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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피스토 Aug 18. 2021

형식을 넘어선 예술가, 톰 웨이츠

1. 전방위예술가

  

톰 웨이츠의 음악이 궁금하다면 엘튼 존의 결정적 한 마디를 들어보자. 

“만약 잭슨 폴락이 노래를 불렀다면 톰 웨이츠와 같은 소리를 냈을 겁니다.” 

그의 음악이 얼마나 자유로운 ‘필치’로 뿜어져 나오는지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톰 웨이츠에게 ‘전방위예술가’라는 수식은 그리 낯설지 않다. 그는 1972년 <클로징 타임(Closing Time)>으로 데뷔했다. 이후 40여 년간 25장의 정규앨범을 내며 지금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영화에도 관심이 지대하여, 1978년 실버스타 스탤론 감독의 <파라다이스 앨리>를 시작으로 마틴 맥도나 감독의 <세븐 사이코패스>(2014)에 이르기까지 약 40여 편의 영화에 출현했고, 70여 편이 넘는 영화음악을 맡았다. 또한 전위적 극연출가 로버트 윌슨과 함께 뮤지컬 <블랙 라이더> <앨리스> <보이체크> 등에서 음악감독으로 참여하면서 그의 음악적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2005년에는 사진가로서의 면모도 유감없이 발휘하여, 주차장 바닥에 흘린 기름 자국 사진들을 찍어 발표했다. 또한 그는 ‘버림받은 자들의 시인’으로 불리며 ‘길 위의 사람들’에게 항상 귀 기울여왔다. 그런 의미에서 2011년 ‘노숙자들의 삶을 다룬 시집 《하드 그라운드(Hard Ground)》의 출간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로큰롤 명예의전당 헌정식 축하공연 중인 톰 웨이츠


그러나 그의 예술활동의 근간은 음악이다. 톰 웨이츠는 ‘싱어송라이터들의 히어로’로 불릴 만큼 세계 대중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아티스트다. 레이 찰스, 제임스 브라운, 비비킹, 비틀스, 롤링 스톤스, 밥 말리 등 대중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들만 헌정되는 ‘로큰롤 명예의전당’에 2011년 이름을 올리며 대중음악의 레전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그의 음악은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포크에 기반한 컨트리, 블루스, 재즈 등 지극히 미국적인 스타일로 일관해왔지만, 1983년 앨범 <스워드피시트럼본(Swordfishtrumbone)>부터 불협화음과 서정적 멜로디의 ‘조화’를 시도하거나, 다양한 악기를 통한 사운드의 극한을 실험하는 등 그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펼쳤다. 


로큰롤 명예의전당 헌정식 당일, 닐 영이 그를 다음과 같이 ‘옹립’한 것만 보더라도 그의 폭넓은 활동 영역을 가늠할 수 있다. 

“여러분, 가수이자 배우인 동시에 작곡자이자, 마술사이며, 위대한 영적안내자 톰 웨이츠를 이 자리에 모십니다!” 

무엇보다 톰 웨이츠는 가사에 있어서도 시의 영역으로 평가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많은 평론가들로부터 그의 가사는 언제나 비평의 대상이 되어왔고, 팬들 역시 역설과 반어, 해학으로 넘실대는 그의 가사 위에서 파도타기를 즐기며 추임새 넣기 바쁘다. 그의 대표곡 <피아노 해즈 빈 드링킹(Piano has been drinking)>은 술 취한 화자가 술집의 풍경을 묘사한 곡으로, 그의 위트 넘치는 가사미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카페트는 너무 자라 머리를 다듬어야 하고” “전화기는 담배가 다 떨어졌”으며, “피아노 조율하는 사람은 보청기를 끼고” 있다. “조명은 엉뚱한 데를 비추고 있더라니, 애꾸눈”이다. 하지만 이 모든 풍경은 “내가 술 취해서가 아니”라 “피아노가 술 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톰 웨이츠는 공연장에서 피아노를 치며 이 노래를 부를 때면 언제나 위스키를 들이켠다. 


그가 지금껏 쓴 300여 곡의 가사에 등장하는 인명만 600여 명, 지명만 400여 곳에 이를 만큼 다양한 캐릭터와 공간이 등장한다. 그가 쏟아내는 엄청난 양의 스토리는 대하소설 급이다. 그의 노래에는 민담과 설화에서 모티프를 얻어와 자신의 이야기로 만드는 경우도 많다. 그중 노래 <빅 조 앤 팬텀 309(Big Joe and Phantom 309)>는 스쿨버스 사고를 낸 빅 조의 귀신이 아이들을 태워 내려준다는 이야기를 가사로 재구성한 것이다. <톰 트라우버츠 블루스(Tom Traubert's Blues)>는 정처 없는 여행을 노래한 호주의 민요 <왈칭 마틸다(Walzting Matilda)>에서 아이디어와 후렴을 빌려와 노래를 지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코펜하겐의 어느 길거리에서 무일푼 여행자의 삶을 노래한 명곡이다. 

