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혼여행에서 발견한 의미
가족을 따라, 학교를 따라, 친구를 따라. 여행은 그게 전부였다.
혼자서 뭘 못 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여행은 혼자 갈 계기도 이유도 없었다. 원체 효율을 중시하는 성향인 터라 굳이 새로운 장소를 찾지도 않았다. 안 가본 곳에 갈 필요를 못 느꼈고, 그 필요가 없는 곳에 시간을 쓰는 게 비효율이라 느낀 거다. 그래서
매번 가던 곳, 가야 하는 곳, 가자 하는 곳. 그렇게만 다녔다. 제한적인 이동에도 불구하고, ‘영역 확장’을 느낀 중학생 때. 초등에서 중등으로, 중등에서 고등으로 갈수록 발이 닿아야 할 곳은 넓어졌다. 아는 영역이 늘어나며 동시에 은근한 희열을 맛봤다. 세상이 넓어지는 기분과 함께. (이후, 아무도 모르게 내 안에서 여행을 꿈꾸는 마음이 자라났던 것 같다.)
2020년,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변하는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상황이 변했다. 더 말하기도 지겨운 코로나. 그 코로나 덕에 마주한 상황. ‘자유롭게 여행 다니는 성인’이라는, 미성년이라면 누구나 지닐 로망을 내 것으로 할 수 없는 시절. 원망스러웠다. 원망할 주체가 없어 스스로를 원망하기도 했다. 왜 하필 이때 태어나서. 왜 지금 스무 살이어서. 그렇게 성년의 초입을 여행이 불가능한 시절에 보내고 나니, 여행이라는 말 자체가 낯설었다. 그렇게 여행은 내게 벽이 되었다.
벽을 두드리고 넘겨 다리로 만드는 과제가 있다. 그건 ‘벽 과제’로, TBWA KOREA 주니어보드에서 진행한다. 그 벽 과제를 해야만 하는 때가 왔고. 어김없이 혼자서 여행을 가게 되리란 걸 짐작한다. 내 앞에 벽은 수없이 존재하고 있었다(지금도 그렇다.). 취미, 헬스, 운전면허, 영어 등등. 벽 과제를 내신 유병욱 CD님과 10분 정도 어떤 벽을 넘겨 볼지 이야기하고, 하나의 벽을 선정했다. 역시나 결정된 하나의 벽은 혼자서 여행하기. 그와 함께 안 가본 곳 가기가 조건이었다. 그렇게 나는 5주간 동묘, 상암, 용산, 인천, 부산 그리고 제주까지 여행한다.
처음 발길이 닿은 곳은 동묘. ‘동묘’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투박하고 조금 거친, 소음으로 가득한, 그럼에도 정겨운, 그런 이미지. 가본 적은 없었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맞는지 ‘검증’하는 차원에서 다녀온 것도 있었고, 첫 번째 행선지로 CD님께서 추천해 주신 것도 있었다. 이 여행의 목적이 ‘영역 확장’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러 곳을 다니며 나의 취향이 대체 뭔지, 좋아하는 게 뭔지 찾으려는 저의도 있었다.
취향 찾기의 결론을 말해보자면(과정보다 결론을 먼저 얘기하려는 습관이 있다), 확고해졌다. 원래 희미하게 의심 들던 것들이 선명해졌다. 다만 취향의 확장은 이룩하지 못했다. 새로운 거리, 새로운 노래, 새로운 분위기, 새로운 무언가에 익숙해진다거나 좋아하는 마음이 든다거나 더 알아가고 싶다거나 하는 경우는 없었으니. 모든 여행이 끝나면 확장이 될까 기대를 품기도 했다.
6월 중순의 동묘는 더웠고, 햇빛을 가리면 손등이 뜨거웠다. 꽤 시간이 지났지만, 그 열기는 기억난다. 상당히 더웠다. 걷다 보니 동대문에 닿았다. 동대문 옆이 동묘인 줄 몰랐다. 동묘 시장에는 ‘영문 간판’이 없다. 주위에 온통 한글(혹은 간혹 보이는 한자)뿐. 그러나 분위기는 왠지 이국적이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분위기. ‘응답하라’ 시리즈의 배경을 옮긴 느낌. 마냥 좋지만은 않았던 돌아가신 친할머니댁의 향취.
