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지하철과 V&A에서 찾은 에드워드 존스턴의 디자인 유산들.
런던에 도착해서 가장 하고 싶었던 건, '런던 언더그라운드' 지하철을 타보는 것이었습니다.
서울의 9호선엔 서울남산체가 있듯 런던 지하철에는 존스턴 산스가 있기 때문이죠. 스크린에서 보는 것 말고 실물을 어서 영접하고 싶었달까요.
다른 유럽 지역에서는 버스를 주로 탔는데, 런던에 머무는 동안에는 대부분 지하철만 탔습니다.
런던을 돌아다니며 지하세계를 편리하고 공고하게 구축해놓았다고 느꼈습니다. 미디어에서 봐온 클래식하고 익숙한 느낌과 현대적인 사인물이 조화를 이룬 런던 언더그라운드.
무려 백 년 전에 지하철 전용서체를 만들었으니 꽤 신경써서 관리했다고 말 할 수 있죠.
소문자 i의 다이아몬드가 유난히 반짝여 보이는 건 디자이너 존스턴에 대한 존경심 때문일까요. 경쾌한 파란색을 배경으로 위아래 좌우에 하나씩 꼭짓점을 가지고 있는 i꼴. 아름다웠습니다.
숙소가 있던 세인트 판크라스 역은 매우 교통의 요지여서 지하철로 다양한 지역에 갈 수 있었어요. 때문에 여러 라인을 타고 영국의 곳곳을 방문했습니다. 실제 영접한 존스턴 산스는 정말 지하철 온갖 곳에 쓰여 있었습니다. 역시 전용서체의 교과서라고 할 만합니다. 작은 표시 하나도 모두 존스턴 산스예요.
현재 운영하고 있는 지하철과 기차역에서는 존스턴 산스의 세 가지 버전이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다고 하는데, 운이 좋으면 100년 전 오리지널 존스턴 산스, 혹은 서체를 만들기 전에 쓰던 빈티지 사인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못 본 것 같지만요.
17.5 파운드를 내면 런던 교통박물관에 입장할 수 있습니다. 오래된 표지판이라던지 초기 지하철의 모습들과 존스턴 산스에 관한 자료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런던의 악명높은 물가에서 살아남은 뒤 다음여행지로 향해야 했기에, 무료로 존스턴 산스의 유산에 다가갈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수집의 나라 영국. 전 세계의 보물이 모여있는 데다가 대부분의 뮤지엄은 무료입장입니다. 반나절 이상을 보내도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대규모에 식당과 카페는 기본, 굿즈샵도 또 다른 전시실이라고 할 만큼 예술입니다.
그중 패션과 장식, 공예 작품으로 유명한 V&A 뮤지엄에는 존스턴 산스의 유산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에드워드 존스턴이 만든 다이아몬드. 그 원석을 캐낸 광산에, 다이아 세공사에게 가보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원석을 다듬어 런던 곳곳에 박아놓았을까. 알고싶었고, 궁굼했습니다.
건물 3층에 있는 Painting&Drawings Study Room에 올라갔습니다.
예약유무를 묻는 가드의 질문에 못했다고 대답했지만 간단한 개인정보를 기재하고 입장할 수 있었어요. 가방과 겉옷은 모두 스터디룸 외부에 보관해야 하며, 간단한 필기구와 노트북, 핸드폰 정도는 들고 갈 수 있습니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몸이 더워지는 걸 느끼며, 긴장한 채 엄격한 입장 절차를 마쳤습니다. 가드의 말투나 표정 모두 엄숙 근엄 진지했기 때문에, 앞선 절차들을 성스러운 의식을 행하듯 진지하게 임했습니다.
사실 스터디룸 입장 이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교대한 새로운 가드가 저를 한 번 더 호출하며 신분을 확인했습니다. 룸에 있는 여러 백인들을 제외하고 '굳이 왜 나만...?'이란 의문을 애써 흘려보내기도 했습니다. 가드의 눈에는 못미더워 보이는 동양인이었나봅니다.
미리 캡쳐해 간 자료 번호를 사서님께 내밀었습니다. 가드와는 반대로 은근한 미소를 짓는 그의 표정 덕에 긴장이 풀어졌습니다. 존스턴에 관련된 자료는 모두 3가지. 사서에게 받은 종이에 연필로 번호를 기입했습니다.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작은 돋보기를 주었습니다. 저는 널찍한 자리를 택해 앉았습니다.
들릴락 말락 '톨톨톨...' 작은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수레에 실린, 존스턴의 유산들이 도착했습니다.
받은 것은 3가지 중 2가지 자료로, 곧 부서질 것 같은 나무 박스와 존스턴산스의 Regular굵기 원도 였습니다. 100년 전 디자이너가 설계한 실제 원도, 목 뒤에 돋은 소름을 느끼며 자료를 전달받았습니다. 광산에서 갓 캐낸 돌처럼 커다랗고 약간은 거친 원도, 한 세기 세월의 때를 묻힌 채로 저에게 왔습니다.
처음에는 연필로 그렸을 것입니다. 스케치 상태에서 맘에 드는 글자는 검정 잉크로 색을 채웠을 것입니다. 만족스럽지 않은 글자는 화이트로 지우면서 수정한 후, 다시 검정 잉크로 조형을 마무리했고, 그래도 맘에 들지 않으면 과감히 도려내고 새 종이에 처음부터 그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누덕누덕 기워져 완성되었고 100년이 더 지났습니다.
연필 자국, 화이트 자국, 도려낸 종이와 덧붙인 종이의 다른 색감, 최대한 깔끔하게 보이도록 노력한 레이아웃을 보며 영혼을 갈아 넣은 한 글꼴 디자이너의 시간들이 보였습니다.
