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내고 있는 까만 별을 만난 토끼의 이야기
첫 번째 동화의 세 번째 이야기: 달콤한 달이 된 토끼
깜깜한 밤이 되자 토끼는 공들을 가지고 하늘로 올라갔어요.
“우와! 내가 진짜 빛나는 해님이 되었어!”
토끼의 말이 끝나자 누군가 말을 걸었어요.
“토끼야. 정말 해님처럼 크고 멋있게 빛을 내는구나”
“앗? 까만 별님! 까만 별님을 이렇게 만나다니! 정말 기뻐요”
“나는 어제 너의 소원을 들어주고 까만 별이 되었어”
“제 소원이요? 저는 어제 노란 별님에게 소원을 빌었는데......”
“응. 그 노란 별이 나였어. 노란 별은 간절히 바라는 소원 한 가지를 꼭 들어주거든. 그러고 나서 까만 별로 변하지”
“그럼 저 때문에 까맣게 변한 거예요? 미안해요 까만 별님. 이제 빛나지 못하게 되어서......”
토끼는 엉엉 울며 빨갛게 된 눈을 비비며 말했어요.
“아니야. 토끼야. 울지 마. 나는 여전히 빛나고 있어. 이제는 나 자신이 아니라 친구들을 위해 빛나고 있는 거지. 까맣게 빛나는 내 모습이 멋있지 않니?”
“하지만 까만 별은 노란 별처럼 잘 보이지 않아요.”
“까만 별이 보이지 않는다고? 지금처럼 밤이 까맣게 변하는 건 까만 별이 까만 별빛을 샤르륵 샤르륵 뿌리고 있기 때문이야”
“정말요? 아! 그래서 밤이 까만 거구나. 그러면 이 많은 소원을 다 들어주신 거예요?”
“응. 토끼처럼 용기 있고 착한 아이의 소원은 꼭 들어주거든”
까만 별이 까맣게 빛을 내며 말했어요.
“토끼야. 까만 별은 노란 별처럼 똑같이 빛나고 있어. 다만 그 모습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뿐이야.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하나 의미가 있고 소중해. 노란 별이 노랗게 보이는 건 우리 까만 별이 까맣게 빛을 내고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까맣게 빛나는 것도 노란 별이 노랗게 빛나고 있기 때문이지.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더 반짝반짝 빛날 수 있게 도와주는 좋은 친구란다”
까만 별님의 말을 듣고 토끼가 말했어요.
“까만 별님! 저도 까만 별님이 더 까맣게 빛날 수 있게, 노란 별님이 더 노랗게 빛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어요! 제가 해님처럼 반짝반짝 빛날 거예요!”
까만 별님이 빙그레 웃었어요.
세 번째 나의 이야기: 나의 배려가 당연한 것이 되었을 때
까맣게 된 것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그저 무엇이 타다 남은 흔적. 혹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 혹은 무엇이 많이 섞인 마지막이 돼버린 색상을 뜻할까?
까맣게 빛이 난다는 걸 모를 것이다.
그저 광택이라 생각할까? 까만 별처럼 더욱 까맣게 빛을 내는 검은색은 타인에 대한 우리의 배려 같다.
우리의 배려가 타인에게는 당연한 것이 되어서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어쩌면 우리가 배려를 하는 것을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나는 예전에 일을 할 때 남 눈치를 많이 본다는 소리를 들었다. 예전 회사에서 퇴사할 때 "넌 남 눈치를 많이 보는 것 같다" 그러면서 추천해주신 책이 남 눈치 보지 않는 방법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물론 아직도 잘 지내고 있는 나의 소중한 지인이시다. 내 걱정을 하시면서 좀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웠으면 하는 마음에 한 소리 해주신 거였다. 다른 의도가 있으셨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내가 모르는 부분이니 넘어갈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남 눈치를 본다는 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였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잘하지 않는다. 물론 해야 할 때는 해야겠지만. 그런데 우리가 행동하는 일에는 정답이 없다. 수학처럼 답이 정확하면 좋겠지만 같은 의견이 모와지면 그것이 정답이 된다. 그냥 사람들이 하는 의견에 크게 다른 의도가 없으면 같이 하는 게 좋고, 어차피 같이 하는 일이라면 웃으면서 좋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함께 하는 일은 한 가지 목적이 있다.
