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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카이브 Oct 23. 2023

가득 사랑할 용기

나는 내가 너무 좋아 나는내가 너무좋아 나는내가너무좋아 너는?

해시태그 아이러브마이바디!


바디 포지티브(Body Positive)

: 자기 몸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의미로, 사회와 미디어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몸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몸을 사랑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것.


미디어가 지속해서 발달하고, 사회적인 미(美)의 기준이 엄격해짐에 따라 등장한 개념. 이는 내 모습이 미디어의 이상적인 몸과 같지 않을지라도 인정하고 사랑할 줄 아는 자아 존중을 핵심으로 삼는다. 사회나 타인이 아닌, 나에게 기준을 두는 ‘가장 1차원적이면서도 어려운’ 나를 사랑하는 방법.



해시태그 멋진 신세계


본래 ‘이상적’이라는 것은 얼핏 보아야 가장 아름답다. 올더스 헉슬리가 만든 유토피아 <멋진 신세계>도 스치듯 보면 매우 완벽하고 이상적인 세상이지 않은가! 모두가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며, 부정적인 감정 하나 없이 살아가니 말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철저한 계급과 일종의 마약과도 같은 소마가 있지만,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바디 포지티브도 나에겐 멋진 신세계와 다를 바 없이 느껴진다. 사회가 만들어 낸 또 다른 ‘이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처음 이 개념이 등장한 배경 자체는 좋았지만 또다시 그 의도를 잃어버리고 헤매고 있는 듯하다.

자신의 흉터를 가감 없이 드러냄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아이돌처럼 마른 몸이 아니더라도 자신을 사랑하는 것. 바디 포지티브가 맞다.

그렇다면 아래의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보자.

그동안 빅 사이즈 여성으로 살아왔기에 섹시한 복장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베이식한 섹시한 복장을 입을 수 있다… 바디 포지티브인가?

바디 포지티브의 선구자 중 한 명인 가수 리조(Lizzo)는 최근 ‘바디 뉴트럴리티(Body Neutrality); 자기 몸 중립주의’를 선언했다. 그 이유는 바디 포지티브가 ‘모든 여자의 몸은 아름답고 섹시하다’는 식의 또 다른 여성 대상화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도 인스타그램에 ‘#bodypositive’를 검색하니,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게시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사회적으로 학습된 미(美)에 부합하든 안 하든 섹시한 옷을 입은 사진, 어떤 사이즈의 여성이든 섹시해질 수 있다는 선정적인 브랜드 광고 이미지가 정말 많았다. 2천만 개에 달하는 바디 포지티브 게시물이 과연 그 자체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고 있을까?


이에 대해 계속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졌다. 바디 포지티브가 대체 뭔데?


“바디 포지티브가 대체 뭔데?”


사실 이 질문이 떠오른 순간, 이 개념은 죽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실제로 저 질문을 머릿속에 띄우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바디 포지티브는 또 뭐야. 아, 내 몸을 사랑하자? 나도 바디 포지티브에 맞춰 나를 사랑해야지.’ 내가 내 몸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히 이뤄져야 하는 일이다. 어떠한 사회적 바람 때문에 따라가야 하는 유행이 아니다.

난 이미 바디 포지티브를 실천하고 있었는데,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잘못되지 않았는가?



덧니 2개가 있는 덧니


실제로 내가 애용하는 닉네임(애카이브의 에디터 명으로 활용 중이기도 하다.) ‘덧니’도 결국 바디 포지티브에서 탄생한 이름이다. 나에겐 덧니 2개가 있다. 위 송곳니 두 개가 모두 덧니인데, 어릴 땐 이 덧니가 나의 가장 큰 콤플렉스였다. 난 <무한도전>의 열렬한 팬이었고 지금도 밥 먹을 땐 습관처럼 무도 정주행 클립을 보곤 하는데, 의식적으로 다시 보면 매우 자주 ‘치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정준하와 유재석의 고르지 못한 치열은 재미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 나는 꽤 상처받았다. ‘나에게도 버젓이 덧니 두 개가 있는데(심지어 치열도 고른 편은 아니다.), 왜 덧니를 가졌다고 놀리는 거야?!’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이런저런 영향으로 난 내 덧니를 정말 많이 싫어하게 됐다. 그래서인지 어릴 적 사진을 보면 이상하리만치 아랫니만 보이게 잘도 웃고 있다.