구제시장, 벼룩시장만이 아닌 문구완구 시장이 동묘에 있단 걸 아는가? 난 6월 14일까지도 몰랐다. 어릴 적 가던 문방구에 파는 자잘하고 귀여운 것들. 동묘 문구완구 시장에서 판다. 가끔가다 도매로 파는 가게에서 딱 하나만 구매하고 싶다면, 운 좋게 포장이 뜯겨 있는 묶음을 발견해야 한다. 마음에 들어도 똑같은 제품 30개가 지루히 들어있는 걸 살 순 없는 노릇이니.
나쁘지 않았다.
바깥일에 정신이 팔려 안의 일에 신경 쓰지 못할 때가 많다. 난지도 하늘공원에 가을이 예쁘게 물들었을 때, 데이트한 적이 있다. 난 함께하지 못한 데이트. 엄마와 언니, 동생 셋이 한 데이트. 내겐 미지의 데이트였고, 그 미지의 데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듣거나 사진을 구경하며 상상하곤 했다. 하늘공원이 어떤 곳일지.
상상 속 하늘공원은 이랬다. 대충 하늘공원이 어떤 배경으로 조성된 곳인지는 알고 있었기에. 쓰레기를 매립했으려나? 그럼 엄청 높은 언덕이겠고. 길이 있으려나? 그 길은 곧게 뻗어 있을 거야. 하늘 공원이니까 아무래도 그 끝은 하늘이겠지. 길을 다 오르면 하늘이랑 가까운 넓은 공원이 있겠지. 그래서 하늘공원이겠지. 하늘을 좋아하는데, 그럼, 하늘공원도 좋으려나.
직접 본 하늘공원은 이랬다. 구불구불했다. 길이 곧게 뻗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어디부터가 공원이고 어디까지가 공원인지 알기 어려웠다.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하늘공원이 맞나? 지도를 보니 노을공원도 있단다. 대체 나는 노을공원일까 하늘공원일까. 어디를 걷고 있는 걸까. 그리고 왜 걷고 있는 걸까.
걷는 동안의 생각과 느낌들
1. 새는 생각보다 많이 울고, 강아지 유모차는 필요하고, 나뭇잎은 빛을 적당히 투과한다.
2. 언덕의 중간중간에 있는 벤치는 다정하다.
3. 자연을 사랑할수록 따뜻한 색을 사랑하게 된다.
4.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는 물 흐르는 소리와 같다.
처음 걷기 시작했을 땐, 언덕이 없었다. 우선 평지를 걸었다. 하늘 위에만 넓은 공원이 있는 게 아니라, 땅에도 넓은 공원이 있었다. 가족 단위의 방문객이 많았다. 그 미지의 데이트처럼. 순간 혼자인 게 싫었다. 나도 끼고 싶어 지긋이 바라봤다. 물론 발은 걸어가고 있었다. 보고 있다는 걸 들키기 싫어 멈추지 않고 곁눈질했다. 음, 왜 눈치를 보고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대담하게 쳐다봤다. 멀리서 사진도 담았다. 누워서 들판을 즐기고 땅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어린 아들과 그 아빠의 공놀이, 벤치에 앉아 떠드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다 멈춰 라디오를 크게 틀어 놓고 땀을 식히는 아저씨. 난 그 옆에서 그림을 그렸다. 무릎에서 그림을 그리고 났더니 허벅지가 축축해졌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슬픈 느낌은 아니었고, 아무 생각 없었다. 사실 걷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노래가 들렸다. 그 소리를 따라갔다. 이무진의 목소리였다. 바로 검색해 보니 난지도 한강공원에서 페스티벌을 한단다. 그러나 듣기만 하고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돌아갔고, 다시 올라갔다 하늘로. 목적 없이 걸었다. 목적은 하늘로 가는 거였다.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거였다. 의무감으로 걸어버리고 있었다. 오후 3시에 하늘공원 입구 같은 곳을 지나기 시작해서 5시쯤 하늘에 닿았고 다 내려오니 7시였다. 4시간을 의무감으로 걸어버리고 말았다.
