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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법의 차이일까

40대 여자 팀장의 하루 ep33

by 이름없는선인장

한 동안 브런치에 글을 쓰지 못했다.

시즌이 사업계획 시즌이기도 하고, 여기저기 하반기 리뷰에 내년도 사업을 준비한다고 사내 워크숍 등도 많았다. 내년도 계획을 짜고, 준비하는 과정이 맘처럼 녹록지 않다. 올해 실적이 좋았더라면 좋았겠지만, 실적이 별로 좋지 않기 때문에, 마케터들의 예산은 제일 먼저 삭감될 수밖에 없으니, 팀장으로서, 내년도 방향성을 정확하게 또는 확고히 잡아주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고 생각하지만, 팀원들의 현재 역량이나 한정된 예산 등을 생각하면, 많은 것이 위축되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지금 시점에서 "예산 늘려주세요"가 답이 아닌 것을 알기에 오늘도 나는 머리가 아프다.



위로 1. 누군가가 나의 고충을 알아봐 준다는 것.


관리자급과 법인장들을 대상으로 하반기 회의를 진행했다. 거기엔 반가운 내 입사 동기도 있다. 4명의 입사 동기 중에 우리 둘만 남아 있는 현실이 씁쓸하기도 하지만, 다 각자 생존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동기가 지난번에 프로젝트를 같이 하면서 우리 팀의 대리와 힘들었던 이야기를 털어놓고, 나 또한 팀원과 팀장으로서 겪고 있는 힘든 시간들을 이야기했다. 주변의 한결같은 대답은 ‘강하게 나가라’이지만, 또 한 편으로는 ‘그 대리의 성격이나 행동을 누구도 예측하거나, 말릴 수 없기에 안타깝다’라는 것이 다였다. 난 후자가 더 현실 같아 더 슬프지만, 그냥 애써 혼자 화를 삼킨다. 거기다가 혼자 겪었던 같은 동기였으면서 팀원이었던 그 예전 사람과 지금의 대리 성향이 너무 비슷해서 트라우마가 생겨버려서 내가 더 위축되었다는 것도, 말하면서도 찹찹한 내 솔직한 심정이다.


위로 2. 지나가는 한 마디


생각지도 못했던 어느 날 아침, 탕비실에서 커피를 타고 있는데 옆 팀원이 ‘그 대리 때문에 힘들지 않냐’는 걱정을 한다. 그렇게 말을 걸어주니, 갑자기 나 혼자 안고 있던 고민과 힘든 시간을 알아봐 준 옆 팀원이 고마웠다. 그리고 외부(?)에서는 모를 것 같던 내가 겪은 경험담들을 그들도 충분히 이해하고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니, 동질감도 느꼈다. 그녀 또한 올해 그 대리와 같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너무 힘들었고, 다시는 그 대리와 일하고 싶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같은 팀이었던 그녀에게 왜 그 대리가 그런 행동이나 이상한 발언들을 하는지 물어봤고, (그 팀에서 팀장이 팀원에게 기대하거나, 대신해 주는 일의 범위가 어디까지 인지 알아야, 새로운 팀장인 나에게 왜 가끔씩 그런 돌발적인 행동과 언행을 하는지 이유나 알고 싶었다) 내가 조금이나마 그 대리와 "잘" 같이 일할 수 있는 환경과 방법을 제시해 주는 게 팀장의 역할 아닐까 싶어서.... 앞으로 일하면서 견뎌나갈 수 있는 돌파구를 모색하고 싶었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도 싶었지만, 짐은 내가 짊어지는 것이고, 이런 이야기가 자칫 위로가 아닌 험담이 될 것 같아 오래 이야기 하진 않았다. 그래도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같은 CF 카피처럼, 그래도 주변에 그 대리의 잘못된 태도와 위아래 없는 말투에 대한 문제를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 그래도 위로가 되던 날이다.



고군분투.

