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너무 좋아 나는내가 너무좋아 나는내가너무좋아 너는?
바디 포지티브(Body Positive)
: 자기 몸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의미로, 사회와 미디어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몸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몸을 사랑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것.
미디어가 지속해서 발달하고, 사회적인 미(美)의 기준이 엄격해짐에 따라 등장한 개념. 이는 내 모습이 미디어의 이상적인 몸과 같지 않을지라도 인정하고 사랑할 줄 아는 자아 존중을 핵심으로 삼는다. 사회나 타인이 아닌, 나에게 기준을 두는 ‘가장 1차원적이면서도 어려운’ 나를 사랑하는 방법.
본래 ‘이상적’이라는 것은 얼핏 보아야 가장 아름답다. 올더스 헉슬리가 만든 유토피아 <멋진 신세계>도 스치듯 보면 매우 완벽하고 이상적인 세상이지 않은가! 모두가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며, 부정적인 감정 하나 없이 살아가니 말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철저한 계급과 일종의 마약과도 같은 소마가 있지만,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바디 포지티브도 나에겐 멋진 신세계와 다를 바 없이 느껴진다. 사회가 만들어 낸 또 다른 ‘이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처음 이 개념이 등장한 배경 자체는 좋았지만 또다시 그 의도를 잃어버리고 헤매고 있는 듯하다.
자신의 흉터를 가감 없이 드러냄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아이돌처럼 마른 몸이 아니더라도 자신을 사랑하는 것. 바디 포지티브가 맞다.
그렇다면 아래의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보자.
그동안 빅 사이즈 여성으로 살아왔기에 섹시한 복장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베이식한 섹시한 복장을 입을 수 있다… 바디 포지티브인가?
바디 포지티브의 선구자 중 한 명인 가수 리조(Lizzo)는 최근 ‘바디 뉴트럴리티(Body Neutrality); 자기 몸 중립주의’를 선언했다. 그 이유는 바디 포지티브가 ‘모든 여자의 몸은 아름답고 섹시하다’는 식의 또 다른 여성 대상화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도 인스타그램에 ‘#bodypositive’를 검색하니,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게시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사회적으로 학습된 미(美)에 부합하든 안 하든 섹시한 옷을 입은 사진, 어떤 사이즈의 여성이든 섹시해질 수 있다는 선정적인 브랜드 광고 이미지가 정말 많았다. 2천만 개에 달하는 바디 포지티브 게시물이 과연 그 자체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고 있을까?
이에 대해 계속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졌다. 바디 포지티브가 대체 뭔데?
“바디 포지티브가 대체 뭔데?”
사실 이 질문이 떠오른 순간, 이 개념은 죽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실제로 저 질문을 머릿속에 띄우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바디 포지티브는 또 뭐야. 아, 내 몸을 사랑하자? 나도 바디 포지티브에 맞춰 나를 사랑해야지.’ 내가 내 몸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히 이뤄져야 하는 일이다. 어떠한 사회적 바람 때문에 따라가야 하는 유행이 아니다.
난 이미 바디 포지티브를 실천하고 있었는데,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잘못되지 않았는가?
실제로 내가 애용하는 닉네임(애카이브의 에디터 명으로 활용 중이기도 하다.) ‘덧니’도 결국 바디 포지티브에서 탄생한 이름이다. 나에겐 덧니 2개가 있다. 위 송곳니 두 개가 모두 덧니인데, 어릴 땐 이 덧니가 나의 가장 큰 콤플렉스였다. 난 <무한도전>의 열렬한 팬이었고 지금도 밥 먹을 땐 습관처럼 무도 정주행 클립을 보곤 하는데, 의식적으로 다시 보면 매우 자주 ‘치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정준하와 유재석의 고르지 못한 치열은 재미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 나는 꽤 상처받았다. ‘나에게도 버젓이 덧니 두 개가 있는데(심지어 치열도 고른 편은 아니다.), 왜 덧니를 가졌다고 놀리는 거야?!’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이런저런 영향으로 난 내 덧니를 정말 많이 싫어하게 됐다. 그래서인지 어릴 적 사진을 보면 이상하리만치 아랫니만 보이게 잘도 웃고 있다.
그러던 내가 덧니는 나만의 매력이라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사실 없다. 엄마, 아빠가 아무리 “네가 가진 덧니는 예쁘고 귀여운 매력을 가졌다”라고 말해줘도 잘 듣지 않았던 나였는데, 올해 난 내 덧니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었었다. 그냥 나를 사랑할 용기를 냈던 것 같다. 애카이브에 처음 들어와 에디터 명을 정해야 하는데, 원래의 내 별명들은 에디터 명으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또미, 토토, 빵울이 등등… 멋진 에디터치곤 너무 귀여운 이름이지 않은가? 그 순간 아무 이유 없이 내 덧니가 생각이 났다. 21살까지도 친구들과 네 컷 사진을 찍을 때, 할 포즈가 없어 “그냥 웃자”라고 말하면 당연히 입을 가리고 웃었는데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참 신기하다. 아마 아주 어릴 때부터 난 내 덧니를 사랑하고 싶었나 보다. 올해는 내가 날 가득 사랑할 용기를 갖춘 때였을 뿐.
우리는 대(大) 미디어 시대에 살며 하루에도 수백 개의 미디어를 접한다. 영상, 사진, 그림, 글, 음악까지. 최근 나온 음악 중에는 화사의 ‘I love my body’라는 음악이 내 플레이리스트에서 반복 재생되고 있는데, 이 또한 바디 포지티브 열풍의 일종이라 볼 수 있다.
I love my body 윤기나는 내 머리
발끝까지 My body (Yeah that's my body)
Yeah that's my body 사랑스런 내 Tummy
Unique한 팔과 다리 (Yeah that's my body)
완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 이 노래를 듣다 보면 왠지 부스스한 내 머릿결이 찰랑거리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자존감이 올라간다. 그러나 이 노래를 화사가 아닌 다른 사람이 불렀다면 어떨까? 화사처럼 예쁜 사람이 불러서 긍정적인 감정이 든 건 아닐까? 신동엽이 불렀다면? 이국주가 불렀다면? 가비가 불렀다면? 예시로 든 사람은 그냥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올라서 상상해 봤을 뿐 아무 의도가 없다. 하지만 상상해 보면 제각각 느낌이 다 다르다.
그렇다! 같은 메시지라도 화자가 누구냐에 따라 그 의미는 달리 받아들여진다. 이것이 내가 바디 포지티브 개념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의 핵심이다. 아직 내 머릿속에는 사회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이 너무나 명확히 그려져 있어, 이 편견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아마 다수의 사람도 나와 같을 것으로 생각한다.
때문에 바디 포지티브의 일환으로 빅 사이즈 속옷 모델이 상당수 등장하고, 미디어에서도 의식적으로 그들을 더 조명한다. 의도는 좋지만, 결과는 어떠한가? 결국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사회적인 미(美)의 기준만 부각되고 있지 않은가! “이들은 우리가 그동안 규정한 아름다움과 다르지만, 그래도 아름다워요~”라는 선의의 거짓말이 팽배해 있다고 느껴진다. 즉, 기준에서 벗어났다고 이미 정의한 뒤에 뒤늦게 “그렇지만 너희도 아름다워~”라고 말함으로써 더욱 강력한 잣대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
진정한 바지 포지티브를 위해서는 현재의 방향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선명한 기준을 더 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선을 함께 지워 나갈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그 방법은 생각나지 않는다. 아직 나 자신도 기준을 지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이들도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을 솔직히 마주해 보길 바란다. 내재한 기준을 지운 이들이 많아진다면, 분명 해답이 보일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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