그 목적 없는 의무감은 나름 좋았다. 노래를 들으며 걷기도 하다가, 노래 없이 길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며 걷기도 하고. 앉아서 쉬고 싶을 때 쉬고, 뛰고 싶을 때 뛰었다. 언덕이 엄청났다. 처음의 평지는 잠깐이었고, 그 뒤로 전부 오르막이었다. 탈 것이 있었다. 돈을 내면 위로 태워다 주는 거였다. 타고 싶지 않았다. 혼자서 위로 가고 싶었다. 고집을 부렸다. 쓸데없는 고집이었지만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거였다. 내가 내 마음대로 가고 싶은 길로 가고 원하는 템포로 가고 다 내 마음대로. 워낙 산책을 좋아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죽고 싶었을 거다. 왜냐. 정상을 향해 걷다가 힘들 때쯤 돌아가고 싶으면, 중간에 빠져나올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때 생각한 것 같다. ‘8시간 걸어서 어디든 닿는 곳으로 가버리자’ 했을 때 ‘왜?’가 아닌 ‘좋아’, ‘그래’의 대답을 하는 사람을 찾고 싶다고. 8시간이 아닌 4시간의 그냥 걷기도 쉬이 함께하겠다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인생에서 그런 사람을 하나라도 만난다면 가능한 모든 걸 다 해주리라 생각했다.
오후 3시부터 7시까지, 4시간의 코스. ‘여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 의무감으로 시작한 ‘코스 완주’의 목표는 잠깐잠깐의 마법 같은 소중한 순간을 선물해 줬다. 가족 간 나들이 온 사람을 보고, 홀로 라디오를 들고 거니는 어른을 보고, 연인이나 어린아이, 그런 사람을 보면서 나도 나를 볼 수 있었다.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정상에 펼쳐진 들판은, 그때만큼은 세상 가장 넓은 초원이었고, 푸른 하늘은 말 그대로 수채화였다. 이런 감상 자체에서 의미를 찾았다. 그 들판에서 웨딩 촬영을 하는 사람도, 화보를 찍는 온통 백색의 옷을 입은(아니라면 일부는 벗고 있는) 사람도 봤다. 나는 그 옆에서 그림을 그렸다. 온종일 햇볕을 쬔 뜨거움이 무섭지도 않았는지 바닥에 그냥 앉아버렸다. 바지가 녹지 않은 게 신기했다. 햇빛을 느끼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거다. 마음에 든 건 그 순간이었다. 괜히 낭만을 누리는 사람이 됐다. 생각보다 낭만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몰랐다.
가장 익숙하면서도 모르는 곳이 ‘용산’이다. 학교가 있으니, 의무감으로 알게 된 영역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가야 하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그렇기에 가던 곳만 가버리게 되었던 곳. 그래서 그중에서도 더 익숙하지만 더 모르는 곳에 갔다.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을 관람했다. 이날 정말 밖으로 나오기 싫었다. 비가 왔기 때문에.
한 번도 안 와봤다고 생각했던 곳이, 전시장 안을 들어서자 익숙한 곳으로 바뀌었다. 갔는지 안 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내 안에서 존재감이 작았던 곳이었던 국립중앙박물관. 이젠 평생 잊지 못할 여행의 한 조각이 됐고, 혼자 보는 전시의 묘미도 충분히 즐겼다. 여긴 상설전시관이니까. 내가 오지 않아도 계속 존재해 주겠지. 그 질리면서도 안정적인 사실이 고마웠다. 모든 게 변한대도 전시된 ‘것’들만은 변치 않겠지. 그런 믿음.