대기업이던, 중견기업이던, 소기업이던 사내에는 절차라는 것이 있다. 대행사를 쓰는 부분에 있어서 후보자로 당연히 추천도 받지만, 선택할 때는 공정한 프로세스와 증거를 남기는 부분이 필요하다.


4월에 팀에 들어온 대리는 처음엔 의욕적이었으나, 3개월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온 후로는 오히려 자세가 반대가 되었다. 업무적으로 조금만 push를 하면 ‘자기는 잘 모른다’ ‘아직 모른다’ ‘자신이 대행사를 판단할 수 있는 눈이 없다라는 식으로 답하면서도 업무를 대행사로 주고 있다. 사외 교육도 두 어번이나 보냈는데, 교육을 갔다 오면 갔다 올 수록 '자신은 아직 멀었다'라고만 하면서 전문성이 필요하다고 대행사를 쓴다. 소재도 우리가 만들고 운영하고 분석도 하는데, 인사이트 도출이 안된다고(업체도 못하는데) 그러면서도 배우겠다며 친구가 팀장으로 있는 작은 온라인 마케팅 대행사를 써보고 싶다고 했다. 다른 회사의 비교 견적이나 해외 경험/동종 업계 경험도 없음에도 ‘임시로’ 한 달 정도 잘 배워보라고 하고 허락을 했다. 친구한테 배워보겠다고 하니 동 업체랑 한 달 서비스가 끝나면 다른 업체도 미팅하고 이런 방식으로 비교도 해보고, 내년도 연간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미리 못을 박았다. 하지만 기간이 끝나고. 그녀는 '저는 이 업체랑 계속하고 싶어요' (친구라 편해서), '딱히 못 한 건 아니잖아요'만 반복하고 업체 알아보기를 꺼려했다.


나는 설명했다. 솔직히 지인 찬스 아니면 이 업체를 선택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우리가 예산이 작더라도, 업체를 여러 군데 찾다가 이 업체를 선택하게 된 것도 아니고, 동종 업계 경험도 없고, 매출도 작고, 인원 수도 많지 않은 업체에서, 어떻게 글로벌 대상 또는 지정된 전략적 국가에 대한 백그라운드도 없는데 내가 이 대행사를 선정해야 했을지, 내 기준에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서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서비스를 같이 묶어서 받을 수 있는 업체인지, 대행사의 전체적인 역량을 리뷰하고 결정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녀는 계속 뾰로통했다.


그리고는 나에게 업체를 아예 지정해 달라, 원하시는 업체 이름을 말해달라, 그 업체 컨텍하겠다, 아니면 나보고 어디서 찾으라는 거냐, 팀장님이 찾아서 주셔야 한다. 본인은 업체 보는 눈은 없고 (그러나 친구 업체는 잘하는데 왜 자르냐고 하고, 이 업체는 쓰고자 하고) 못 찾겠다고 해서 대행사 업체 리스트를 주었다.


그리고는 실장님과 함께 주간회의를 진행하는데, 막상 대행사 서칭 업무가 이번 주 금요일에 완료 예정이라고 쓰여 있어서 의아해서 내가 질문했다. 미팅 진행을 언제 하길래 이번 주 금요일에 끝내냐고 했더니, 미팅을 왜 해야 하냐며, 견적서만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냥 자기는 계속 여기랑 하고 싶고, 자기가 대행사 보는 눈이 없고, 배우면서 할 수 있는데, 왜 못하게 하냐고 계속 반문했다. 보다 못한 실장님께서 ‘비교 견적은 당연히 받고, OT도 받아보고, 특히 이렇게 연간 계약하는 것은 당연히 그냥 정할 수 없다. 임시로 하는 건은 그냥 해 볼 수 있지만, 회사에 절차도 있는 것이고, 객관적인 증거도 남겨야 하기 때문에, 그냥 할 수 없다”라고 하셨다. 그제야 그녀는 약간 주눅이 들긴 했지만, ‘비교 견적만 받으면 안 되는 것이냐, 그럼 옆 팀은 이렇게 다 비교 견적 받고 업체 미팅하고 OT 하고 그러냐’고 따졌다. 또, 대행사들은 다 그 출신이 그 출신이고, 다 알고 지내는 사람들인데, 다른 대행사 구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또 이상한 논리를 실장님 앞에서도 계속 펼쳤다. 나는 너무 답답해서 언성이 높아지려는 찰나 그래도 다른 팀원들(차장과 다른 대리가)이 차분하게 왜 해야 하는지, 대행사 미팅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뭘 물어야 하는지 다시 알려주기 시작했다. 난 내가 그렇게 설명하고 설득하고 하라고 했던 업무 지시를 수행 안 하는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수긍하는 걸 보면서, 아마 난 딱 그 정도의 인식으로 잡혀있는 존재구나 싶었다.


