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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피스토 Dec 02. 2021

일본인이 쓴 한국어 시의 아름다움

-<신촌(新村) 부근>, 사이토우 마리코


Photo by Wilhelm Gunkel on Unsplash

신촌(新村) 부근

-사이토우 마리코


사람을 경멸하면

가슴에 금세 시큼한 꽃이 피고

하룻밤 자도 그것이 안 시들 때 

햇님이 녹색으로 보인다

저 산 가서 이 꽃을 도려내

매장하고 싶다

약수 받으러 가는 사람들 따라

아침의 통근시간 학교도 회사도 빠지고

저 산으로, 약수 받으러 가는 사람들 따라

하지만 이 좁은 길 하나를 건너갈 수 없다


-


1993년, 일본인 사이토우 마리코가 33세 때 한국에서 출간한 한국어 시집 《입국(入國)》에 수록된 <신촌 부근>이라는 시입니다. 그녀가 한국으로 유학 와 1년 3개월 동안 쓴 시들 중 하나입니다. 그녀는 이미 1990년 일본에서 시집을 출간한 적이 있는 시인이지만, 한국어로 쓴 그녀의 시편은 당시 많은 문인과 독자들을 충격에 빠트리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일본인이 쓴 한국어 시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화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집에 담긴 시편들의 섬세한 감수성과 아름다움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한국어를 쓸 수 있는 외국인은 많지만, 한국어로 시를 쓰는 외국인은 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라는 장르는 언어를 끊임없이 갈고 닦는 행위와 같습니다. 시인들은 시어를 다듬고 다듬어, 더 이상 다듬어지지 않을 때까지 창작합니다. 그래서 옥과 같은 보석을 다듬는다는 뜻에서 “언어를 조탁(彫琢)한다”고 표현합니다. 그만큼 시인의 창작은 시를 쓰는 순간부터 이미 퇴고를 시작한다고도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한 장르의 특징 때문에라도 일본인이 쓴 한국어 시는 더욱 특별합니다. 능숙한 한국어 구사력보다, 한국어로 쓴 시어들을 밤새 ‘조탁’했을 외국인의 한국어에 대한 열정이 눈에 선하기 때문입니다. 사이토우 마리코의 시 <신촌 부근>은 ‘미움’이라는 감정에 대한 불편함을 ‘시큼한 꽃’에 비유한 작품입니다. 떨쳐내고 싶어도 쉽게 떨쳐낼 수 없는 감정들을 우리는 항상 품고 살고 있지요. 불편한 감정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으면 햇빛이 “녹색”으로 보일 만큼 떨쳐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한편으로 그 감정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이중성을 가진 것 또한 사람이라고 노래하는 듯합니다. 길만 건너 “저 산으로, 약수 받으러 가는 사람들 따라”가면 감정들을 “도려내” 묻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이 좁은 길 하나를 건너갈 수 없다”고 말하며 주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시편들을 읽고 있으면, ‘원주민’이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아이러니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언어를 바른 어법으로 쓰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찾지 못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일본인이 쓴 한국어 시에서 느끼게 됩니다. 한국어로 빚어낸 시인의 시편들이 소중한 이유입니다. 사이토우 마리코는 현재 일본에서 한국 문학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번역가로 살고 있습니다. 모르긴 해도, 그녀는 번역 작품들에서 한국어의 감수성을 더욱 맛깔나게 잘 살려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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