그는 노래에서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비범한 스토리텔러다. 그런 그이기에 2011년 첫 시집 《하드 그라운드》의 출간은 반색할 만한 일이었다. 


사진시집 <하드 그라운드>와 프로모션 시집 (c)신주현

2. 버림받은 자들의 시인


《하드 그라운드》는 사진가 마이클 오브라이언(Michael O'brien)과 공동 작업한 사진시집이다. 오브라이언은 5년간 미국의 노숙자들을 대형카메라에 담았다. 노숙자들이 대형카메라 앞에 모델로 선다는 것 자체가 작가와 깊은 소통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오브라이언의 사진들 사이사이에는 22편의 톰 웨이츠 시편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의 음악에는 일관된 맥이 있다. ‘길’이다. 길거리의 창녀, 타지를 떠도는 여행자,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연인 등 수많은 ‘길’이 노래 속에 은유로 존재한다. 그 역시 젊은 시절 길 위에서의 삶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고, 포크록의 대부 밥 딜런, 비트문학의 대표작가 윌리엄 버로스, 잭 케루악, 찰스 부코우스키 등이 그의 음악적 자양분이었기 때문이다. 그중 잭 케루악은 정신적 지주로 삼을 만큼 그의 음악세계의 한 축을 담당한다. 톰 웨이츠는 케루악이 물려준 ‘길’을 화두 삼아, 극한의 서정과 극한의 전위를 버무리며 독특한 음악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초창기 ‘길의 노래’는 개인사와 주변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 노래들은 사실상 톰 웨이츠 히트곡의 8할을 차지했고, 순도 높은 서정성과 블랙 유머를 선사했다. 하지만 2000년대부터 전쟁과 정치, 환경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해 거침없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 시집은 그의 40년 예술활동에서 ‘길’에 대한 천착이, 시라는 형식을 빌려 어떻게 형상화되는지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다. 톰 웨이츠는 《하드 그라운드》를 출간하기 몇 달 전, 《시드 온 더 하드 그라운드(Seed on the hard ground)》라는 이름의 프로모션 시집을 한정판으로 발행했다. 10쪽짜리 프로모션 시집에는 한 편의 장시가 실려 있다. 그러나 이후 출간된 《하드 그라운드》에서는 이 장시가 22편으로 쪼개져 각각의 제목을 달고 나왔다. 즉, 한 편의 긴 노래인 동시에 22편의 다른 노래인 셈이다. 


《하드 그라운드》는 2008년 미국 금융위기 이후 길거리로 내몰린 중산층 출신의 노숙자 이야기를 그들의 목소리를 빌려 1인칭 시점으로 노래한다. 권두시 <씨(Seeds)>에서 딱딱한 땅에 떨어져 싹을 띄울 수 없는 씨 한 톨의 이야기로 그들의 척박한 삶을 은유한다. 



나는 단단한 땅 위에 떨어진 씨야

단단한 땅

그래, 단단한 땅이지

(……)

그리고 거친 길바닥 위를 뒹구는 돌멩이일 뿐이야

거친 길바닥 위

그 거친 길바닥 위를

뒹구는 돌멩이일 뿐이야


-<씨> 중에서




 ‘나’는 “단단한 땅 위에 떨어진 씨”처럼 척박한 길바닥에 심기지 못한 채 굴러다니며 재기를 꿈꾼다. 그러나 쉬워 보이지 않는다. 


매트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맞고 또 얻어터진/레스링 선수처럼/나는 일어나서/뒤집을 수 있을까


-<이를 악물다(Grit)> 중에서


그러나 길바닥에 내몰린 시적화자는 삶을 저주하며 “공평한 게 없다”고 토로한다. 그들은 “태어났을 때/축복받은” 존재였고, “밝게 빛나는 매력적인”<공평한 게 없어(Nothing Fair)>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모두 교외 주택에 흔히 볼 수 있는 “마당/현관/지붕/처마/거실/조리대”가 있는 집에서 평범한 미국 중산층의 구성원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달콤한/꿈”<집(House)>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톰 웨이츠는 이러한 비극적 상황 앞에서 ‘신’이라는 존재를 지극히 ‘인간적인’ 존재로 끌어내린다. 인간의 무기력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목 말라 신께 기도했더니

비를 뿌려주셨네

길가에 열매도 나타나 따먹게 해주셨지

그렇다면 말이야, 

신은 대체

누구에게 기도하시는 걸까 

말해줄 수 있니?