기획전시관이라면 몰라도, 국립중앙박물관의 상설전시관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방금까지 고맙다 했으면서) 그런 지루한 전시도 유심히 보는 사람이 나다. 재미없고 지루한 것들에도 재미있고 신나는 면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부분을 포착하는 건 꽤 흥미롭다. 거대한 불상을 오랫동안 보면서 ‘왜 저런 표정일까?’ 생각하는 일. 그런 데에서 재미있고 신나는 면의 발견은 시작된다. 혼자 상상하고 즐기는 거다.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내에는 숨은 쉬는 공간이 곳곳에 있다. 그중 어느 곳은 앉아서 읽을 수 있도록 책을 마련해 놨다. 그곳에서 읽은 하나의 책 속 여러 문장
“괴로운 순간이었지. 그 시절 하늘을 보며 촘촘한 별을 세고 검은 저 산 너머로 달이 지는 걸 쳐다보며 눈물을 삼킨 것이 오늘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된 것 같다.”
“크고 넓은 바다와 같이 모든 것을 받아주고 용서하고 파도처럼 사랑해야지.”
“추상과 구상은 서로 영향을 주는 현재. 자연 속에 추상, 구상 모두 존재한다. 남들이 하는 것 다 하고는 큰 사람이 못 된다.”
“사람들은 장점을 사랑하는데 그게 아니다. 사랑하는 이의 단점을 더 사랑할 수 있는 경지까지 올라가도록 애써야 한다.”
“사랑은 받을 때보다 줄 때 즐거움이 크다.”
“예술은 똥! 정신의 똥”
김종학, 『김종학의 편지』, 마로니에북스(2012)
남의 아버지가 준 사랑을 훔쳐다 마음에 담았다.
바다만 보고 왔다. 집에서 한 시간 살짝 넘게 이동하면, 내 옆에 바다가 있다. 이날은 바빴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바다를 옆에 두고 바람을 맞으며 일을 했다. 나를 다른 환경에 두는 일. 주기적으로 꾸준히,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장소에선 집중이 잘 된다.
갈매기는 왜 바다에만 있을까.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을 좋아했다. 어릴 적 여러 번 읽었다. 왜 그 이야기가 그리도 좋았을까. 좋아하고 여러 번 읽었다고 말했지만, 부끄럽게도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 줄거리를 보고 왔다. 지금 봐도 조나단은 내가 지향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렸을 때 좋아했던 이유가 이 때문인지, 아니면 어렸을 때 좋아했기에 지금 이런 의미를 지향하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건 갈매기다.
인천의 갈매기는 날지 않고 비둘기처럼 뒤뚱뒤뚱 걸으며 과자를 주워 먹곤 했다. 강아지는 과자를 먹으면 안 되는데, 갈매기는 과자를 먹어도 될까? 새우깡을 갈매기에게 처음으로 준 사람은 누구일까? 뭐 이런 생각을 했다. 바람을 맞으니, 별 생각에 다 휩쓸렸다.
바다를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바다와 인천의 바다는 닮은 듯 달랐다. 내가 좋아하는, 상상했을 때 떠오르는 바다는 백사장이 넓게 깔린, 투명한 바다였으니까.
대한민국에서 산 지 20년이 넘은 사람이, 부산을 한 번도 안 가봤다면. 얼마나 움직이지 않는 사람인지 대충 감이 잡히겠지. 난 그 정도다.
“나 부산 안 가봤어.”
라는 말을 하면 항상 돌아오는 건 놀랐다는 반응. 안 놀라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런 면에선 아쉽다. 이젠 저 말을 할 수 없게 됐으니. 그래도 괜찮다. 그 아쉬움을 달래주는 고마운 사실이 있다.
기대했던 부산은 어딜 가든 바다가 보이고, 더베이 포토 존에서 볼 수 있는 꽤 현대적인 건물들이 즐비한 도시였는데 그렇지 않았다. 부산은 아기자기하고 또 귀여운 매력이 있었다. 내가 갔던 곳은 송도와 영도. 1박 2일로 다녀왔다. 갔던 곳 중 가장 좋았던 곳은 감천문화마을과 흰여울문화마을. 그래도 다른 곳들이 섭섭해할지 모르니 하루씩 살펴본다.
