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많이 놀랐재”
“친정어머님인가 봐요. 어떻게 어머님께 그렇게 잘하세요.”
“정말 효녀예요. 어머님은 좋으시겠어요...”
친정엄마가 우리 집 가까운 곳으로 이사 온 이후부터 엄마와 나는 우리 동네 사우나를 함께 다닌다. 격주로 다니는 엄마와의 사우나 나들이는 근 10년이 되어 간다. 주말 비슷한 시간대에 가니, 그 시간대 사우나를 오는 사람들에게는 우리 모녀의 모습은 익숙할 거다. 더욱이 근 170 센티미터의 딸과 150센티미터 남짓의 엄마의 모습은 눈에 띄어도 너무 잘 띌 것이다.
다들 본인들의 ‘친정엄마’ 혹은 ‘딸’을 떠올리며 한 마디씩 덕담 아닌 덕담을 하곤 한다. 그냥 미소로 인사를 대신할 수도 있지만, 상대에 따라 미소로만은 대답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우리 엄마가 자식들에게 무척 헌신적이셨어요. 그래서 우리 다섯 형제 모두 엄마에 대한 마음이 그래요.”
반복되는 덕담에, 나에게 진지하게 자문해 본 적이 있다.
‘왜 나는 엄마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은가? 왜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가?’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질문해보았다. 그 대답은 엄마의 정성스러운 헌신에 대한 보은(報恩)의 마음이었다.
나는 모든 부모가 ‘헌신적’인 줄 알았다. 성인이 되어서야 ‘부모 모두가 자식에게 헌신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부모가 되어 정확히 알았다. 자식의 행복과 성공을 위해 잘 키우려는 마음은 동일하지만, 자식에게 쏟는 시간과 정성의 양은 부모마다 다르다. 물론 자식의 행복과 성공이 부모가 쏟은 시간과 정성의 양에 비례하지 않는다. 부모의 무조건적인 헌신이 자식을 망가뜨린다는 소리도 한다. 하지만 나는 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해서 우리 형제를 키워준 엄마의 헌신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친정엄마는 2남 3녀의 자식들에게 참으로 헌신적이었다. 두 명의 아들에게는 세 딸에게 하지 않는 ‘특급 정성’을 쏟은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386세대였던 우리 세 자매에게도 엄마는 대단히 헌신적이었다. 그 헌신에는 엄마만의 ‘신념’이 있었다.
‘결혼 전에 집안일을 많이 한 딸들은 일이 많은 시집살이를 하게 된다’는 옛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엄마는 '팔자는 타고난다지만, 스스로 만들 수도 있다'라고 말하곤 했다. 엄마는 딸들의 팔자를 만드는데 본인이 역할을 해야 한다는 투철한 신념을 가지신 거다. 그래서 나는 결혼 전까지는 소위 말하는 ‘손 끝에 물 한 방울 묻힌 적이 없이’ 자랐다. 아래 여동생은 본인은 청소도 하고 설거지도 하면서 엄마를 도왔다고 말하지만, 적어도 세 살 터울의 세 자매 모두 대학과 대학원을 다닐 때도 겉옷은 물론이고 속옷도 엄마가 빨아 주었다.
외동딸이었던 엄마에게는 사촌 여형제들이 있었다. 우리 집에 가끔 놀러 올 때마다, '딸들을 이렇게 키우면 안 된다'라고 핀잔 아닌 핀잔을 주곤 했다. 권위적인 아버지의 매 끼니 더운밥에 7첩 반상을 준비하면서 다 큰 딸들이 도와주지도, 도움을 청하지도 않는 언니의 고생이 답답했던 게다. 하지만 엄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사촌 이모들뿐 아니라 우리 집 사정을 좀 아는 친척들도 하나같이 뒤에서 혹은 앞에서 수군거리는 눈치였다. 엄마는 이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은 날이면 ‘결혼 전에 집안일을 많이 하면 결혼해서도 일을 많이 하게 돼’라고 말하곤 했다. 이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으면 ‘시집가면 하기 싫어도 실컷 해야 할 일을 왜 시켜’라며 말끝을 흐리곤 했다.