회사의 경우 사업의 성과를 내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나가는 게 아니다. 업무에 연계된 사람들이 의견을 모와야 한다. 우리는 생김새가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무엇보다 생각이 다르다. 다른 것과 틀린 것은 다른 개념이다. 대부분 이런 문제는 틀린 것보다는 서로가 다름에서 오는 것인 게 90%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나도 다르고 당신도 달라서 맞는 게 하나도 없다. 그런데 다들 자기만이 유일하게 맞다고 한다. 그러니까 절대로 의견이 맞지 않는다. 나는 싸우는 것을 싫어한다. 나에게 피해가 조금 오더라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혹은 잠잘 때 생각이 나지 않도록 무난하게 넘어가게 만드는 결정이, 나의 선택의 결과라면 상대방의 말을 듣는다. 누구 하나는 "네 말이 맞다.", "네 뜻대로 하라."라고 해야 끝이 난다. 내 생각에는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 이건 배려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특히 상사의 경우에는 윗사람 말이니까 그 말이 맞겠거니 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절대 당신의 의견이 맞아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경험이 있고, 무슨 일이 생기면 네 말대로 했으니 조금은 책임을 같이 져 줄 수도 있겠다 싶은 마음일 뿐이다(추후에 이렇게 해도 도망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담아볼까 한다. 기대하시라! 나도 많은 사회 경험이 있는 건 아니지만 30대 후반을 바라보며 겪은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도 하나씩 풀어나갈 때가 오겠지).
내가 손해가 되는 게 아니라면 같은 길로 가는 거니까 한 발 물러나도 괜찮다 싶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윗사람에 대한 배려, 타인에 대한 배려는 보이지 않고 자신이 맞았으니 동조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다.
전시회를 갔을 때 도슨트의 설명을 듣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설명이 다 써져 있는데 시간을 기다려서 많은 사람들 틈에서 들어야 한다는 게 의아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도슨트의 설명을 듣게 된 후로 전시회를 가면 도슨트 설명 시간부터 확인한다. 설명만 보고 지나갔던 그 그림에 담긴 뒷 이야기와 설명에 담기지 못한 부분을 생생한 목소리로 듣고 나니 같은 그림도 다르게 보였다. 단순히 작가의 그림이 좋다에서 가정환경 혹은 이별을 겪었기에 색감이나 표현이 이렇게 되었다고 들었더니 가슴 아픈 마음이 담긴 그림으로 보였다.
우리의 배려도 도슨트의 설명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만큼 나의 배려가 보인다.
타인에 대한 나의 배려는 배려를 받는 그 타인이 알아줘야지만 배려로 느껴진다. 그래서 난 배려를 하지만 그걸 몰라주는 타인에게 “왜 몰라주느냐?”라고 묻는 게 어쩌면 의미가 없을 수 있다.
그 사람은 배려인지 몰랐으니까. 그래서 생기는 오해도 있다.
친구와 함께 놀러를 갔었을 때 함께하는 걸 좋아하는 나는, 천천히 보면서 같이 사진도 찍고 놀고 싶었다. 그런데 친구는 저 멀리 가서 나를 보고 있었고 '이럴 거면 그냥 오지 말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이 퉁퉁 부었었다. 그래도 나를 위해 와 줬으니까 넘어갔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얘가 나와 노는 걸 싫어하나?'라는 슬픈 생각까지 들어서 이걸 쌓아두면 안 되겠다 싶었다. 나중에 친구에게 물으니
"네가 천천히 보는데 내가 옆에 있으면 잘 보지 못할 것 같아서 먼저 갔었어. 그리고 앞에서 너 사진 찍어주려고 먼저 갔었지. 타이밍이 자꾸 안 맞아서 사진을 못 찍었네 ㅎㅎ 나도 그날 나도 정말 재미있었는데?"