같은 알파벳의 다른 버전 시안인 대문자 Q와 U, 소문자 g를 보니 문득문득 찾아오는 결정장애의 순간에 느꼈을 고뇌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소문자 g가 다른 시안으로 채택됐다면 어떤 평가를 들었을까 상상해봅니다. 완료 직전까지도 이게 좋을까, 저게 좋을까, 둘 혹은 셋 시안 사이에서 좋은 결정을 위해 끙끙대는 작업자의 모습은 1900년대나 지금이나 다 똑같이 어려운 일이었겠죠.
유난히 연필 자국과 화이트 수정이 많은 대문자 G는 O, C와 끊임없는 균형감 비교를 했을 것이고,
곡선이 많아 그리기 어려운 소문자 s는 그에게도 힘든 숙제였을 것입니다.
존스턴은 자필로 서체 디자인에 대한 세부사항을 남겼습니다.
Notes of Details
세부사항 메모
(In case of some being overlooked or in case of slight inaccuracies.)
일부 간과되거나 약간 부정확한 경우
Note : The 2nd QU to be cut together on one body.
참고 : 두 번째 QU는 한 몸으로 함께 잘라냅니다.
Height of letters = 1”
글자 높이 = 1”
Width of stem = 1/7th
줄기의 너비 = 1/7
The curves of B are slightly less than 1/7th
B의 곡선은 1/7보다 약간 작습니다
O,Q,C,G,S,& are a little taller than 1” and project slightly above & below top & foot lines.
O,Q,C,G,S,&는 1" 보다 약간 더 크고 상단 & 풋 라인 위와 아래로 약간 돌출한다.
J project slightly below foot line.
J는 풋 라인 약간 아래쪽으로 돌출한다.
K top arm & W centre fall slightly below top line.
K 상단 팔 & W 센터가 상단 라인 아래로 약간 내려간다.
WITH CARE, INK NOT waterproof.
관리 부탁, 잉크는 방수가 되지 않습니다.
기록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합니다.
당시 사용하는 타이포그래피 용어은 현대와는 조금 달랐었나 봅니다.
Top line→ Cap line으로, Foot line→ Base line으로 이해됩니다.
K, W의 조형 규칙은 현대 폰트 디자인의 조형과는 달랐는데, 다른 디자이너 분들과 이에 대해 한번쯤 이야기해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Slightly가 반복되는 것에서 조심스럽게 사용해주길 바라는 소망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제 두 번째로, 곧 부서질 것 같은 자주색 상자를 열어봅니다.
사서 선생님이 우선 전달 해 준 자료 중, 두 번째 자료가 이 오래된 박스 안에 있었습니다.
낡아빠진 상자에는 영국 타입디자인의 보물들이 들어있었습니다.
옥스퍼드 교수이자 예술가였던 이미지 셀윈(1849-1930)의 타입디자인 스케치도 있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그의 작업에 대해서도 쓰고 싶네요.
앞선 자료보다 더 색이 바래 있고, 한 꺼풀 비닐을 입고서 더 소중하게 보관된 존스턴 산스 스케치.
날짜를 보니 1929년. Bold 두께를 만들기 위한 원도입니다.
Bold 굵기의 개발은 10년 정도 뒤에 이루어졌는데, Regular의 개발 덕분인지 스케치가 보다 깔끔합니다.
'Redrawn heavier'
붉은색으로 큼직하게 써있습니다. 굵기별, 크기별 다른 시안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아요. 자료 하단에 직접 기입한 크기와 두께 덕분에 겨우 'Redrawn' 을 읽었습니다. 당시는 '펜'이 보편적 필기도구였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붉은색의 스크립트 글씨는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매우 멋집니다.
'l.c. letter b to match'
정원 O꼴로 지오매트릭 계열의 특징이 있는 서체라 c와 l을 합쳐 b를 만들어도 무리없이 잘어울립니다.
붉은색 손글씨에서는 감동했지만, 작은 메모의 글씨체에서 삐뚤빼뚤 인간미도 느껴지네요.
마지막 자료는 받는데 좀 시간이 걸렸습니다.
자료가 도착하고 그 이유를 유추했는데, 수레의 면적을 뛰어 넘는 거대한 포스터의 '크기'때문 인 듯 했습니다.
사서님도 자료를 책상에 올려주시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고 저도 웃음이 났습니다.
A0정도 크기에 테두리에 하드보드가 쿠션으로 둘러져 본래 크기보다 훨씬 커진 포스터.
특이한 점은 오리지널 존스턴 산스는 Bold와 Regular로 이루어져 있다고 알았는데, Heavy와 Ordinary로 표기 되어 있었습니다. 뮤지엄쪽의 날짜와 작품에 새겨진 년도를 확인해보니 1916년. 그리고 Heavy에는 대문자 밖에 없는 것을 보니 Ordinary굵기만 완성되어 있을 시기라고 예상했습니다.
Ordinary에는 대소문자는 물론 숫자와 일부 기호도 완성되어 있네요. 아무래도 교통사인물을 목표로 제작되었기에 큰 사이즈에서의 시원스러운 공간감이 좋아보입니다.
뮤지업 샵에서 이 포스터를 팔고 있었으면, 전 당장 사왔을 거 같아요.
V&A의 캔버스백은 화려하고 예쁘지만, 활자덕후를 위한 굿즈도 많이 생산해주면 좋겠어요.
사실 온라인에서 충분히 존스턴 산스에 대한 자료들은 충분히 찾을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모노타입에서 제작한 존스턴100의 출시로 이 서체가 이슈가 되기도 했고요. 그렇지만 손으로 만져보고, 깨알 글씨도 더듬더듬 읽어보며 보낸 1대 1 대면은 영광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존스턴의 기운을 받아, 다시금 작업 의욕을 지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