'옛말'에 있는 말이라면 어디서든 한 번은 들어봄직한데, 성인이 된 후로도 나는 그런 비슷한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나는 엄마가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친정엄마는 어려서 친엄마가 돌아가시고, 계모 밑에서 자랐다. 동화 속에서 나오는 '계모 스토리'처럼, 부유한 집 외동딸이었던 엄마는 졸지에 어린 나이부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성격이 강한 막내 외삼촌이 가출을 할정도로 계모 밑에서 엄마의 삶은 고단했다고 한다. 결혼해서는 ‘별난’ 홀시어머니 밑에서 센 시집살이를 하게 되었다. 할머니 제삿날, 제사상 위에 놓인 할머니의 사진을 보며, ‘너희 할머니 대단했어’라고 엄마가 할머니에 대한 짧은 코멘트를 툭 던진 날이 있었다. '어떻게' 하고 묻는 내 질문에 답 없이 제사 준비를 서둘렀다.
그즈음 나는 엄마의 '옛말'이 엄마가 만들어낸 이야기임을 확신했다. 엄마의 센 시집살이를 본인의 결혼 전 굴곡 탓으로, 팔자소관으로 생각하며 견뎠고, 본인의 사례를 토대로 여자의 결혼 전의 생활이 결혼 후의 팔자에 영향을 미친다는 신념을 갖게 된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결혼 후 나의 ‘확신’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나와 동갑인 시누이는 대학생 시절, '수돗가에서 빨래하는 친정엄마한테 인사하고 학교에 가는 것이 너무 미안했다'라고 말했다. ‘같은 여자로서 본인은 예쁘게 차려입고 핸드백 메고 공부하러 가고, 엄마는 구정물에 손을 담그고 일하는, 다른 처지에 있는 것이 그러했다’는 거다. 그 말은 나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친정엄마를 한 번도 같은 여자로 생각하지 못했던 나의 무관심과 무지함 때문이었다. 외동딸인 시누이는 결혼 전에 시어머니를 도와 집안 살림살이를 꽤 했던 것 같고, 시어머니도 결혼 전 여자가 익혀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계셨던 거 같다. 그런 시누이는 차남에게 시집을 갔지만 어찌하여 맏며느리 노릇을 하는 센 시집살이를 하는 눈치였다.
반면 우리 자매들은 맏며느리 노릇을 해야 하지만 엄마의 염원대로 ‘센 시집살이’를 하지 않고 있다. 언니와 동생은 장남과 결혼해서 명실상부한 맏며느리다. 나는 시아주버님이 결혼을 하지 않은 차남과 결혼했다. 말하자면 우리 셋은 다 맏며느리 노릇을 해야 하는 처지이다. 그런데 세 명 모두 ‘편한’ 맏며느리 노릇을 하는 편이다. 엄마의 신념과 그에 따른 실천이 우리 자매 셋의 결혼 후 팔자를 편하게 해 준 거다.
며칠 전 사우나를 마치고 간단한 장을 보기 위해 가게 앞에 차를 세웠다.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엄마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엄마의 손을 양 손으로 잡아끌었다. 지팡이에 힘을 실어 밖으로 몸을 이동하는 순간, 어떻게 손 볼 방법도 없이 엄마는 슬로 모션으로 땅바닥에 완전히 엎어져 버렸다. 내가 너무 무성의하게 엄마를 잡아당긴 탓이다. 한참을 허둥대다가 엄마를 일으켜 세우니, 엄마의 일성은 “니 많이 놀랐재~”이다. 딸의 부주의한 탓에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던 아흔 노인네가 육십 먹은 딸이 놀랐을까 봐 걱정하는 것이 우리 엄마다. 그런 엄마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해 주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2021.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