정말 외로운 직업이구나

정말, 외로운 일이겠어


-<말해줘(Tell me)> 전문



 그는 노래 <로드 투 피스(Road to Peace)>에서도 이-팔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어가는 목숨들을 향해 “신도 길을 잃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지 모른다”며 신을 위해 싸우는 그들 역시 신이 돕지 못하는 현실을 장탄식한 바 있다. 

톰 웨이츠가 젊은 시절 노래한 ‘길’이, 스스로 길 밖으로 뛰쳐나온 이들의 사랑이자, 고독이자, 젊음이었다면, 2000년대 이후 ‘길’은, 어쩔 수 없이 길 밖으로 내몰린 이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 그리고 절망의 다른 말이다. 그는 이 과정에서 또 하나의 형식적 모험을 감행한다. 사진이다. 문자 그대로 길바닥만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은 것이다. 


톰 웨이츠의 길바닥 사진

  


3. 길바닥 사진


2005년, 톰 웨이츠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발행하는 문학 계간지 《조이트로프 올-스토리(Zoetrope All-story)》 겨울호에 50여 점의 사진 작품을 발표한다. 자신의 소형 카메라로 주차장 바닥에 흘린 기름 자국들만 찾아다니며 찍은 흑백 사진들이다. 그 사진들 속에는 어떠한 제목이나 정보도 없지만, 사진을 들여다보면 누구라도 하나의 형상쯤은 찾아낼 수 있다. 사랑하는 연인이 키스를 하고 있거나, 빗자루 탄 마녀가 활공을 하기도 하고, 오스트레일리안 크로버와 같은 하트 모양의 수초들이 무성하게 자라기도 한다. 그는 작가 노트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도 마음만 먹으면 이 기름 자국들 안에서 무엇이든 볼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놀라운 형태와 꾸미지 않은 세계를 발견하게 될 겁니다.”

그는 어느 날, 산타애니타 경마장에서 뜯겨 나간 마구간 문을 보게 된다. 그 형상은 마치 말이 하얀색 문을 박차고 울타리를 뛰어넘는 모습 같았다. 그 발견이 있은 후로, 그는 자동차 아래를 기웃거리며 또 다른 문양은 없는지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길바닥 사진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가 뷰파인더로 바라본 세상 역시 ‘밑바닥’이다. 아름다운 풍경 대신, 주차장 바닥에서 겨우 찾을 수 있는 기름 자국을 보며 무수히 깔린 ‘열린 텍스트’에 연방 셔터를 눌러대며 흥분했으리라.

톰 웨이츠는 사진을 찍으면서 “엄지를 치켜들고” 바닥에 엎드려 “행운이 오기를” “기다리는”<기다림(Wating)> 노숙자들의 인생을 본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밑바닥보다 더 아래에 붙어사는 자신들이 있다고 믿는 그들을 말이다. 


나는 모두에게 말하지

여기 아래가 바닥이라고

밑바닥,

나는 그들에게 말하지

바로 여기가 밑바닥이라고 

주여, 분명 여기가 밑바닥이에요

여기가,

바로 나와 같은, 밑바닥이에요


-<여기 아래(Down here)> 전문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자처하는 또 다른 전방위예술가 로리 앤더슨은 그의 예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가 정확하게 어떤 현실에 대해서 노래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노래에서 굉장한 폭풍이 몰아치다가도 한편으로 말장난이 되기도 하니까”. 그의 매력은 ‘진지함과 코믹함’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데 있다. 심각한 문제를 빗겨가지도 않고 정곡을 찌르지만 유머를 잃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는 이런 류의 화법을 즐긴다. “모기약은 모기를 쫓는 약이 아니고 우리를 숨겨주는 약이야. 모기의 감각을 마비시켜 우리가 어디 있는지 모르게 하는 거라고.”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은 역설과 유머다. 그가 포착한 주차장 바닥의 기름 자국 역시 있는 그대로의 형태들로 존재하지만, 묘하게도 유머러스한 역설로 읽힌다. 

그렇게 엮인 ‘날것’의 이미지들은 짐짓 그의 목소리를 닮았다. 음악에서 사진으로, 사진에서 시로 장르를 옮기는 동안에도 여전히 그의 거칠고 원초적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것이 바로 ‘마법사’로서 톰 웨이츠의 ‘매직’인지도 모른다.


-<세계의문학> 2015 여름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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