첫째 날, 수서역에서 SRT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탈(타야 했던) 기차는 8시 10분 차. 기상 시간은 8시. 10분이 되기 전에 부랴부랴 기차 예약을 변경했다. 10분만 늦게 일어났더라면… 나는 그 10분을 무슨 정신으로 보냈는지 모르겠다. 그저 그 짧은 시간 동안 순발력과 기지를 발휘한 내가 감탄스러웠다. 그렇게 기차 일정을 바꾸며 내가 잡은 자리는 입석. 처음으로 타 보는 기차였기에 입석이 뭔지도 모르는 채 입석을 잡았다. 타야 하는 기차를 앞에 두고, 대체 내 자리가 어디인지 엄청나게 헤매며 입석의 뜻을 그제야 검색했다. 기차의 여러 칸 사이, 연결되는 곳에 있는 입석. 그곳에 앉아 동그란 창으로 바깥 풍경에 집중했다. 인제야 느끼지만, 서울로 올라올 때 탔던 일반석보다 부산으로 내려갈 때 탔던 입석이 더 좋았다.
부산에서의 일정은 나름 계획이 다 있었다. 첫날의 부산은 창비부산을 시작으로 이바구길, 감천문화마을, 송도 해수욕장까지였다. 혼자서 여기저기 탐험하는 기분이었다. 처음 와 보는 장소와 처음 느껴보는 분위기, 처음 맛보는 음식들. 특히 이날 감천문화마을에서 처음 보는 어르신과 나눈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감천문화마을은 높은 지대에서 바라보게 되어 있다. 올라갔으면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는 길을 개척하려던 찰나, 그 어르신께선 그 길로 가면 안 된다며 내게 말을 거셨다. 어르신은 감천문화마을의 가이드 일을 하시던 분이었다. 지금은 일하고 계시지 않지만, 아직 이 마을에 갖는 애정은 넘쳐 보였다. 내가 어르신의 나이가 됐을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고 있을까. 그건 알 수 없는 미래지만, 당시의 나는 바다를 거닐며 파도와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바다고, 내가 파도였다.
둘째 날, 일어나자마자 바다를 걸었다. 첫째 날에는 날씨가 흐렸다. 빗방울도 떨어졌고, 노을도 안 보일 정도. 여행했던 기간이 장마철이라 날씨가 따라주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비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장마철이기에 내일도 비가 올 거라는 어제의 예상과 달리, 둘째 날은 아침부터 쾌청했다.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를 만끽하며. 아침 산책을 했다. 지난밤과 어제는 외로웠다. 무언가에 쫓기듯 일정을 보내고, 혼자서 바다를 바라보던 침대는 더 넓게 느껴졌다. 필요 이상으로 넓은 침대에서 자게 됐구나. 생각했다. 이 좋은 풍경을 혼자 보는구나. 내 옆 방엔 누가 있을까. 아직도 저 해변을 걷는 사람은 누구일까. 불이 켜진 저곳엔 누가 뭘 할까. 잠에 쉽게 들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이튿날 눈은 일찍 떠졌다.
그래서 둘째 날엔 전날의 외로움을 달래고자 했다. 조금 더 여유롭게 움직이기로 했다. 흰여울문화마을. 오늘의 목표는 하나뿐이었다. 오전의 브런치도, 오후의 작은 소품을 파는 가게도, 또 들린 카페도 모두 흰여울문화마을. 옆에 바다를 둔 좁은 길을 따라 만들어진 흰여울문화마을. 해가 중천일 때부터 질 때까지 시간을 보냈던 흰여울문화마을. 우리 동네였으면 좋겠다- 근처에 살고 싶다- 생각이 들었던 흰여울문화마을. 이름도 기억하고 싶은 흰여울길, 흰여울문화마을. 나중에 부산을 다시 찾게 된다면, 흰여울문화마을을 다시 가고 싶다.
그곳에서 방문한 한 서점이자 카페. 그곳에서 『사랑에 대답하는 시』를 읽었다.