그리고 허탈했다.

내가 말하면 왜 듣지 않을까...


이렇게 쉽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수긍할 거면, 이렇게 실장님 이하 차장, 대리까지 달라붙어 설득해야 실행에 옮길까 말까 한 그녀... 그냥 본인의 역량이 안 되는 부분이 모두에게 노출되거나 (아예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몰라서 안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업무 상 내가 봐야 하는 기준도 이야기해줬고, 업체 선택하기 전에 어떤 걸 두고 검토하는지 말을 해 줬지만 내가 말했을 때에는 듣고 싶지 않아서 노트에 적지 않았고 흘려듣다가, 이제야 여러 사람이 한 목소리 내니까, 나한테는 눈 길 한 번 안 주고, 그 사람들 말만 듣다니... 허탈하고 씁쓸하고 화가 난다.


내가 회의실을 나가고 나니, 차장을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본 모양이다. 한 30분 넘게 둘이서 회의를 해서 진행 방법을 알고 나니 자리에 와서 업체 컨텍을 시작한다.


다들 차분한데, 내가 너무 따지듯이 이야기해서 그런 걸까.. 뭐 예산도 작아서, 이 업체 저 업체 찾다가 지금 업체랑 할 수도 있다고 난 분명히 대리한테 조언도 해 주었다. (너무 그 업체랑 하고 싶어 해서)

단지, 타 업체 조차 찾지 않으려 해서, 형식은, 절차는 갖춰야 하고, 최대한 업체는 만나보고 결정하라고 한 건데 뭐가 이렇게 어려울까.



오늘,

내가 말한 것과 그들이 오늘 말한 것의 차이는 뭐였을까....

화법의 차이일까?

그 후에도 불편한 공기가 사무실 가득.

그녀는 오후 내내 얼굴에 인상 쓰고 껌 짝짝 씹으며 온갖 티를 낸다.

다른 팀원은 제대로 놀았던 것 같다며 농담으로 넘긴다.

내가 업무 관련 피드백을 줘도 반영하지 않는다. 중요하지 않단다.


아무도 대리가 팀장님/윗선에게 하는 부적절하고 튀는 행동이나 언행을 주의 주지 않고 있고, 오늘 같은 경우도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나만 불편한 걸까? 이 모든 게?


그냥, 그런 거겠지...

내가 다 할 필요 없는 거겠지...

다른 팀원을 잘 구슬려서 팀장 대신 지시를 대신해 줄 수 있다면... 이것도 방법이려니

어느 정도 내가 내려놓아야 함을...

화는 풀리지 않지만

자존심은 상했지만,

오늘도 그렇게 결론짓고,

괜찮은 척 퇴근한다.


금요일이었으면 좋겠다.



[진행 중...]

어제 저녁 대리 지인 찬스의 대행사는 내년도에 못하겠다는 연락을 해 왔다고 한다. (그것도 차장을 통해서 듣고 대리는 아직 보고도 안 했지만.) 원래는 계속 년간 계약까지 염두해 두고 당연히 할 의사가 있었던 걸로 아는데, 안 하겠다고 하니 의외이기도 하고, 단가가 안 맞아서 일 수도 있고..이번 건이 어떻게 정리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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