이때 정말 쿵... 하고 머리가 띵했다.
그걸 나는 몰라서 별의별 생각을 다하고 서운해했었다. 그 이후로는 오해가 쌓일 것 같은 배려는 서로 말하기로 했다. 어떤 걸 맞춰주고 있는지.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를.
자칫 나의 배려로 인해 오해가 쌓일 수 있다는 걸 배우고 나서는 처음부터 그 사람이 알아주길 바란다면 , 말을 하고 시작하는 게 낫다는 걸 배웠다. 나처럼 배려하고 있는 걸 모르면 상대방은 당신의 행동에 대해 별의별 생각을 다 하고 있을 테니까.
나를 너를 배려하기에 이렇게 하고 있다고. 혹은 내가 너를 이렇게 배려하고 있지 않냐고 말을 해서 오해도 없게 하고 서로가 원하는 배려를 하는 게 참 좋은 것 같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배려가 통하는 사이에서의 문제이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나의 배려 따위에 관심 조차 없이 그냥 오로지 '당신이 다 맞습니다' 만을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당신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 타인을 배려해주고 알아주지 못함에 서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도 까만 별이 노란 별을 위해 까맣게 빛내고 있음을 알지 못했으니까.
언젠가 까만 별이 노란 별을 위해 까맣게 빛내고 있음을 알아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 당신에게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소중한 배려는 타인을 향하기도 하지만 나를 위해 빛내고 있는 것이니 그 어떠한 배려에 회신이 없더라도 슬퍼하지 말고, 다만 오해만 쌓이지 않도록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난 보통 나를 위해 타인에게 배려한다. 그리고 내가 정한 배려의 경계만 넘지 않는다면 맞춰주는 편이다. 이런 내가 누군가에게는 남 눈치를 많이 본다고 생각하겠지만, 나의 배려를 알아주면 고맙고 아니어도 잠잘 때 ‘내가 왜 그런 말, 그런 행동을 해서 이랬을까?’하고 잠을 뒤척이고 싶지 않아서다. 무엇보다 회사의 경우에는 그래야 의사결정 과정이 빠르고 신속하게 끝난다. 아.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지만 무조건 당신의 말이 맞아요. 이런 건 아니고 상대방의 말을 받아들이면서 나의 생각도 녹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나의 생각이 확실하지 않다면 불필요한 언쟁을 줄이도록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며 넘어간다는 것이다.
배려는 메아리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어쩌면 공기 중에 흩뿌리며 사라지는 잔상이 될 뿐이다. 그렇기에 무엇을 바라고 배려를 하면 안 된다. 상대방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진다면 상처 받는 일도 줄어든다.
나처럼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들 사이에 있는 걸 좋아하며 많이 소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상대방에 대한 나의 배려가 혹은 상대방이 나에게 하는 배려에 대한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음에 서운하지 않도록, 조금은 무심하게 조금은 세심하게 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상대방도 무심히 나를 배려하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나의 까만 빛을 타인이 봐주지 않는다고 서운해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나의 노란 빛을 빛내주기 위해 어디선가 나를 위해 까만 빛을 내주고 있는 사람이 있었을 수도 있다.
오늘은 누군가 나를 위해 작은 배려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걸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혹은 내가 타인을 위해 이렇게 배려하고 있는데!! 알아주지 않아서 서운 하지만, 내 마음 편하기 위해 하는 것이니 괜찮다고 말해보세요.
그러면 오늘이 조금은 편안한 하루가 되리라 생각해요.
타인을 위해 배려하고 있는 당신을
제가 알고 있어요. 당신이 참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