“어쩌면 사라지기에 사랑한다. 녹지 않는 눈사람은 징그럽고, 가짜 장미는 지루하니까. 왜 시들고 녹고 부서질 것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막상 그것들이 떠나가지 않으면 실망감을 느끼는 걸까”
열다섯 시인 중 이혜미, 『사랑에 대답하는 시』, 아침달(2021), p99
난생처음 가 본 부산. 특정한 무언가를 바라고 떠나진 않았지만, 내 기대를 충족시킨 여행이었다. 이유 없는 ‘망설임’이 자라나던 낯선 장소 속 혼자의 시간. 용기로 마주한 순간들은 다음 발걸음의 망설임을 줄여줬다. 부산에서의 이틀에 대한 감상을 키워드로 메모해 뒀다. 약간 엿보자면
1일 차 : 식초를 들이부은 냉칼국수, 높은 168계단과 운행 중지된 이바구길 모노레일, 전망대에서 본 부산, 버스 안 가득한 외국인, 송도로 안 가는 17번 버스, 송도 해수욕장을 찾는 어르신 셋, 비 맞은 산 위의 전망대, 밤의 바다, 송도 야경, 무서워 불 못 끄던 밤, 뜬 눈 샤워.
2일 차 : 아슬아슬 체크아웃, 바다를 닮은 음료, 알짱거리던 벌레, 작은 소품 가게, 아기자기한 것들, 골목의 색깔, 너무 많은 소품샵, 그 사이 책방, 뭔가 남다른 사장님, 장식된 손 글씨, 싸운 것으로 보이는 커플, 일하는 여자, 탁 트인 창, 고양이, 사랑에 대한 책, 잊지 못할 거리, 도넛, 반겨주는 도담이.
이제 서울로 올라간다. 부산에서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어, 늦은 기차표로 바꿀지 고민했다. 바꾸진 않았다. 첫째 날에 느낀 외로움을 달래려면
집에 가야 했다.
마지막 여행이다. 한 달 여정의 하이라이트. 혼자서 비행기를 탄다. 비행기를 탈 때 어떤 물품이 기내 반입이 안 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다행히도 부산 여행 이후, 제주 여행 이전의 짧은 기간에 친구와의 방콕 여행이 있었다. (여행에 미친 사람처럼 6~7월을 보냈다) 그 덕분에 미리 ‘비행기 탑승 연습’을 할 수 있었다.
부산에서 혼자 보낸 시간이 기대보다 소중했지만, 기대만큼 행복하진 않았어서. 내겐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렇게 제주에선 게스트하우스를 찾게 된다. 게스트하우스라 하면 저녁에 시끄럽게 파티를 열고, 술을 진탕 먹으며 친해지는 젊은 에너지가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건 내게 진짜 행복이 아니었기에 그렇지 않은 곳을 찾았다. 그렇게 닿은 곳은 서귀포시 대정읍, 제주의 서쪽 시골에 있는 오소소게스트하우스.
도미토리 4인실(여)의 창밖으론 돌담과 수국이 보인다. 오소소가 자리한 동네는 제주 중에서도 시골이라, 주변 어디에도 ‘놀거리’는 없었다. 한 번은 어딘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걷다가 동네 시골 개를 마주하고, 한 할아버지께 제주도민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제주 방언은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열심히 대화를 해본 결과 입수한 정보. 최근 여기에 묶어져 있는 개를 신고한 도민이 있어서, 동네 분들이 골머리를 앓았다 하신다. 그런데 내가 이 개들에게서 눈을 못 떼고 사진도 찍어대니 (귀여워서 찍은 거다) 며칠 전 그 신고를 한 게 나라고 생각하신 거다. 결국 뭐, 오해는 풀렸지만. 난 내가 뭘 잘못했나 순간 당황하기도 했다.
