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크링스포어 뮤지엄에서의 레터링 수업
여행 6일차이자, 독일에 도착한 첫날, 미리 예약한 숙소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예약한 곳은 공동화장실이 있는 플랫이었는데, 위치와 건물 상태를 보고 숙소를 포기하게 됩니다.
지하철에서 한참 걸어가야 하는 위치, 숙소 옆 스포츠 도박장으로 의심되는 가게..
실제 치안은 알 수 없으나 어수선하고 낯선 환경 때문에 겁쟁이 쫄보 모드로 급 전환되었습니다.
시간을 보니 곧 해가 떨어질 것 같습니다.
근처 카페에서 폰으로 긴급 숙소 서치를 하고, 2박 예약에 성공. 호텔로 갑니다.
쫄아버린 마음에 통장잔액도 쫄쫄 새나가는 상황.
사실 오펜바흐에 숙소를 정한 이유는 가격 때문이었지만, 크링스포어 뮤지엄도 가깝기 때문이었습니다.
크링스포어 뮤지엄(Klingspor Museum)은 타이포그래피, 캘리그래피, 북디자인을 다루는 뮤지엄입니다.
20세기 초에 Klingspor typefoundry를 운영했던 H.C. Karl Klingspor(1868 - 1950) 박사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1953년에 개관했고, 이후 여러 서체 디자이너들의 후손으로부터 기증품을 받았습니다. Klingspor 타입 파운더리에서 일했던 디자이너 중에는 블랙 레터 폰트 디자인으로 유명한 Rudolf Koch(1876 - 1934)가 있습니다.
급히 예약한 호텔은 친절히 맞아줍니다. 친절한 미소도 숙박료에 포함돼있는 것이겠지만요.
짐을 내려놓고 굳은 어깨를 여러 번 풀어봐도 고통스러운 긴장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몇몇 카톡으로부터 안전이 최고라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를 받고 나서야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새로 잡은 호텔 창문 밖으로 우연인지, 크링스포어 뮤지엄이 보입니다.
다음날인 일요일, 크링스포어 뮤지엄 오픈 시간 11시에 맞춰 도착합니다.
오픈 시간이 지났는데 문이 잠겨있습니다.
당황스러운 상황에 서성이고 있는데, 마침 독일인 부부가 와서 함께 오픈을 기다립니다.
똑똑. 쿵쿵. 부부 중 남편이 문을 두드리니 멋스러운 은발 할머니가 뮤지엄 대문을 열어줍니다.
한 분은 계속해서 전시장을 정리하고 있고, 은발 할머님은 맞이해줍니다.
노크 후 열린 대문. 독일의 인간미라고 해야 할지, 전시장에 초대받은 기분도 듭니다.
제63회 국제아동도서전 전시 중입니다. 지난달에 끝난 타입 관련 전시를 보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신기한 팝업북, 아동도서 특유의 풍부한 컬러감에 매료되어 한참을 전시장에서 보냈습니다.
마침 당일에 독일 캘리그래피 작가 'Tanja Leonhardt'님의 레터링 수업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까 문을 열어주신 은발 할머님께 문의하니, 자리가 있다며 예약을 도와주었습니다.
일정 금액을 내고 참여를 예약을 확정 짓고 2시에 시작되는 워크숍을 위해 점심을 먹습니다.
이방인에게 독일에서의 일요일은 잔인합니다.
마트와 쇼핑몰은 물론, 레스토랑도 거의 문을 닫습니다.
몇 없는 선택지 중에서 케밥을 선택해 든든히 먹었습니다.
다시 뮤지엄 계단을 걸어 올라 맨 꼭대기 층으로 향합니다.
선생님도 수강생도 모두 독일인, 저만 이방인입니다.
친절한 Leonhardt 선생님은 일부 설명을 영어로 해주고, 질문도 해주며 챙겨주셨습니다.
준비하신 필기구를 모두 꺼내어 보여주십니다.
라틴알파벳을 쓸 수 있는 거의 모든 도구들이 꺼내져 나옵니다.
두께감이 다양한 펜 촉, 대나무로 만든 펜, 나무 브러시, 납작 브러시, 컴퍼스...
어떤 것으로 사용해도 좋고, 모든 제약이 없이 자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간간히 Leonhardt 선생님이 화려한 스킬을 직접 보여주십니다.
나무 브러시로 보여준 캘리그래피는 정말 멋있었습니다.
사실 대나무를 깎아 만든 펜과 나무 브러시는 처음 접하는 도구였는데,
바로 사용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영광이었습니다.
나무 브러시는 시원스럽게 획을 그을 때, 갈필 비슷한 특유의 질감이 나타나는 게 인상 깊었습니다.
펜으로 글자를 그렸을 때, 직접 시연을 보여주시기도 했습니다.
여러 도구들 중 펜촉이 가는 펜으로 썼을 때, 글자 두께 대비가 큰 이미지가 나와 흥미로웠습니다.
펜으로 한참 연습할 때, 저에게 도움될 것 같은 레퍼런스가 있다며 오래된 책을 보여주었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레퍼런스에 감탄하고, 허락을 구한 후 사진도 잔뜩 촬영하고, 한국에 돌아가면 아마존에 검색해봐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글꼴디자이너로 몇년간 일했지만, 내 손글씨는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컴퓨터 작업과는 달리 자신이 없었습니다. 손글씨는.
디자이너로서 필요한 소양이라 생각해 틈틈히 배우기 시작한 한글서예, 라틴캘리그래피는 후회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독일에서 이 수업을 듣는 것도 엄청난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행 일정과 딱 맞았던 수업시간, 평화로움을 넘어서 고요했던 독일의 일요일을 소확행으로 채워준 크링스포어 뮤지엄 정말 고마웠습니다.
수업 종료 30분 전에는 흥미로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큰 종이를 4 등분합니다.
한쪽면에 먼저 긍정적/부정적 문장을 각각 적습니다.
내가 오늘 겪은 일, 내 생각과 감정 등 어떤 주제도 자유입니다.
두 번째 칸에는 눈을 감고 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적습니다.
세 번째 칸에는 왼손으로 적어 넣습니다.
마지막 칸에는 눈을 감고 왼손으로 적습니다.
같은 문장이지만, 각 칸에 있는 글자들 생김새가 제각각입니다.
익숙한 근육을 쓰지 않고 새로운 방법으로 썼을 때, 캘리그래피를 새롭게 느끼게 됩니다.
각자가 쓴 이상하고, 유아적인 글자꼴을 보며 모두들 웃음이 터집니다.
꾸며지지 않은 원초적인 감정 그 자체를 담은 글자꼴.
낯설고 파격적인 글자 형태를 발견하게 되어 기쁜 시간이었습니다.
해가 지기 전,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갈 즈음 수업은 종료되었습니다.
함께한 오펜바흐 주민들과 Leonhardt 선생님, 무엇보다 이 장소 '크링스포어'에서 보낸 일요일은 저물어가는 핑크색 하늘만큼이나 따뜻했습니다.