괜찮아.”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괜찮지 않고,
누군가는 “마음대로 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붙잡아 주길 바란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번역되지 못한 감정들 사이에서 헤맨다.
통역사가 하지 못하는 일이 무엇일까.
통역이 필요 없는 일은 무엇일까.
아마도
너와 나의 관계,
그날의 분위기,
그리고 나의 감정일 것이다.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말할 때,
그 문장은 맥락을 추측하지 않아도 이해된다.
좋아.
싫어.
보고 싶어.
같이 있고 싶어.
돌려 말하지 않아도 되는 문장들.
통역이 필요 없는 말들.
<이 사랑 통역 되나요?> 속 도라미가 던지는 직설적인 말들은
그래서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누군가 대신 해석해주지 않아도,
그 자체로 완전한 문장들.
우리는 너무 자
통역에 기대어 관계를 이어가려 한다.
‘내가 이렇게 말했으니 알아서 이해해 주겠지.’
‘이 정도면 눈치채겠지.’
하지만 관계는 추측이 아니라
명료함 위에서 자란다.
누군가가 대신 번역해 주기를 기다리기보다,
내가 직접 말하는 용기.
오해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조금 더 솔직해지는 선택.
이 지구에 인구수만큼의 언어가 존재한다면,
사랑은 어쩌면
서로의 언어를 배우려는 노력일지도 모른다.
통역에 의존하지 말자.
우리의 감정에 솔직해지자.
그리고 언젠가는,
통역 없이도 서로를 알아듣는 언어로
가장 솔직한 마음을 건넬 수 있기를.
-
커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