다시 오소소를 이야기하겠다. 말한 대로 시골이라 주변에 놀거리가 없어, 사업 머리가 좋으신 사장님께선 오소소 건너편의 우수수라는 펍도 운영하셨다. 저녁 7시부터 11시까지. 첫째 날 저녁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뻗어버려서, 8시쯤 일어나니 나 빼고 다 펍에 가 있었다. 혼자 하는 여행이 낯설었던 나는 본모습과 다르게 의기소침해졌고(실은 이게 본모습인 건 아닐까?), 조용히 다시 자기를 택하고 씻는다. 씻고 나와 보니 방금 막 도착해서 늦게 입실한 사람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운명적인 만남 같다.
아침 산책으로 오소소의 하루는 시작된다. 산책은 오전 7시 50분에 출발. 동그란 김남길 같은 사장님께선 매일 날씨에 따라 산책 코스를 정하신다. 나는 오소소에서 두 번의 아침 산책을 했다. 비 내리고 흐린 날씨의 첫 산책, 드라이브하며 남방큰돌고래를 보고, 카페에서 커피 타임을 가졌다. 사장님의 인생 일대기를 들었다. 기억에 남는 이야기 하나, 첫 직장 워크숍에서의 에피소드. ‘비즈니스캐주얼’로 오라는 공지에 비즈니스캐주얼이 뭔지 몰라 백화점에 가 “비즈니스캐주얼이 뭐예요..?”라 물으셨고, 그렇게 워크샵 당일에 홀로 자켓에 베스트까지 완벽한 비즈니스룩으로 회사의 연예인이 되셨다고 한다. 사진도 보여주셨는데 음… 이 이후로 사장님의 경험담은 100% 신뢰하게 됐다. 어김없이 또 흐린 날씨의 두 번째 산책, 고산 오름. 오름을 아주 처음부터 끝까지 오르진 않았고, 자동차가 들어갈 수 있는 곳까지 오른 뒤 걸음을 뗐다.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탁 트인 공기는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캠핑용 의자를 하나씩 지고 올라 정상에 펼치고, 원래라면 마을의 전경이 보여야 했을 안개를 바라보며 노래를 들었다. 10cm의 ‘서랍’. 이 글을 쓰며 노래를 다시 듣는데 괜히 울컥한다.
오소소는 이뿐만이 아니다. 오소소를 거쳐 간 수많은 사람의 기록, 그림일기가 7~9권 있었다. 나도 일기를 적고 싶었으나 남은 칸이 없었기에, 첫날 그들의 일기를 정독했다. 되는 데까지! 그러고 나서 마음에 남은 몇 글귀가 있다.
“고민에 대한 답을 찾으러 무작정 제주에 왔다. 어느덧 3일 차인 오늘, 답을 찾았냐 하면 사실 잘 모르겠다. 기대와는 달리 바다도, 하늘도, 석양도 내게 답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어쩌면 난 처음부터 답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겐 답이 아니라 그 답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2022년 10월 20일 목요일, 한 게스트의 일기
“무리 지어 있는 꽃보다 두셋이서 피어있는 꽃이 도란도란 더 외초로울 때 있다. 두셋이서 피어있는 꽃보다 우리 혼자서 피어있는 꽃이 더 당당하고 아름다울 때 있다. 너 오늘 혼자 외롭게 꽃으로 서 있음을 너무 힘들어하지 말아라.”
나태주, ‘혼자서’
“이번 제주 여행은 나의 첫 독립 여행이다. 처음에는 잘할 수 있을까? 두려움이 있었는데 다행히도 그 두려움을 즐기고 있는 거 같다. 오소소에서 다양하고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서 값진 경험을 남기고 간다. 여행이란 이런 것이지 참맛을 알게 해준 오소소, 식구들, 그리고 고산. 나는 이제 동쪽으로 간다. 도망치듯 온 제주가 나에게 위로와 안부를 건네주었다.”
2023년 6월 26일 월요일, 오OO 게스트의 일기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 그들에게 묘한 정과 동질감을 느꼈다. 어쩌면 홀로 이곳을 찾는 이들은 모두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는 걸까. 비슷한 마음인 걸까.