그러던 내가 덧니는 나만의 매력이라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사실 없다. 엄마, 아빠가 아무리 “네가 가진 덧니는 예쁘고 귀여운 매력을 가졌다”라고 말해줘도 잘 듣지 않았던 나였는데, 올해 난 내 덧니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었었다. 그냥 나를 사랑할 용기를 냈던 것 같다. 애카이브에 처음 들어와 에디터 명을 정해야 하는데, 원래의 내 별명들은 에디터 명으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또미, 토토, 빵울이 등등… 멋진 에디터치곤 너무 귀여운 이름이지 않은가? 그 순간 아무 이유 없이 내 덧니가 생각이 났다. 21살까지도 친구들과 네 컷 사진을 찍을 때, 할 포즈가 없어 “그냥 웃자”라고 말하면 당연히 입을 가리고 웃었는데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참 신기하다. 아마 아주 어릴 때부터 난 내 덧니를 사랑하고 싶었나 보다. 올해는 내가 날 가득 사랑할 용기를 갖춘 때였을 뿐.



색안경을 벗을 수 없게 된 인간


우리는 대(大) 미디어 시대에 살며 하루에도 수백 개의 미디어를 접한다. 영상, 사진, 그림, 글, 음악까지. 최근 나온 음악 중에는 화사의 ‘I love my body’라는 음악이 내 플레이리스트에서 반복 재생되고 있는데, 이 또한 바디 포지티브 열풍의 일종이라 볼 수 있다.

I love my body 윤기나는 내 머리
발끝까지 My body (Yeah that's my body)
Yeah that's my body 사랑스런 내 Tummy
Unique한 팔과 다리 (Yeah that's my body)

완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 이 노래를 듣다 보면 왠지 부스스한 내 머릿결이 찰랑거리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자존감이 올라간다. 그러나 이 노래를 화사가 아닌 다른 사람이 불렀다면 어떨까? 화사처럼 예쁜 사람이 불러서 긍정적인 감정이 든 건 아닐까? 신동엽이 불렀다면? 이국주가 불렀다면? 가비가 불렀다면? 예시로 든 사람은 그냥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올라서 상상해 봤을 뿐 아무 의도가 없다. 하지만 상상해 보면 제각각 느낌이 다 다르다.

그렇다! 같은 메시지라도 화자가 누구냐에 따라 그 의미는 달리 받아들여진다. 이것이 내가 바디 포지티브 개념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의 핵심이다. 아직 내 머릿속에는 사회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이 너무나 명확히 그려져 있어, 이 편견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아마 다수의 사람도 나와 같을 것으로 생각한다.

때문에 바디 포지티브의 일환으로 빅 사이즈 속옷 모델이 상당수 등장하고, 미디어에서도 의식적으로 그들을 더 조명한다. 의도는 좋지만, 결과는 어떠한가? 결국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사회적인 미(美)의 기준만 부각되고 있지 않은가! “이들은 우리가 그동안 규정한 아름다움과 다르지만, 그래도 아름다워요~”라는 선의의 거짓말이 팽배해 있다고 느껴진다. 즉, 기준에서 벗어났다고 이미 정의한 뒤에 뒤늦게 “그렇지만 너희도 아름다워~”라고 말함으로써 더욱 강력한 잣대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

진정한 바지 포지티브를 위해서는 현재의 방향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선명한 기준을 더 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선을 함께 지워 나갈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그 방법은 생각나지 않는다. 아직 나 자신도 기준을 지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이들도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을 솔직히 마주해 보길 바란다. 내재한 기준을 지운 이들이 많아진다면, 분명 해답이 보일 것이라 믿는다.


세상을 편견 없이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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