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츠부르크의 숫자들

잘츠부르크 거리를 거닐며 찾은 숫자 사인들.

by Jerry


체코에서 출발한 기차를 타고 잘츠부르크 역에서 내렸습니다.

타고 온 OBB기차는 신문물의 향기가 물씬 났는데, 역사도 깨끗하고 세련됐습니다.

왠지 부자도시 같습니다.


잘츠부르크 기차역 풍경


호텔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근처를 돌아다닙니다.

시내를 나가보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는 타이틀이 붙은 게트라이데 거리가 나옵니다.

글자 대신 그림으로 판매하는 물품을 표시한 정교한 간판이 매력적입니다. 오래전부터 아름다운 간판 디자인으로 유명했는데 몽클레어, 프라다 등 명품 상점이 많아지고, 점차 관광객을 위한 거리로 변하고 있네요.

아담한 골목에서 명품관과 전통상점을 구경하며 작은 호화로움을 즐기기 좋습니다.


잘츠부르크 대학교 근처에서 본 사인


호엔잘츠부르크 성 아래 거리를 걷습니다. 그곳은 네모난 건물의 나열입니다.

실제로 보면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묵직한 돌 밑에 건물들이 주욱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모든 건물이 돌을 떠받치는 것 같이 단단하고 각진 꼴입니다. 이전 도시인 프라하에서는 건물 자체가 좀 더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그림이 그려진 건축물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던 반면 잘츠부르크의 건축물은 심플합니다.


심플한(혹은 밋밋한) 건물벽에 붙은 숫자가 눈에 자꾸 띕니다.

제가 아시안이라 그런 걸까요. 아니면 프라하와 비교되어 그런 걸까요.

빨간 테두리 안에 중세시대를 연상시키는 블랙 레터 아라비아 숫자는 눈에 상당히 자극적입니다.

블랙 레터를 사용한 숫자가 풍기는 특유의 분위기. 너무 좋습니다.

처음 사인을 촬영한 이후 1부터 0까지 모아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숫자와의 숨바꼭질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카페 자허, Fürst 초콜릿 가게, 모차르트 박물관과 생가, 묀히산 현대미술관, 게트라이데 거리, 린저 거리, 슈퍼마켓 빌라 등 잘츠 시내를 매일 쏘다니며 주소 사인을 모았습니다. 잘츠부르크에 4일 정도 머무를 동안 빨간 테두리의 사인은 생각보다 눈에 잘 띄었습니다.



독일어권인 오스트리아는 그 때문인지 사인 대부분 블랙 레터 서체를 사용합니다.

일부 낡아 보이는 사인에서는 양각 표현도 찾을 수 있네요.

4:3 비율의 가로 직사각형이 기본형이지만, 사방 귀퉁이를 가위로 자른듯한 팔각형도 보입니다.

단 하나, 린저 거리에서는 2:1 비율의 가로형도 발견했습니다.

Michael Ferner 갤러리 사인에는 귀여운 새를 올려 작품처럼 보입니다.


로툰다, 프락 투어, 세리프, 산세리프 스타일 등 숫자도 거리명도 제각각 폰트로 쓰여 있습니다.

공통점이라면, 눈에 잘 띄도록 Bold~Heavy 정도의 굵기를 썼다는 것 정도일까요.

사인 위치도 조금씩 다릅니다. 사진에서 눈치챘겠지만, 제 머리보다 위에 있고 대부분 2m 부근 위치에 있습니다. 간혹 더 낮거나 높은 위치에 있는 사인도 있었습니다.


린저 거리(Linzer Gasse)에서 찍은 사인은 재밌는 특징이 있는데,

Gasse를 자세히 보면 에서 s를 쓴 방법이 두 가지 있습니다.

먼저 하나는 일반적인 s형태로 쓴 모습이 입니다. 아무래도 형태적 차별성 때문에 가독성이 좋은 편입니다.

다른 하나는 유명한 'Walbaum-Fraktur'체 에서 보이듯 s를 'f'와 비슷한 꼴로 표기하고, 'f'에서 우측의 가로획만 빠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실 이 s표기 방법은 독일어권에서는 익숙할지 모르지만, 저에겐 생소합니다. 같은 유럽 내 비독일어권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합니다.


혹시 숫자를 쓸 때 7을 어떻게 표기하시나요?

위 사인에서는 숫자 7 표기법이 두 가지가 있는데, 숫자 7 중앙에 얇은 가로선을 그은 것과 긋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특히 중앙 가로선이 있는 7은 필기법에서도 볼 수 있는데, 잘츠부르크 호텔 체크인 시 룸넘버에 포함된 숫자 7이 그러했습니다. 낯선 숫자 표현에 다시 한번 룸넘버를 되물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유럽을 돌아다니며 묵었던 몇몇 호텔에서도 7의 손글씨 표기법이 같았는데 유럽 특유의 필기 문화라고 스스로 잠정 결론 지었습니다.


한국에서의 기억을 더듬으면, 보통 중앙에 가로선을 긋지 않는 7이 많았습니다.

같은 아라비아 숫자인데, 문화권과 지리적 차이에서 오는 필기법의 차이가 신선하게 느껴집니다.

비아시아권 타입 디자이너를 만나게 되면 묻고 싶은 질문 리스트에 숫자 7의 필기법을 추가해 봅니다.


잘츠부르크에서 묵었던 호텔 키 봉투, 807호라고 쓴 직원의 손글씨.


안개 서린 풍경과 비 내리는 날이 많았던 잘츠부르크.

여행 사진을 보노라면 빨갛디 빨간 테두리의 사인을 찍었는데도 어쩐지 습기 가득한 색감이 나오는 이유가 날씨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맑은 날을 못 본 것이 아쉽지만 안개가 만든 환상적인 분위기는 혼자 여행에 적합한 날씨라 생각했습니다.


'완벽히 화려한 요새' 라 부르고 싶습니다.

굳건한 호엔잘츠부르크 성과 어스름한 안개, 그 뒤 눈 덮인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잘츠부르크.

아름답고 호화로운 골목길을 거닐고, 숫자들과 숨바꼭질을 할 만큼 여유로웠던 잘츠부르크.

모차르트 쿠겔 초콜릿으로 혀에게 작은 사치를 주러, 숫자들에게 안부 전하러 다시 가고 싶어 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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