그렇게 2023년 여름, 나처럼 홀로 제주를 찾은 한 사람. 제주에서의 날마다 함께한 사람. 그 사람 덕에 내 제주는 잊지 못할 기억과 감정으로 가득 찼다. 행복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그 사람과 함께 좋은 곳도 가고, 좋은 풍경도 보고,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었지만. 내게 가장 크게 남은 건 대화였다. 함께 나눈 대화. 서로가 좋아하는 것, 관심 있는 것, 요즘 하던 것, 예전에 하던 것, 앞으로 하고 싶은 것, 중요했던 고민, 계속 지녀 온 고민, 결정들, 변화들, 감정들. 정말 사소한 얘기까지 마음 편히 꺼냈다. 제주가 좋아서 그랬던 걸까, 어째서 이렇게 좋은 사람과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걸까, 생각했다. 그중에서도 여행의 매력에 푹 빠져버린 대화는 이것이었다.
아침이 어제 같다는 얘기, 기억할 장면이 많아 하루가 길다는 얘기, 같이 먹고 있는 음식, 그때의 날씨, 그때 듣던 노래, 들리던 노래에 대한 얘기, 여행지에서 듣던 노래로 그 장소의 인상이 남는다는 얘기, 어제의 선셋에 대한 이야기, 내일 날씨가 좋길 바라는 마음과, 그때 했던 고민이 오직 그거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챘을 때.
생각했다. 제주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나누는 다정함이 참 좋았다. 여유를 갖고 온전히 여행을 즐기니, 그 여행지를 알게 되는 것만이 아니라 ‘나’를 알게 된다는 사실이 좋았다. 내게 집중할 수 있어 좋았고, 나도 몰랐던 나의 내면을 발견하여 좋았다.
울고 말았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혼여행이 끝난 거다. 이 여행, 특히 제주에서의 여행 동안 느낀 것들은 현실과 너무 멀어서. 결국 나를 울렸다. 정확히 이 대목을 보고 울었다. 지금 읽을 땐 울지 않는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살아가는 일들. 살아가는 사람이 겪는 일들. 사람으로 태어나 겪어야 하는 일들이 어렵다. 왜일까. 이런 질문은 이제 하지 않기로 했지만, 이유가 없을 것이다. 찾지 못한 것들은 없다고도 한다는데. 찾지 못한 모든 것은 없는 것과도 같다고. 없는 사람과 없는 사랑과 없는 이유를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겠지.”
황수영, 『여름 빛 아래』, 별빛들(2022), p63
한 달간의 혼여행은 이렇게 막을 내린다. 구실이 필요했던 거였다. 퍽퍽한 일상에서 굳이 낭만을 좇을 구실 말이다. 낭만을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세상은 참 좁았다. 시야가 한정적이었다. 견문을 넓혀야 함을 고등학생 때 잠시 깨달았던 것 같은데, 그 깨달음조차 시간과 상황을 탓하며 잊어버렸다. 무엇을 기억하고 새겨야 할지 이젠 알겠다.
서울부터 제주도까지, 영역의 한계는 물리적 거리에 있지 않다. 모든 게 의지에 달려 있다. 매번 가던 곳, 가봤던 곳이라도 ‘여행한다’는 느낌으로 거닐면 새로운 장소처럼 보인다. 만약 이 혼여행을 하필 올해 여름에 하지 않았다면, 이 느낌과 감정과 배움과 성장은 대체 언제 어디서 어느 순간에 얻을 수 있었을까. 끔찍한 상상이다. 그렇게 나는
새로운 세상을 살게 됐다. 나의 세상, 나의 영역은 더 넓어졌고, 하루는 더 선명해졌다. 이 혼여행. ‘남들이 가는’ 트렌드라서 다녀온 게 아닌, 오래도록 염원해 온 것을 이뤄낸 것이었다. 그렇기에 혼여행을 단순히 ‘혼자 하는 여행’이라 여기고 싶지 않다. 이건 혼자, 여기저기에서, 행복을 찾는 일. ‘혼여행’은 그런 의미이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여행하고, 하루를 살며, 행복을 찾을 것이다.
당신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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